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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처럼 흘러가는 시간 그리고 그 흘러가는 시간에 속절없이 동반자가 되어야 하는 역사를 어찌 할 것인가. 역사도 결국 시간 순서에 따라 흘러가는 것, 곧 강물과 같은 것이라면 그 안에서는 어떤 것도 영원함의 대상일 수 없고 영원함에 대한 논의 무대에서는 더더욱 제외될 수밖에 없다.

 

내가 딛고 선 땅과 역사 자체가 혼돈인 시대에 살고 있다면, 역사를 흐름 그 자체로 보는 시각마저 끝없이 빨라지는 속도감에 어쩔 줄을 모를 게다. 그 엄청난 속도와 그 숨 막히는 혼란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 길은 단 한 가지이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마주친 현장과 (흐름으로서 본) 역사에서 최대한 멀찍이 떨어져 그 모든 것을 '바라보기'로 바라보는 것이다.

 

역사를 관찰한다는 것, 그러니까 역사를 흘러가는 점, 선 개념으로 보지 않고 이것과 저것이 관계를 맺으며 엮어가는 형상 개념으로 본다는 것은 지금껏 우리가 알아온 역사 개념에 비추어 볼 때 매우 낯설다.

 

쉽게 말해서, 지금껏 우리가 1~2차원에서 생각해 온 역사적 사건, 발자취(흐름)를 죽 일으켜 세워 공간을 만들어줌으로써 어떤 형태를 지닌 3차원 대상으로 만든다고 생각해보자. 이렇게 되면, 역사는 흘러가는 그 무엇이 아니라 어떤 큰 공간에서 이런 역사(흐름)와 저런 역사(흐름)가 서로 일련의 관계를 맺으며 엮어가는 것이 된다.

 

<세계 역사의 관찰>이 말하는 역사는 이렇듯, 개별 역사들을 일렬로 늘어뜨리지 않고 각각에 맞는 형태와 공간에 따라 자리를 만들어준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역사를 바라보는 이는 그 역사 안에 있는 듯하면서도 어느 순간 오히려 역사 밖에 있게 된다. 따라서, 역사를 흐름 곧 시간 개념으로 보는 것과 달리, (우주적) 공간 개념으로 본 역사는 자연스레 역사 연구자에게 매우 폭넓은 시야를 제공하며, 그는 제3자(신과 같은) 시각마저 갖게 된다.

 

지은이 야콥 부르크하르트는 그 복잡다단한 역사를 그렇게 손쉽게 일렬로 늘어뜨릴 수 없었던 듯하다. 그는 시·공간이 지닌 특별한 의미를 무시한 채 (개별) 역사들을 도식화하는 방식을 거부했으며, 오히려 (개별)역사들이 지닌 각각의 특성과 의미에 목소리와 형태를 부여하여 (전체)역사 위에서 활동하도록 했다.

 

그렇게 (개별)역사들이 각 특성과 의미에 따라 활동하며 관계를 형성해 갈 때, 그 안에서 그는 비로소 '역사'를 이루는 그 무언가를 발견하는 방식으로 역사를 '관찰'했다. 다시 말해, 야콥 부르크하르트는 역사 자체를 (우주적) 공간에서 바라보았고, (우주적) 공간에서 보는 역사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관찰' 기법을 사용했다.

 

"우리의 사색은 단순히 권리이자 의무인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동시에 높은 욕구다. 그것은 아주 거대하고 보편적인 속박 받음의 의식 및 필연성의 의식 한가운데서 우리의 자유다. 물론 우리는 우리의 인식을 위협하는, 인식 능력의 일반적·개인적인 결함과 그 밖에 다른 위험들도 자주 의식한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인식(Erkenntnis)'과 '의도(Absichten)'라는 양극단의 관계를 고려해야 한다. 역사적인 글에서도 이미 인식을 향한 열망은 전승의 옷을 입고 등장하는 수많은 의도라는 장애물에 부딪친다. 그 밖에도 우리는 자신의 시대와 사람을 지향하는 의도들에서 결코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이것이 아마도 인식에는 더욱 나쁜 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가장 분명한 시험은 다음과 같다. 역사가 우리 자신이 속한 세기와 우리 자신에게 가까워지면 우리는 모든 것이 훨씬 '더 흥미롭다'고 여긴다. 

