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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폰에 입력하지 않은 번호가 떴다. 지역번호가 서울이다. 스팸광고가 자주 오는 통에 그러려니 하면서 받았다. 상대방은 내 이름을 확인했다. 000방송 00을 담당하는 아무개라고 자신을 밝히며 전화를 걸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어떻게 해서 내 전화번호를 알게 되었는지를 절도 있게 말했다. 그러면서 방송프로그램 콘셉트에 우리가족이 맞을 것 같아 식구들을 촬영하고 싶은데 응해줄 수 있겠느냐는 거였다.

 

지난달 중순쯤 우연찮게 지역 방송국 텔레비전에 나갈 일이 있었다. 인터넷에 올린 내 글을 읽고 방송섭외 작가가 연락을 한 것이다. ‘알뜰살림 노하우’에서 짠순이들의 비결을 시청자들한테 보여주는 내용이라고 했다. ‘알뜰살림’이라니, 내가 알뜰하게 살림 하는 특별한 비결도 없는데 무슨 글을 본 것일까 싶었다. 주부로 20년을 살았으니 누구라도 나가면 할 말이 많을 터였다.

 

내가 출연한 생방송 ‘00마당’은 우리 집에 텔레비전이 있을 때 나도 가끔씩 보던 프로그램이다. 전국방송으로 한 시간 정도 내보내는데 일주일에 한번씩 지역방송이 나간단다. 생방송이기 때문에 방송이 나가는 한 시간 전에 미리 가서 어떤 얘기로 내용이 꾸려질 것인지 연습을  했다. 내용은 크게 서너 개로 치솟는 생활물가를 언제 실감하는지, 요즘시대 짠순이로 살아가는 법, 그리고 이 시대 짠순이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지를 토크쇼 형태로 진행되었다.

 

출연자는 30대 초반의 앳된 아기엄마와 40대의 나, 그리고 50대 아주머니 이렇게 세 사람이 모였다. 아기엄마라고 하기엔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듯한 어린 새댁은 분유 값이 얼만지도 잘 모를 정도로 아기에게 모유만 먹인다고 했다. 적절하게 쿠폰을 활용하고 외식은 칼국수 정도로 호사하며 외출도 가급적이면 하지 않는다고 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음식물 쓰레기로 들어가는 것만 줄여도 알뜰살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50대의 아주머니는 아파트부녀회장을 맡고 있어서 마을에서도 여러 가지 자원을 재활용하는데 앞장서는 분이었다.

 

주부들이 모이면 할 말이 많다. 특히나 살림이야기를 하는데서야 어디 막힘이 있겠는가. 한 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우리는 자연스럽게 ‘토크’를 주고받았다. 게다가 방송인으로 나온 엄00씨가 말 중간에 섞어주는 재치와 유머는 재밌는 분위기를 이끌고, 에너지관리공단 대전충남지사에서 나온 분은 에너지를 아낄 수 있는 실제방법이 무엇인지 알려주었다. 그 중에 내가 기억하는 한 가지는 플러그만 제대로 뽑아도 1년에 한달은 공짜로 전기를 쓸 수 있다는 것, 꽂았다 뽑았다 하는 것이 번거로우면 ‘전용멀티 탭’을 사용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방송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꺼놨던 핸드폰을 켜자 문자 몇 개가 와있었다. 그것도 아주 오랜만에 소식을 전하는 지인으로부터였다. 버스를 타고 오면서도 텔레비전에서 나를 봤다는 전화가 왔다.

 

버스에서 내려 장을 볼 겸, 동네 농협지하 매장으로 가고 있었다. 뒤에서 ‘저기요~’ 하고 누군가 나를 불렀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지현이 엄마였다. 뛰어왔는지 숨이 차다.

 

“저기, 오늘 ‘00’에 나오시지 않았어요? 어제 우리 시어머니가 오셨거든요. 어머니는 아침마다 그 프로그램을 꼭 보세요. 근데 우리 지현이가 손가락으로 자꾸 빵, 빵! 하는 거에요. 그래서 봤더니, 어우~ 정말 반가웠어요.”

 

아이가 화면에 나오는 얼굴을 가리키며 ‘빵, 빵...’ 했다니 첨엔 무슨 말인가 했다. 언젠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가 유모차에 앉아있는 아이가 너무 귀여워 빵을 하나 준 적이 있다. 마침 내 장바구니에 빵이 있었는데, 아이는 나를 그렇게 기억했나보다.

 

그 일로 며칠동안 나는 내가 움직이는 곳에서 나를 아는 여러 사람들로부터 잠시 적잖은 시선(?)을 받았다. 텔레비전의 영향을 잠시 실감했던 기회였고 출연료라는 ‘짭짤한’ 맛도 봤다. 우리 집은 텔레비전이 없어서 시청료나 유선방송시청료가 아예 나오지 않는다. 대신에 신문을 뒤적이고 책을 읽는다. 이것만으로도 알뜰살림에 일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암튼, 화면에 내 얼굴이 나오고 나서 이제 잊어버릴 만큼 시간이 지났다. 근데 이번엔 방송국에 내 얼굴만 나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식구와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을 촬영한단다. 하지만 정중하게 거절했다. 큰애는 백일도 안 남은 수능을 준비하는 수험생이고, 작은애는 아직 예민한 사춘기이다. 식구들과 우리 집을 카메라가 훑고 지나간 다음을 생각하면 그 ‘번거로움’을 감당하기엔 아직 때가 아닌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sbs u포터에도 보냅니다.


태그:#방송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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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가면을 줘보게, 그럼 진실을 말하게 될 테니까. 오스카와일드<거짓의 쇠락>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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