메뉴 건너뛰기

close

내 유럽 여행의 시작은 스페인 남쪽 도시 '세비야'였다. 사실 한 달 남짓 일정으로 유럽의 여러 나라를 돌아보는 일반적인 여행 패턴이라면 세비야를 찾기는 다소 힘들다. 스페인 자체가 유럽의 변방 서남쪽 가장자리에 있는데다 세비야는 거기서도 남쪽 끝 안달루시아 지방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대체로 유럽 여행자들은 스페인을 목록에서 빼거나 바르셀로나, 마드리드 정도만 끼워 넣기도 한다.

 

난 정반대였다. 스페인은 유럽에서 내가 가고 싶은 나라 1순위였고, 그중에서도 세비야는 1순위 도시였다. 유럽의 여러 전통문화 중에서 내 호기심을 가장 자극하는 건 플라멩코인데 바로 플라멩코의 고향이 세비야다. 떠나기 전 '다른 건 다 놓치더라도 플라멩코는 놓치지 말자'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플라멩코를 보기 위해 세비야를, 세비야를 가기 위해 스페인을, 스페인을 방문하러 유럽을 선택한 것이다.

 

마드리드에서 6시간을 달려 세비야에 도착해 곧바로 관광안내소에 들렀다. 숙소 리스트와 플라멩코 공연 정보를 챙겼다. 어렵사리 숙소를 구하고 바로 플라멩코를 보기 위해 팸플릿을 살폈다. 10군데 정도 되는 공연장이 소개돼 있었다. 특별히 고민하지 않았다. 목록 맨 처음에 올라온 곳으로 정했다. 'TABLAO EN ARENAL'이라는 레스토랑이었다.

 

관광객을 상대로 한 플라멩코 공연은 주로 바나 레스토랑 같은 곳에서 볼 수 있다. 식당 한쪽에 마련된 무대에서 펼쳐지는 공연을 밥을 먹거나 술을 마시면서 편히 즐기면 된다. 나는 밥을 시켰지만 공연에 집중하기로 했다. 외국에서 돈을 내고 공연을 본다는 건 상당한 문화적 우월감을 느끼게 한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만족감을 충분히 느끼고 싶었다. 비록 허영으로 채워진 만족감일지라도.

 

그런데 공연이 시작되면서 나는 고민에 빠졌다. 애초 공연을 감상하는데 카메라가 방해될 것 같아 카메라를 꺼내지 않고 편안하게 감상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막상 무대의 빛이 붉게 변하고 매력적인 무용수들이 하나둘씩 등장하자 멋진 사진을 남기고 싶은 욕구가 머릿속을 기습했다. 나는 카메라를 가방에 넣은 지 10분도 안 돼 다시 가방 지퍼를 열었다.

 

나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실내 무대 조명은 깨끗한 사진이 나올 만큼 넉넉한 빛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어두운 곳에서 카메라는 빛을 더 많이 받기 위해 조리개를 최대한 열고 셔터도 최대한 천천히 닫는다. 그런데 무용수들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기 때문에 공연 사진은 항상 사람이 움직인 흔적이 길게 남아 흉하게 찍힌다.

 

내 경우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내 카메라는 이런 악조건을 충분히 극복하고 매끄러운 사진을 만들 만큼 똑똑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가끔씩 사진 찍는 걸 단념하고 공연에 집중하려고 했으나 무용수의 동작이 조금만 극적으로 변하면 다시 카메라를 들었다.

 

대충 진행될 거라 예상한 공연은 의외로 1시간 반을 충실히 채웠다. 시간은 흐르고 음악과 춤은 계속 바뀌었지만 사진은 그대로였다. 나는 계속 마음이 들뜬 상태로 카메라를 들었다 놨다 반복했다. 공연이 끝나고 나니 약간은 허무했다. 사진도 만족스럽지 않고 공연도 제대로 즐기지 못한 것 같아 속상했다. 공연의 절반에 가까운 시간 동안 음악과 춤이 흘러나오는 무대를 2.5인치 LCD 창을 통해서만 바라본 게 후회가 되기도 했다.

 

내가 왜 그리 사진에 집착했나

 

한국으로 돌아온 후 편안한 마음으로 그때의 사진을 보니 당시의 속상함은 사라졌다. 그때 내가 왜 그리 사진에 집착했나 싶은 생각도 든다. 여행기를 쓰고 있는 지금 생각해보니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다. 눈물을 쏙 뺄 정도로 비싼 돈을 지불하고 관람한 공연엔 어떤 보상이 필요했다. 그 보상은 당연히 충분한 감동이어야 할 텐데 나는 그것을 (지금 여행기를 쓰는 것처럼) 타인에게 알릴 '증거물'로 받길 원했던 것이다. 플라멩코를 보러 간 이유가 플라멩코를 보고 싶기 때문이 아니라 플라멩코를 보고 있는 나를 보고 싶어 했기 때문이었다.

 

평소에는 사진 찍는 걸 귀찮게 여기던 내가 한 달간 카메라와 붙어다니는 기회를 얻으면서 카메라와 사진이라는 놈에 대해 적지 않은 생각을 했다. 여행지에서 사진 찍는 일은 분명 재미있고 생산적인 일이다. 하지만 거기에 너무 집착하다보면 여행자 스스로 자유롭게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기회를 흘려버릴 수 있다.

 

이런 경험은 여행 중 또 있었다. 고흐가 살았던 프랑스 '오베르 쉬즈 우아르'에 갔을 때인데 그땐 일정상 마을을 둘러볼 시간이 별로 없었다. 난 고흐가 머물렀다는 식당, 숙소, 교회 등을 열심히 찍어대느라 그냥 겉만 바라보고 지나쳤는데, 지금은 이곳의 기억이 거의 떠오르지 않는다. 그땐 사진이 기억을 붙잡아 줄 거라 믿었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카메라를 이해하고 사진을 이해하면 어느 정도 '포기'할 줄 알게 된다. 아무리 멋진 광경이라도 빛이 부족해 사진에 그대로 반영할 수 없는 순간이 있다. 또 결코 사진에는 담기지 않는 감동도 있다. 그걸 모르면 자꾸 사진에 집착하게 된다. 사진은 남겠지만 기억은 남지 않는다. 옛날 휴대폰 광고 카피 하나가 생각난다.

 

"놓치고 싶지 않은 순간이라면 잠시 꺼두셔도 좋습니다."

덧붙이는 글 | 지난 4월 한 달 동안 프랑스와 스페인, 스위스, 오스트리아, 이탈리아를 여행했습니다. 


태그:#플라멩코, #세비야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