 

이것은 실은 우리의 '관심이 더 커진다'는 뜻일 뿐이다. 여기에 개인들과 [민족] 전체의 운명에서 미래의 불확실성이 덧붙여진다. 그런데도 우리는 끊임없이 이런 불확실성을 향해 눈길을 돌리고, 우리의 예감에는 아주 분명하게 보이는 과거의 수많은 실마리들을 이곳으로 끌어들인다. 그러나 이것은 실은 우리가 추적할 수 없는 것이다.

 

크고도 어려운 삶의 수수께끼를 아주 조금이라도 풀 수 있도록 역사가 우리에게 도움을 주기를 바란다면, 우리는 개인적·시대적 두려움의 영역을 벗어나[=자기와 가까운 시대와 공간을 벗어나] 우리 눈길이 이기적으로 재빨리 흐려지지 않는 영역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아주 큰 거리를 두었기 때문에 더욱 고요한 관찰을 통해서 우리가 행하는 일들의 처음 상황이 나타난다.(이 책, 35~37)

 

역사, 그것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활동하는 것이다

 

야콥 부르크하르트

(Jacob Burckhardt, 1818~1897)

 

스위스 바젤과 독일의 베를린 대학교에서 신학과 역사학을 전공했고, 역사를 공부하면서 문학과 미술도 함께 공부했다. 바젤 대학교에서 역사학 교수와 미술사 교수를 동시에 역임했다. 미술사 교수직을 맡으면서 비로소 본격적인 문학 연구를 손에서 내려놓았다. 그의 문학 연구는 원어 텍스트를 토대로 이루어졌다(그리스어, 라틴어, 이탈리아, 프랑스, 영어, 도이치어 등). 젊은 시절 부르크하르트는 랑케(Leopold von Ranke, 1795~1886) 밑에서 공부를 했고, 랑케가 물러난 다음에 베를린 대학교 역사학 교수로 초빙을 받았으나(1872년) 정중히 거절하고 고향인 바젤에 남았다. 바젤은 도이치 문화권의 변방에 위치한 도시지만 지성의 역사에서 톡톡히 한 몫을 한 곳이다.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 미술사학자 하인리히 뵐플린이 부르크하르트에게 배우고 그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부르크하르트는 역사 연구의 임무란 ‘발전’이 아니라 역사에서 ‘항상 있는 것, 되풀이되는 것, 전형적인 것`을 실증적으로 탐구하는 데 있다고 함으로써 우리 현대 문화의 발전에 대한 이해를 위해 결정적인 작용을 남겼다. 그는 문화사 및 예술사가로서 정통의 도이치 역사학 전통에서 벗어나 특출한 인물이다. 역사학자로서 그의 독특한 위치와 영향력은 그동안에도 이미 확고불변한 것이었거니와, 오늘날 문화사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면서 오히려 더욱 커지는 일면이 있다.

- 출처: 휴머니스트

이 책은 본래 1868년 겨울학기에 스위스 바젤 대학교에서 야콥이 했던 강의 '역사의 연구(Über Studium der Geschichte)'에서 비롯되었는데, 1868~1869년과 1870~1872년 두 차례에 걸쳐 했던 강의 내용이 그가 죽은 후인 1905년에 비로소 책이 되어 세상에 나왔다.

 

그가 죽고 몇 해가 지났을 때, 누이의 아들인 야콥 외리(Jacob Oeri)가 외삼촌 야콥 부르크하르트의 유품에서 이 강의록을 꺼내 1905년에 출간한 것이 바로 <세계 역사의 관찰(Weltgeschichtliche Betrachtungen)>이다.

