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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 봐도 가슴에는 하나 가득 슬픔뿐이네. 무엇을 할 것인가 둘러보아도 보이는 건 모두가 돌아앉았네. 자 떠나자 동해바다로 삼등 삼등 완행열차 기차를 타고...”

 

누군가가 흥얼흥얼 노래를 부른다. 1970년대 송창식이 불러 유행했던 ‘고래잡이’다. 나이라는 게 어쩔 수 없는 것인가 보다. 노래를 불러도 옛날노래다. 자! 떠나자 동해바다로….  옆자리의 다른 친구가 노래 한 소절을 다시 흥얼거린다.

 

승용차 창문을 열고 바닷가 길을 달리는 피서여행

 

승용차의 속력이 갑자기 느려졌다. 왼편의 소나무 밭 옆으로 난 도로에는 차량들도 많고 사람들도 많았다. 주문진에서 ‘감자옹심이’로 맛있는 점심을 먹은 일행들은 동해 바닷가를 신나게 달려 어느 듯 경포대 솔밭 길에 다다르고 있었다. 경포대는 역시 달랐다. 해수욕장 근처의 도로들이 차량들로 붐비고 있었다.

 

수영복 차림으로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은 모두 젊은이들이었다. 경포대를 그냥 지나쳤다. 젊은 피서객들이 넘쳐나는 곳은 우리들에게 어울리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어쩌면 한창 젊은 그들 사이에 끼어들 자신이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해수욕장과 경포 호수 사이 길을 지나자 도로는 다시 시원하게 열렸다.

 

 

“피서가 별 건가, 이렇게 시원한 바닷가 길을 달리는 것도 멋진 피서 아냐?”

해수욕장을 지나치며 누군가 자위 하듯 말했다. 무더운 날씨였지만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달리는 승용차 안은 답답하지도 않고 시원했다. 양양에서부터 남쪽방향으로 달리는 바닷가 길은 몸도 시원했지만 눈으로 보는 풍경이 더 시원했다.

 

검푸른 물결이 출렁이는 바다는 보이지 않았지만 소나무 숲이 울창한 해변은 송정해수욕장이었다. 송정해수욕장도 그냥 지나쳤다. 저 앞 쪽에 ‘안목항 입구’라는 안내판이 나타났다. 문득 40여 년 전의 짧은 추억 한 토막이 떠올랐다.

 

“저 안목항에 잠깐 들렀다 갈까? 참 예쁘고 아기자기한 포군데….”

 

우리 차가 앞장서 달리고 있어서 아내들이 탄 차도 뒤를 따랐다. 그러나 포구에 들어서면서 추억 속의 모습은 산산이 부서져버리고 말았다. 넓고 높다랗게 막아놓은 방파제, 그리고 아직도 길을 막아 놓고 공사 중인 포구에서는 옛날 추억 속의 풍경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40년 전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내가 위생병으로 첫 발령을 받은 곳이 작전 중인 연대본부가 임시 주둔하고 있던 송정해수욕장 소나무 숲이었다. 아직 이등병인 신병으로 군대생활의 모든 것이 서툴고 두렵던 시절이었다. 발령 받은 지 며칠이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이 지역 고등학교 학생들이 단체 위문을 왔다. 여학생들이었다.

 

40여 년 전의 짧은 추억을 떠올린 안목항

 

그런데 그들 중 한 여학생이 내게 작은 선물과 편지 한통을 쥐어주고 떠났다. 내용은 그 시절 많이 주고받았던 일반 위문편지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러나 군대 초년병으로 처음 받은 위문편지여서 상큼한 느낌에 정말 위로가 되는 편지였다.

 

곧 답장을 보냈다. 그렇게 주고받은 편지가 10여 차례가 넘었을 즈음 작전이 끝나 본래의 부대로 돌아가는 길에 그 여학생을 만난 곳이 바로 안목포구였다. 여학생은 경포대도 오죽헌도 아닌 이 안목포구를 강릉에서 가장 멋진 곳이라며 나를 안내했었다. 아직 추위가 풀리지 않은 초봄이었지만 작은 어항의 모습은 그림처럼 포근하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그 여학생과는 그 후에도 몇 번 더 편지를 주고받았지만 다른 펜팔과 마찬가지로 언제부터인가 중단되었다. 그렇게 잠깐의 추억이 서린 안목항은 그 후 한 번도 들러볼 기회가 없었는데 40여 년이 지난 이번 여름휴가 길에 우연히 들르게 된 것이다.

