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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나는 공산주의자이지만, 어린 시절의 나는 보수주의자였다.

 

어린 시절의 내가 가지고 있던 세계관이 스스로 고민하고 선택한 이념이 아니라 제도권 교육으로부터 주입된 것일진대, 당시의 나를 보수주의자였다고 일컫는 것이 합당한지는 모르겠으나 지금 생각해보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보수적이었던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어린이들도 여러 사안에 대하여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한다. 하지만 세계를 보는 시선이 제도권 교육으로부터 주어진 틀을 벗어날 수 있는 시기는 아직 아니다.

 

나 역시 초등학생 때까지만 하더라도 국가와 민족이 무엇보다 소중한 가치라고 생각했고, 가부장제 가족 이데올로기를 신성한 것으로 여기는 충실한 기독교인이었다.

 

그랬던 내가 지배 계급의 헤게모니에 대한 반기를 들기 시작했던 때는 중학교에 진학하여 록 음악을 듣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존 레논의 <Power to the people>을 들으며 계급에 대하여 막연히 생각하기 시작했고, 핑크 플로이드의 <Another brick in the wall, Pt. 2>를 들으며 학생들을 소시지로 만들고 결국 모든 것이 벽돌이 되어 벽을 만들 뿐인 제도권 교육을 혐오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고등학생 때 순전히 반항하기 위해서 마르크스 레닌을 읽기 시작했고, 지금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전경남의 <불량누나 제인>(한겨레아이들, 2008)이 갖는 가장 큰 미덕은 어린이들의 보수적인 시각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는 점이다.

 

주인공 지원은 캐나다로 어학연수를 가서 이미 그곳에서 공부하고 있던 누나 소영(영어 이름은 제인)을 보며 “깡패”라고 생각한다. 소영이 배꼽티와 미니스커트를 입고 담배를 피우는 것이 “불량”하게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성인 독자인 나의 시각에서는 지금이 무슨 장발 단속 시대도 아닌데 배꼽티에 미니스커트 입고 담배 피운다고 해서 불량하다고 말하는 것이, 고길동 아저씨한테 반말한다고 둘리를 문제아로 부르는 것만큼이나 우습게 느껴졌다.

 

물론 소영의 모습이 기성세대에게는 불량하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 불량하다는 것의 기준은 누가 만든 것이던가? 결국 기성세대가, 특히 지배 계급이 만들어낸 지배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성인 독자인 나보다 어린이인 주인공의 시각이 훨씬 보수적이라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린이는 보수적이다’라는 사실을 새삼스레 재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점에서 한국 교육의 병폐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초등학교에서부터 노사협상 전술을 배우는 프랑스 어린이들에 비하여, 자본가 계급의 헤게모니를 주입식으로 암기하는 한국의 어린이들이 보수적인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한국의 어린이들이 통합형 논술에 대비해야 한다는 이유로 ‘똘레랑스’를 공부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지만, 화석화된 지식의 암기가 그들의 세계관에 그대로 반영될 리는 만무하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지원은 소영과 지내는 동안 조금씩 누나를 이해하게 된다. 똘레랑스라는 것은 대부분 교육을 통하여 습득하는 것이지만, 관계 속에서 자연스레 형성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불량하다고 생각했던 누나를 이해하게 되기까지의 과정, 즉 기성세대로부터 주입된 선입견을 떨쳐버리고 자신과 다른 타인을 이해하기까지의 과정이 잘 그려져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 아이들은 이 동화를 한 번쯤 읽어볼만하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기성세대의 시각에서 불량한 것으로 보이는 삶의 방식을 택한 것에 대해 소영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무리 이 동화가 소영을 바라보는 지원의 시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하더라도, 소영이라는 캐릭터가 좀 더 입체적으로 그려져 있었더라면 불량함에 대한 해명이 보다 수월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미 박기범의 『문제아』에서 해명되었듯이, 문제아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지배 계급의 왜곡된 시각이 만들어낸 말일 뿐이다. 어떤 아이를 함부로 문제아라 재단하기 전에, 그들의 이야기에 진솔하게 귀 기울여야 한다.

 

이명박 탄핵을 요구하는 촛불집회에 참여하는 10대를 향해 우파 언론들은 연일 폭언을 쏟아붓고 있다. 이른바 ‘국민성공시대’에 얌전히 영어 공부나 하고 있어야 할 10대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모습이 저들이 보기에는 심히 ‘문제아’ 같을 것이다.  

 

제도권 교육에 의하여 보수적인 어린 시절을 보냈던 10대들을 누가 거리로 쏟아져 나오게 했는가? 그 배후에는 소망정부(소망교회 정부, 혹은 소로 망하게 될 정부)가 있다. 

 

불량정부에 맞서는 문제아들의 시대, 우리 아이들에게 <불량누나 제인>의 일독을 권한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레디앙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불량 누나 제인

전경남 지음, 오승민 그림, 한겨레아이들(2008)


태그:#불량누나 제인, #한겨레아이들, #아동문학, #이명박 탄핵, #촛불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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