 

야콥 부르크하르트, 그가 이 책의 근간이 된 강의를 하던 때는 도이칠란트 통일 전쟁이 한창 벌어지던 시기였다. 크게 보면, (현대)유럽 역사가 요동치는 (유럽)세계 정세에서 형성되던 시기이기도 했다. 이런 시대 특성도 한 몫을 했는지, 그는 결코 역사를 일렬로 늘어뜨리고 그 안에 자기 시대와 자기 삶을 (선처럼 늘어뜨린) 역사 어딘가에 무심히 떨어뜨릴 수 없었다.

 

오히려 그것이, 역사 자체가 요동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 시대를 욕보이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야콥 부르크하르트, 그는 필연적으로 역사를 '거리를 두고' 바라보았다.

 

야콥 부르크하르트는 바로 이러한 '거리두기' 관점으로 역사를 보았으며, 그런 관점에서 본 개별 역사는 서로 만나고 부딪히는 과정에서 '공통분모'를 보여준다. 역사 전체가 한 눈에 들어오는 '거리두기' 방식으로 '관찰'한 역사에서 그가 그토록 찾아헤맨 '역사'가 비로소 드러난 것이다.

 

참 많이 돌아온 느낌이 들지만, <세계 역사의 관찰>을 보는 이들은 지금부터 반드시 2가지-'역사'의 의미와 '관찰'의 의미-를 항상 되새김질해야 한다. 우선, 역사라는 말을 점, 선과 같이 무언가를 나열하는 것으로 생각지 말고 철저히 (우주적) 공간에서 그것을 생각하라는 것이다.

 

공간을 가늠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리두기'가 필요하며, '거리두기'로 바라보는 역사에서는 어떤 조건에도 적용할 수 있는 '보편타당한 것'을 마치 숨은 그림 찾는 작업이 된다. 이것은, 야콥 부르크하르트가 역사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아는 데 있어 꼭 바탕에 깔아두어야 할 것이다.

 

한편, 이 책이 역사를 대하는 방식인 '관찰'이란 바로 '거리두기'와 일맥상통하는 개념으로서, 이는 곧 역사의 파편들을 모아 무의미하게 줄 세우는 것이 아니라 각 특성에 따라 유의미한 관계를 맺어주는 것이다. 뒤죽박죽 혼란한 시기에 사건과 시간별로 구분하고 줄 세운 연표를 만드는 것이 중요한지, 아니면 시대와 장소와 사람이 영향을 주고받는 모습을 ‘관찰’하고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 중요한지 생각해보라.

 

야콥 부르크하르트의 <세계 역사의 관찰>을 본다는 것은 이처럼 (사건 중심이 아닌) 사람 중심의 역사를 중시하고 (일련번호 매기듯 연표를 만드는 것이 아닌) 의미 중심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다.

 

야콥 부르크하르트는 유럽인이다. 연표를 만들듯 역사를 이해할 때도 모든 세계 (개별)역사를 다 파악하기 힘든데, 하물며 그 모든 역사를 눈앞에 펼쳐놓고 거기서 다시 (의미를 찾아내기 위한) '관찰' 기법을 사용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작업이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의 의미를 찾아내는 작업에 몰두한 이 책이 그 자료로 서양사(유럽사)를 중심에 둘 수밖에 없는 어쩔 수 없는 한계를 이해해주었으면 한다.

 

야콥 부르크하르트의 역사 해석법을 어느 정도 이해한다면, 이제 그가 역사를 관찰하여 발견해 낸 세 가지 '공통분모'의 의미와 그 배경을 이해할 수 있다. 그가 찾아낸 역사의 세 가지 '상수(常數)'는 '되풀이 되는 것', '항상 있는 것', '전형적인 것'이다.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이며, 역사에서 무엇을 볼 것인가에 대하여 다룬 제1부('역사의 관찰')에서 야콥은 이와 같은 세 가지 '상수(常數)'를 그의 시대 배경에 연관시켜 설명했다.

