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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개 중대 2480명의 전·의경이 KBS를 둘러싸고 철통같은 경계를 폈다. 새벽부터 본관 안에 들어와 진을 친 사복경찰 2백 명의 보호를 받으며 유재천 이사장 등 이사들이 입장하고, 3명의 이사가 퇴장한 가운데 '감사원의 해임요구에 따른 정연주 사장 해임 제청안'은 6대 0으로 가결됐다.

 

공영방송의 이사들이 정권의 스케줄에 따라 불러들인 경찰의 보호를 받으며, 개인비리도 없는 사장의 목을 치는 의식을 완벽하게 치러냈다. 이때 KBS 정문 건너편에서는 보수단체 회원들이 스피커로 군가를 틀어대며 "정연주 퇴진"을 외치고 있었다. 그리고 '정연주 몰아내기 작전'은 이제 대통령이 '해임제청안'을 '받아들임'으로써 대단원의 막을 내려가고 있는 것 같다.

 

청와대·방송통신위원회·감사원·교육부·검찰·국세청·경찰 등 정부기관이 총출동해 각본에 따라 이뤄낸 빈틈 없는 입체 작전이었다. 하여 언론 통제를 위한 인프라 구축작업도 막바지 단계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이명박 정권은 일단 이 땅의 시계 바늘을 정확히 20년 전으로 되돌려 놓는 데 성공했다. 공교롭게도 필자는 꼭 20년 전인 88년 8월 '군사문화 청산'을 외치다 현역 군인들로부터 칼부림 테러를 당했다. 그래서 이 정권의 '역사 되돌리기'와 '군사 문화 부활'에 땅을 친다. 이 나라 언론자유에 대한 테러요, 민주주의에 대한 테러 앞에서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고 울부짖는다.

 

8년 전 KBS 사장 면직권 없앤 건 한나라당

 

애당초 안 되는 일이었다. 될 수 없는 일이었다. 통합방송법에 따르면 KBS 이사회는 사장의 임명을 제청할 수는 있으나 해임을 제청할 권리는 없다. 대통령에게도 KBS 사장을 임명할 수 있으나 면직시킬 수 있는 권리는 어느 구석에도 나타나 있지 않다.

 

2000년 1월까지는 대통령에게 면직의 권한이 있었다. '임면한다'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조항이 '임명한다'로 바뀐 건 다름 아닌 한나라당의 요구 때문이었다. 한나라당 의원들이 공공기관장 임기 보장법을 발의했고 상위법인 그 법의 취지에 따라 하위법인 통합방송법에서 '면한다'는 대목이 빠졌다고 했다. 임기를 보장하기 위해서였다. 애당초 안 되는 일이었다. 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토록 말 잘 듣는 사장을 원했다면 KBS가 '관영방송'이 되도록 조문을 고치고 사장도 대통령이 면직권을 갖도록 법을 개정하는 절차라도 거쳐 시행해야 할 일이었다. 5공 때도 표면상으로는 '공영방송'이었던 것을 드러내놓고 '관영방송'으로 바꾸는 것이 흔한 말로 쪽팔리는 일이었다면, 관영방송 대목은 그만 두고 사장 면직권 부분만이라도 법 개정을 해야 할 일이었다. 한나라당, 의원수 많지 않은가.

 