 

“왜 옛날 젊은 시절에 로맨스라도 있었던 곳 아녀?”

“정말 그랬던 모양이네. 말해 봐요? 늙어가는 나이에…. 괜찮으니까.”

짓궂은 친구가 한 마디 하자 아내까지 거들고 나선다. 그러나 사실 얼굴 붉힐 만큼의 사연이 있었던 것도 아니어서 할 말이 별로 없었다. 겨우 두 번 얼굴을 마주 대했고 한 번의 데이트와 열 몇 통의 편지를 주고받았을 뿐이었으니까.

 

새삼스럽게 가슴 설렐 사연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허허 웃고 다음 코스로 향했다. 강릉 시내를 벗어나 조금 더 달려 안인진 포구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서 잠깐 쉬었다. 정동진으로 가는 길가 언덕 위에는 안보전시관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전시관 안에는 특별히 눈길을 끄는 것이 없었다. 밑으로 내려와 바닷가에 전시되어 있는 퇴역한 구축함과 북한이 내려 보냈다가 암초에 걸려 최후를 맞았던 잠수함을 둘러보았다. 퇴역한 구축함은 미국에서 2차 대전 때 사용하다가 우리 해군이 인수 받아 사용하던 거대한 함정이었다.

 

“북한의 잠수함은 우리 구축함에 비하면 그야말로 장난감 같구먼.”

“본래 구축함이 잠수함 잡는 군함이잖아?‘

모두 오래 전에 군대생활을 했던 일행들이었지만 해군 출신은 아무도 없어서 구축함이나 잠수함은 모두 그저 신기할 뿐이었다. 구축함 함포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비좁은 잠수함 내부를 둘러본 후 다시 길을 나섰다.

 

바닷가 커다란 방 한칸에 5만원, 값싼 숙소를 얻어 횡재하다

 

정동진을 지나 묵호로 가는 길에 이름 없는 작은 해수욕장이 있는 언덕길에서 잠깐 쉬기로 했다. 녹두빈대떡과 음료수로 간식을 들며 쉬고 있을 때 음식을 가져온 아주머니가 오늘 밤 숙소를 정하지 않았으면 자기네 집에서 민박을 하라고 권한다.

 

그런데 방값이 장난이 아니었다. 어둑어둑 꽉 막힌 방 한 칸에 10만원씩이라지 않는가. 아내들은 방이 어둡고 답답하다며 펄쩍 뛴다. 어차피 시간이 조금 이른 편이어서 묵호까지 가기로 했다. 묵호항이 저 앞쪽 멀리 바라다 보일 즈음 작은 횟집마을을 만났다. 묵호 진동 어달리였다.

 

바닷가 바로 옆 도로변에 자리 잡은 건물들은 1층은 횟집들이었고 2층은 민박용 방들로 꾸며져 있었다. 그런데 아래 층 횟집에 문의하니 동쪽 바닷가에 넓은 창문이 있는 커다란 방이 한 개에 5만원이라지 않는가.

 

“이렇게 크고 좋은 방이 5만원씩이라, 방 한 개에 20명이라도 묵을 수 있겠구먼,”

“조금 전에 만났던 방들에 비하면 이건 완전히 횡재구먼 횡재.”

 

정말 그랬다. 한 방에 네 명씩 뒹굴어 다니며 잘 수 있는 전망 좋고 커다란 방이 이만한 값이면 분명히 횡재였다. 이쪽으로 오면서 알아본 해수욕장 부근의 민박도 그랬지만 이곳 어달리에서 가까운 바닷가의 모텔은 이보다 훨씬 적은 방이었지만 15만원을 줘야 묵을 수 있었다.

 

싼 값에 좋은 방을 구한 일행들은 방을 소개해준 횟집에서 저녁을 먹고 바닷가 산책에 나섰다. 진동 어달리 일대는 횟집들이 많은 곳이었다. 바로 옆에 자리 잡은 넓은 주차장을 갖춘 큰 건물은 ‘까막바위 회마을’이었다.

