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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은 유엔을 제외하고는 남북한이 동시에 가입한 유일한 다자간안보협의체이다.

ARF가 출범한 것은 지난 94년. 유럽의 유럽안보협력기구(OSCE)를 모델로 동남아국가연합(ASEAN) 회원국들의 주도로 만들어졌다. 매년 7월에 열리는 총회 의장국은 ASEAN 의장국이 맡는다.

현재 회원국은 ASEAN+3국(한․중․일), 미국, 호주, 캐나다, 인도, EU 그리고 북한까지 참여해 23개국이다. 파키스탄과 신생 독립국 동티모르, 그리고 EU와는 별도의 개별국가 가입을 원하는 영국, 프랑스 등이 ARF 가입신청을 해놓고 있다.

지역적 안보기구로서의 역할은 유럽의 OSCE 수준에 현저히 못 미치지만,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유일한 정부간 안보협의체인 ARF의 탄생은 냉전형 안보질서로부터 탈냉전형 안보질서로의 이행이라는 상징성을 갖는다.

2000년 ARF 의장성명의 한반도 조항

한국은 94년 출범 때부터 ARF에 참여해 이니셔티브를 주도해 왔다. 북한은 2000년 4월에 공식 가입신청서를 제출해 그해 7월 방콕 총회에서 정식 회원국으로 가입했다.

집권 초부터 북한의 국제사회 동참을 권유해온 김대중 대통령의 베를린 선언(3월9일)과 제1차 남북 정상회담 합의(4월8일) 및 6·15공동선언(6월15일) 이후에 북한이 ARF에 가입해 사상 첫 남북 외무장관회담이 성사된 점을 보면 ARF에서의 한국의 이니셔티브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때도 ARF 총회는 북한의 가입을 환영하는 한편으로 남북 정상회담을 비롯한 남북 대화와 한국 정부의 대북 포용정책에 대한 지지 등을 반영한 내용의 의장 성명을 채택한 바 있다. 당시 ARF 의장성명의 한반도 조항(21항)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외무장관들은 한반도 상황의 긍정적 발전에 만족을 표시했다. 그 긍정적 발전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ARF 회원국과의 대화와 교류증진도 포함된다.

장관들은 특히 2000년 6월 13~15일 평양에서 개최된 남북한 지도자들 간의 역사적인 정상회담을 환영하고 1945년 한반도 분단 이후 두 지도자들이 서명한 최초의 합의문인 6·15 남북공동선언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였다.

이와 관련, 장관들은 동 정상회담이 남북한 관계의 전환점이 되고 이와 같은 대화와 교류의 모멘텀이 지속 발전돼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와 궁극적으로 한반도 통일이 달성될 수 있을 것이라는 데에 견해를 같이했다."

ARF 소동은 유엔총회 결의안까지 거스르는 '망신 외교'

이처럼 한국 정부의 주도적 노력이 빛을 발했던 ARF 외무장관회담이 그로부터 8년만에 남북한의 냉전적 외교전으로 얼룩지고, 급기야 의장성명이 발표된 뒤 다시 수정되는 외교사에 전례 없는 '망신 외교' 사태까지 발생하게 된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지난해 10월 4일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남북공동선언문에 서명한 뒤 교환하고 있다.<사진공동취재단>
▲ 공동선언문 교환하는 남북 정상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지난해 10월 4일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남북공동선언문에 서명한 뒤 교환하고 있다.<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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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ARF 회담은 지난해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10·4 정상선언 이후 처음 열리는 회담이다. 10·4 선언은 6·15 공동선언의 계승을 천명하고 있다. 따라서 ARF 의장성명이 한반도 조항에 지난해 나온 10·4선언에 대한 지지를 담는 것은 국제외교의 자연스런 관행이다.

또 이미 유엔총회도 지난해 10월31일 "10·4 선언을 환영, 지지하고 이의 충실한 이행을 권고하며 남북간 대화, 화해에 대한 회원국들의 지원을 요청한다"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킨 바 있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는 국제외교 관행과 유엔총회 결의안까지 거스르는 '망신 외교'를 감행한 것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언론은 대부분 외교안보팀의 시스템 부재, 전략의 부재, 컨트롤 타워 부재를 지적하면서 외교안보라인의 인적 구성에 문제가 있다는 시각이다. 촛불 정국 때와는 달리, 보수와 진보를 떠나 거의 모든 언론이 한 목소리로 외교안보라인 문책론을 폈다.

그럴 만도 한다. 미국산 쇠고기 협상의 후폭풍이 가시기도 전에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이라는 파고(波高)가 밀려오더니 ARF 의장성명 삭제 소동의 한 가운데서 미국 연방기관인 지명(地名)위원회가 독도의 귀속국을 '한국'에서 '주권 미지정지역'으로 변경한 '사고'까지 발생했으니 외교안보팀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게 되었다.

노무현 정부의 외교·안보관을 뜯어고쳐야 할 때 고치지 않아서?

ARF 의장성명 삭제 소동은 명백히 외교 관행에서 벗어난 '망신 외교'다. 그런데도 야당 시절에 노무현 정부의 대일외교에 대해 '등신 외교'라고 조롱했던 한나라당은 '북한 탓'만 한다. 정부가 북한의 '떼쓰기 외교'에 당했다는 것이다. 

또 일부 보수언론은 이명박 대통령의 후보시절 외교안보 정책을 만들었던 핵심참모들이 정부와 청와대에 진입하지 못한 채 외교부 출신 인사들이 외교통상부 장관과 통일부 장관,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등 외교안보라인을 독식하다보니 외교안보 시스템에서 견제와 균형이 작동하지 않은 탓이라는 논리를 편다.