정연주 사장 해임제청안이 이사회에서 가결되자 청와대는 "공영방송을 바로 잡기위한 절차"라 했고 한나라당은 "사필귀정"이라는 논평을 냈다. 25년간 시청료가 동결된 상태인데도 당기 순이익에서 흑자를 기록하고, 이 나라 모든 언론 매체중 영향력 1위와 신뢰도 1위의 성적을 올렸는데 무엇을 더 바로 잡을 절차가 있고 무엇이 더 올바르게 귀결돼야 하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이 정권 들어서서 '소통'이란 말을 참 많이도 들었다. 인수위 때부터 촛불 시위를 거쳐 공안정국에 들어서서도 이명박 대통령은 물론 정권의 핵심인사들이 어려울 때마다 판에 박듯 '소통' 이야기를 했다. "소통에 문제가 있다"고들 했다. 마치 "소통에 문제가 있다"고 말 만하면 소통이 안된 잘못도 깨끗이 용서받는 것으로 착각하는 듯 했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소통이 안되는 쪽으로만 일을 몰고 갔다. 그것은 올바른 소통의 중요한 수단이 건강한 언론임을 모르기 때문에 벌어지는 참상인 듯 하다. 그 '소통' 자체의 기능을 나쁜 쪽으로 변질시키는 일에 목을 매달고 있기 때문에 하는 이야기다.

 

이명박 정권은 공영방송 KBS의 목에 쇠줄이라도 매달아 두지 않고서는 아무 '소통'도 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 같다. 방송과 인터넷을 장악하는데 정권의 명운을 건 것으로 보인다.

 

조중동에 대한 인터넷 광고 중단에 대한 게시물의 삭제와 네티즌 처벌 방침도 그 같은 절박한 필요성 때문에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밀어붙이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 정부가 금과옥조처럼 내세우는 <미국에서도 그런다>는 대목이 바로 거짓으로 밝혀졌기 때문에 하는 소리다. <오마이뉴스> 보도에 따르면 미국엔 그런 규제나 처벌 규정이 없을 뿐 아니라 지금도 그런 '불매운동'이 일상화돼 있다는 것이다. 공무원인 교사와 경찰까지도 전화나 인터넷을 이용한 보이콧 캠페인을 벌인다고 했다. 그야말로 <미국에서도 안 그런다>는 것이다.

 

안 되는 일을 되게 하기 위해 <미국에서도 그런다>고 거짓말하고, 백골단을 부활시키면서 상품권 내걸고 인간사냥에 나서도록 하는 발상 - 이런 것들이 바로 국민을 졸로 보는 시각이요, 그게 군사문화의 부활이다. 소름끼치는 이야기다.

 

주목해야할 대목은 이런 일들을 옳고 그름 따지지 않고 거의 '죽기 살기' 수준으로 '방조'하는 보수 언론들의 행태다. 미국의 FCC(한국의 방송통신위원회에 해당한다)가 신문·방송 겸영을 허용키로 결정했을 때 보수 신문들은 <미국에서도 그런다>고 대설 특필했다. 자기들이 미국에서처럼 그렇게 겸영을 허용 받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그 결정이 의회에서 거부됐을 때 거부됐다거나 무산됐다거나 하는 기사를 단 한 줄도 쓰지 않았다. 그런 상태에서 보수신문들은 지금도 방송통신위원회의 '겸영 허용'을 목 타게 기다리며 이 정권의 하는 일 돕는데 열과 성을 다하고 있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불가능한 일을 가능토록 하는 것은 인간이 그려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작품일 수 있다. 그러나 애당초 그렇게 돼서는 안 될 일을 되도록 밀어붙이는 것은 그야말로 '안 될 일'이다. 언론 자유야말로 그런 수법으로 훼손해서는 절대 안 된다. 탈이 나게 돼있다.

 

이명박 정권이 이번에 시계바늘을 20년 전으로 되돌리는데 성공했을지라도 그것은 또 다른 불행의 시작이 될지도 모른다. 그 점을 냉철히 깨달아야 한다.

 

언론 자유라는 이름의 불씨는 결코 완전히 꺼지지 않는다. 인간의 속가슴 깊숙이 본능으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덧붙이는 글 | 오홍근 기자는 국민의정부 당시 청와대 공보수석을 지냈으며, 20년 전 월간지에 기고한 '청산해야 할 군사 문화'라는 칼럼 때문에 정보사로부터 테러를 당했다.


태그:#정연주, #군사문화, #보수언론, #언론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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