 

이 같은 역사 '관찰' 방식을 통해, 야콥 부르크하르트는 역사에 나타나는 잠재력(요소)을 세 가지로 구분했는데, 국가, 종교, 문화가 바로 그것이다(제2부). 또한, 그는 이 세 가지 잠재력이 서로 주고받으며 형성하는 6가지 관계에 대하여 설명하는데(제3부), 국가와 종교는 고정된 요소이며 문화는 유동적인 요소이다.

 

여기서 우리는, "국가와 종교는 각기 정치적 욕구와 형이상학적 욕구의 표현인데, 이들은 적어도 해당 민족에게, 심지어는 그 세계에서 보편적 타당성을 요구한다"는 점을 알아야하며, 반면 문화는 "움직이는 것, 자유로운 것의 세계로서 필연적인 보편성이 아니고, 따라서 억지로 타당성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야콥이 역사의 활동성을 강조한 것을 생각할 때, 문화라는 역사 요소를 보는 그의 관점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야콥 부르크하르트가 역사를 바라보는 방식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면, 역사의 의미에 변형을 가하는 것(제4부 '역사적 위기들-전쟁과 혁명')과 그 변형의 중심 역할을 하는 이(제5부 '위대한 개인들-개체성과 보편성')를 다루는 그의 의도를 얼핏 감지할 수 있다.

 

개별 역사가 아닌 역사성 그 자체를 연구했던 그는 '역사적 위기들'을 매우 무덤덤하게 보았으며 어찌보면 역사성을 형성하는 데 있어 필수불가결한 것으로도 보았다. 물론, 전쟁과 혁명같은 것을 좋게 보았다는 말은 아니지만, 그는 '역사적 위기들'이 역사성을 이루는 (특별하지만 경우에 따라 꼭 필요한) 일부로 보았으며, (모든) 역사 아래 흐르는 그런 암울한 면에 대해서 무척 민감했다. 이것은 그가, '역사'(의 의미)를 '인식'하는 것과 그 (긍정적·부정적) 변형에 관계된 '의도'를 파악하는 것에 관해서(제6장) 연구한 것과 맞닿아 있다.

 

지금 와서 이런 얘기를 다시 하면 어찌 반응할지 모르겠으나, 야콥 부르크하르트의 역사 이해는 매우 우주적임을 기억해두자. 말하자면, 이 책은 (세계)역사를 연구한 게 아니라 (세계 보편성을 지닐 만한) 역사성을 찾아내는 일에 몰두했다. 사학(史學)보다는 철학(哲學) 냄새가 나고, 야콥 부르크하르트가 마치 역사에 참여한 개별 구성원이라기 보다는 역사를 한 눈에 '관찰'하면서 불편부당하게 그 의미를 풀어내주는 '제3자'인 것처럼 보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자, 그 엄청나고 복잡한 (세계)역사의 성격, 곧 역사성을 차근차근 '인식'(이해)하려는 자는 이제 이 책을 펼쳐들라. 단, 매우 조심스럽게 그리고 아주 치밀하게.

덧붙이는 글 | <세계 역사의 관찰-역사에서 되풀이되는 것, 항상 있는 것, 전형적인 것에 대하여> 야콥 부르크하르트 지음. 안인희 옮김. 휴머니스트, 2008.
(원서) Weltgeschichtliche Betrachtungen by Jacob Burckhardt


세계 역사의 관찰 - 역사에서 되풀이되는 것, 항상 있는 것, 전형적인 것에 대하여

야콥 부르크하르트 지음, 안인희 옮김, 휴머니스트(2008)


태그:#역사, #세계 역사의 관찰, #야콥 부르크하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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