특히 <중앙일보>는 구체적으로 한미 동맹 강화를 핵심 내용으로 하는 'MB독트린'의 산파역을 한 남주홍(경기대)․현인택(고려대)․김우상(연세대)․남성욱(고려대)․김태효(성균관대) 교수 등 '측근 브레인'들이 정부와 청와대의 핵심 포스트에 진출하지 못한 것을 예로 들며 여권의 자성 분위기를 그럴 듯하게 전하기도 했다.

"최근 여권 안팎에선 '노무현 정부의 외교·안보관을 뜯어고쳐야 할 때였던 만큼 이 대통령은 자신의 생각을 잘 아는 측근들을 적재적소에 기용해야 했다'는 후회 섞인 평가가 나온다."

한 마디로 말해, 노무현 정부의 외교·안보관을 뜯어고쳐야 할 때에 이 대통령이 자신의 국정운영 철학을 잘 아는 측근 브레인을 기용하지 않고 직업 외교관들에게만 의존해 빚어진 '인재'(人災)라는 것이다.

ARF 의장성명 소동은 냉전적·퇴행적 외교전략이 낳은 '참사'

지난 2월 27일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 참석했던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
 지난 2월 27일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 참석했던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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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핏 들으면 그럴 듯하다. 그러나 곰곰이 따져보면 이런 진단은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인재론'의 바탕에는 결국 최근의 잇단 외교 난맥상이 '노무현 정부의 외교․안보관을 뜯어고쳐야 할 때에 뜯어고치지 않아서 생긴 참사'라는 인식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잇단 외교 난맥상은 직업 외교관 탓으로만 돌릴 일이 아니다. 또 'MB독트린'을 입안한 교수 출신 측근 브레인들이 직접 외교안보정책을 집행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도 아니다. 오히려 전임 정부의 외교·안보관을 뜯어고쳐야 하는 일이라면 굳이 교수 출신이 아니더라도 '영혼이 없는 공직자들'이 얼마든지 잘 할 수 있다.

오히려 ARF 의장성명 소동은 냉전적 관점의 퇴행적 외교전략이 낳은 '참사'다. 남과 북 사이에 풀어야 할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망 사건'을 국제외교 무대로 끌고 나간 것부터가 잘못된 출발이다. 거기에다가 유엔 등 국제사회가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있는 6·15 공동선언과 10·4 정상선언에 대한 이명박 정부의 부정적 인식이 '외교적 참사'를 빚었다. 그리고 그 '참사'는 청와대가 '개입'해 빚어진 것이다. 결국 이명박 대통령의 문제인 것이다.

이 대통령은 지난 3월26일 통일부 업무보고에서 "남북정상이 새로 합의한 합의문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91년 체결된 남북기본합의서의 정신을 지키는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김정일 위원장이 직접 서명한 10·4선언은 물론 6·15공동선언까지도 무시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이 대통령의 이런 언급은 '잃어버린 10년'이라는 구호의 상징성과 겹쳐 지난 10년간의 남북한 합의도 존중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북한에 보냈고, 그 결과 남북한 관계는 10년 전의 대결과 반목의 관계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현재와 미래의 국정운영은 '북한 탓'과 '노무현 탓'으로 해결 안돼

국제외교 무대에서 10·4 공동선언을 무력화하려는 것은 10·4 공동선언 등을 북한과 논의할 수 있다고 천명한 이 대통령의 국회 개원연설과도 앞뒤가 맞지 않다. '망신 외교' 비난을 감수하면서 이런 무리수를 둔 것은 이 정부가 이전 정부의 남북관계 합의와 업적을 부인하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ARF 성명 소동은 노무현 정부와의 차별화를 국정 우선순위에 놓는 'ABR'(Anything But Rho)이 빚은 참사인 것이다.

가까운 전례가 있다. 집권 이후 'ABC'(Anything But Clinton)로 일관한 부시 미국 대통령의 대북정책이 그것이다. 부시는 클린턴 대통령의 역사적인 북한 방문까지도 검토했던 전 정부의 대북정책을 전면 재검토해 결과적으로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할 수 있는 시간만 주면서 6년을 허송세월 했다.

결국 현재의 외교 난맥상은 외교안보라인을 문책하거나 인적 구성을 바꿔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고 이명박 대통령 자신의 국정운영 철학을 바꿔야 해결될 수 있는 문제다. 그 출발은 '잃어버린 10년'이라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후보 시절 선거전에서는 보수층을 의식해 그런 구호를 외칠 수 있다. 그러나 대통령은 다르다.

현재와 미래의 국정운영은 '북한 탓'과 '노무현 탓' 등 '남 탓'과 '과거 탓'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한나라당의 전신인 신한국당 정권은 김대중 정부에 천문학적인 외채 빚을 떠안겼지만, 김대중 대통령은 재임중 한 번도 김영삼 정부에 책임을 전가하지 않고 묵묵히 외환위기를 극복해 나갔다.

진보신당에서 때마침 30일 안성맞춤인 논평을 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오늘 <경향신문>과의 특별인터뷰에서 '정권을 맡을 때는 전 정권의 권리와 의무를 다 계승하는 것'이라며 '권리는 계승하고 의무는 계승하지 않는다거나 잘한 것도 계승하지 않고 자꾸 문제만 삼는다면 정치는 안정이 없고 경제도 발전이 없다'고 했다.

김 전 대통령의 '혜안'이 돋보이는 말로, 이명박 정부에 줄 수 있는 최대한의 충고라는 생각이 든다. 이명박 정부는 지난 정권의 정책유산 가운데 상속받을 만한 것들은 받아야 한다. 몹쓸 청개구리 심보를 털어버리고 국정에 임하는 일이야말로 이명박 정부도, 국민도 사는 길 아니겠는가."


태그:#ARF, #의장성명, #ABR, #잃어버린 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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