 

까막바위라? 바위 이름이 특이했다. 그런데 궁금증은 쉽게 풀렸다. 방파제 도로 바로 옆에 누구나 금방 “아, 저 바위구나” 하고 알아차릴 수 있는 커다란 바위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바위 빛깔이 까만 것은 아니었다. 까마귀가 바위에 새끼를 쳤다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까막바위 부근에는 바다 안쪽으로 둥그렇게 전망대처럼 만들어 놓은 곳에 커다란 문어상도 세워져 있었다. 까막바위와 문어, 무언가 사연이 있을법한 모습이었다.

 

까막바위와 문어상의 전설

 

“여기 문어상에 대한 설화비가 서있는 걸.”

앞서 걷던 일행이 가리키는 곳에는 문어와 까막바위에 대한 설화를 새겨놓은 비가 세워져 있었다.

 

때는 조선시대, 이 바닷가 마을에는 마음씨 좋은 호장(지금의 이장)이 살고 있었다. 이 호장은 봄철 춘궁기에는 이웃들에게 곡식을 나눠주기도 하고, 지나는 걸인에게도 넉넉하게 인정을 베푸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느 해 왜구들이 두 척의 배를 몰고 들이닥쳤다.

 

왜구들은 재물과 곡식을 빼앗고 부녀자들을 농락했다. 그들은 빼앗은 재물과 호장을 배에 싣고 떠나려했다. 호장과 주민들은 왜구들에게 대항했지만 당할 수가 없었다. 주민들이 희생당하는 모습을 본 호장은 크게 노하여 왜구들을 꾸짖었다.

 

“내 비록 육신은 죽어도 너희들이 다시는 이곳을 침범치 못하게 하리라”고 왜구들에게 소리쳤다. 그러자 맑은 날씨가 갑자기 어두워지며 천둥 번개가 치고 파도가 높게 일어나 호장이 타고 있던 배가 뒤집혀 왜구들과 함께 모두 죽고 말았다.

 

그러자 남은 왜구들은 다른 배 한척을 몰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때 거대한 문어 한 마리가 나타나 왜구들이 탄 배를 내리쳐 배는 산산조각이 나고 왜구들은 모두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그러자 어두웠던 하늘이 맑게 개이고 파도가 잔잔해지며 까마귀 떼가 날아와 왜구들의 시체를 뜯어 먹었다.

 

마을 사람들은 왜선을 내리친 큰 문어가 호장이 죽어 변신한 혼령이라고 생각했다, 그 이후부터 이 마을에는 왜구의 침입이 끊겼고, 까막바위 밑에 있는 두 개의 큰 굴에는 호장의 영혼이 살고 있다하여 해녀들도 가까이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때부터 이곳 주민들은 까막바위와 문어를 수호신으로 떠받들며 매년 풍어제를 지낸다는 것이었다.

 

“이리 좀 와봐! 여기 이곳이 서울 남대문의 정동쪽이라고 써 있네, 조금 이상하잖아? 여기서 북쪽으로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는 정동진이 경복궁 앞 광화문의 정동쪽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말이야.”

 

그런데 동해시에서 세워놓은 까막바위 안내 표지석에는 이곳 까막바위가 서울 남대문의 정동방향에 있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국립지리원이 공인했다는 글까지 새겨져 있었다. 어떻게 된 걸까?

 

“이 표지가 맞을 거야? 정동진은 ‘한양의 광화문에서 정동쪽에 있는 나루터가 있는 마을, 이라는 뜻으로 이름이 지어졌지만, 실제 위도상으로는 서울시 도봉구에 있는 도봉산의 정동쪽에 있는 것으로 밝혀졌거든.”

 

일행 중 한 사람이 정동진보다 이곳 까막바위의 방향표지가 정확하다고 말했다. 남대문에서 북쪽으로 도봉산까지의 거리와 이곳 까막바위에서 북쪽으로 정동진까지의 거리를 어림해보면 비슷할 것 같았다.

 

정동진은 신라 때부터 왕이 사해용왕에게 친히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지난 2000년 국가지정 행사로 밀레니엄 ‘해돋이축전’을 성대하게 치른 전국 제일의 해돋이 명소이긴 하지만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의 정동쪽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까막바위와 문어상의 전설을 이야기 하며 바라보는 동해바다는 어느새 어둠이 찾아들고 있었다. 바다도 검은 빛이요 바위도 새들도 검은 빛이어서 묵호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묵호항이 저 만큼에서 하나 둘 불을 밝히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유포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이승철, #까막바위, #어달리, #문어상, #남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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