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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늘로 포옥 찔러도 피 한 방울, 아야~ 소리조차 날 것 같지 않게 잠잠하기만 한 한국시단에 여성시인들이 잇따라 시집을 펴내며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하지만 그 돌개바람이 낳으려는 세상은 아프고, 답답하고, 꽉 막힌 채 퉁퉁 부어 있다. 난산 중의 난산이다. 여기에 그 힘겨운 산고 끝에 낳은 이 세상이 또 기형아라니.

 

여성시인들의 맹렬한 창작활동에 박수를 치지는 못할망정 거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구? 이들 여성시인들이 쓴 시가 난산을 거듭한 끝에 낳은 기형아가 아니라 이들이 시 속에 담아내고 있는 이 세상이 기형아라는 뜻이다. 그래서일까. 이들 여성시인들이 이 세상을 자판기 삼아 열심히 두드려 낸 시도 온통 상처투성이처럼 보인다.

 

왜일까. 그렇잖아도 침체를 거듭하고 있는 한국시단에 새로운 샛별로 떠오르고 있는 이들 여성시인들이 바라보는 이 세상은 왜 그토록 숨이 턱턱 막히는가. 고유가, 고물가에 지쳐 나자빠진 우리네 삶을 송두리째 익혀버릴 것처럼 푹푹 찌는 무더위 때문일까. 아니면 이들 여성시인들이 살아온 삶이 '보릿고개' 넘는 것처럼 너무 힘겨웠던 것일까.

 

조명 시인이 펴낸 첫 시집 <여왕코끼리의 힘>과 시인 정원숙이 펴낸 첫 시집 <바람의 서>, 시인 박미라가 펴낸 세 번째 시집 <안개부족>을 읽고 있으면 갑자기 마음이 쓸쓸해진다. 물에 빠져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듯 안간힘을 다하고 있는 한국시단을 이들 여성시인들이 새로운 '시의 시대'로 이끌어주기를 바랐던 꿈이 너무 컸던 탓일까.

 

이 세상은 난산 끝에 낳은 기형아

 

세상과 질과 태아가 동시에 악을 쓰는데도,

문이 열리다 닫히고 열리다 멈추는 바람에, 우불두불,

외계인처럼 일그러진 두상은 기형,

 

탯줄 끊기자마자,

안에서도 밖에서도 외면당하는 이런 탄생,

도처에 있다. -15쪽, '난산' 몇 토막  

    

2003년 계간 <시평>에 '여왕코끼리의 힘' 등 5편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한 시인 조명이 지난 2월 허리춤께 펴낸 첫 시집 <여왕코끼리의 꿈>(민음사). 이 시집에 실려 있는 시 '난산'을 읽으면 이 세상살이 모두가 힘겨운 난산처럼 여겨진다. 그 힘겨운 난산 끝에 태어난 아이가 기형아인 것도 모진 이 세상살이가 남긴 불행한 유산이다.

 

시 곳곳에 들어있는 쉼표, 굳이 쉼표를 붙이지 않아도 될 자리에 어김없이 쉼표가 붙어 있는 것도 난산 땜에 틈틈이 산모가 내쉬는 가쁜 숨소리처럼 여겨진다. 대전 유성에서 태어난 시인 조명은 시 '난산'에서 첫 행부터 끝 행까지 줄기차게 쉼표를 찍다가 아기가 태어나 탯줄을 끊고 난 뒤에 마침내 마침표를 한 개 찍는다.

 

그래서일까. 이 난산 같은 시를 읽고 있으면 숨이 몹시 가쁘다. 가쁜 숨을 겨우 고르고 나면 거기 이 세상 모든 것이 담긴 자화상 같은 기형아가 마음을 또 슬프게 한다. 그렇다고 조 시인이 기형아 같은 이 세상살이 땜에 슬픈 한숨만 폭폭 내쉬며 자포자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시집의 표제가 된 '여왕코끼리의 힘'을 읽으면 조 시인이 기형아 같은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 들어 있다. 시인은 초원의 왕이라는 사자무리가 어려워하는, 그 때문에 초식동물(백성)을 보호하는 코끼리를 통해 절대 권력과 당당하게 맞선다. 여기서 여왕코끼리는 다름 아닌 시인 자신이다. 

 

보아라, 나는 선출된 여왕이므로 곧 법이다

가장 강한 그대는 우리들의 길잡이, 나의 남편이 되어라

선두에 서서 몸 바치는 백척간두의 생

최고의 건초와 여왕의 믿음을 받으라

 

행여, 그대가 독불장군의 힘을 믿게 된다면

나는 뭉쳐진 무리의 힘을 사용할 것이다

짓밟힌 만신창이로 추방될 것임을 미리 알라 -22쪽, '여왕코끼리의 힘' 몇 토막   

 

'22년 전 늦여름, 두 달 뒤의 죽음을 예고하며 내게 시 한 편을 유품으로 주신, 마치 희랍인 조르바 같았던 아버지께 첫 시집을 바친다'고 말하는 조명 시인. 조 시인이 펴낸 첫 시집을 읽고 읽으면 가난하고 짓눌리는 자가 어쩔 수 없이 겪어야 슬픔과 고통, 그 슬픔과 고통을 이겨내기 위한 키는 생명 사랑과 생명 존중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신경림 시인은 "여왕코끼리의 막강한 힘이 평화와 행복을 위한 것이듯, 조명의 활기도 긍정적이고 개방적이다"라고 말한다. 신경림은 이어 "굴절되어 있지 않은 페미니즘, 생명에 대한 무한한 경외와 존중이 그 활기의 원천"이라며 "조명은 동시대의 다른 시인이 가지고 있지 못한 정서와 가락을 지닌 시인"이라고 덧붙였다.  

 

태어남이 곧 죽음이었다

 

2004년 <현대시>에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한 정원숙 시인이 지난 5월 끝자락 첫 시집 <바람의 서>(천년의 시작)를 펴냈다. 글쓴이가 이 시집을 받은 것은 지난 7월 초순쯤. 하지만 글쓴이는 이 시집을 제대로 읽어보지 못하고 있다가 8월 중순이 되어서야 책장 속에 갇혀 있는 이 시집을 꺼내들었다.

 

첫 시집은 어느 시인에게나 설렘과 불안을 한꺼번에 선물하는 법. 시집 간 처녀가 첫 날 밤을 맞이하듯이 첫 시집을 내놓은 시인은 가슴이 떨린다. 한국시단에서는 이 시집을 어떻게 평가할까. 언론에서는 이 시집을 어떻게 다루어줄까. 행여 기사 한 줄 제대로 나지 못하고 그대로 묻혀버리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 말이다.

 

까닭에 글쓴이는 첫 시집을 받으면 반드시 꼼꼼하게 읽고 나름대로 느낀 생각을 기사 혹은 서평으로 정리하는 습관이 붙었다. 그것이 시단에 한 발 먼저 발 디딘 선배로서 후배에게 베푸는 작은 정 따위가 아니겠는가. 또한 그렇게 해야 숱하게 떠오르는 신예시인들이 곱씹고 있는 시세계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지 않겠는가. 

 

어머니 바람에게 뼈마디를 세 내준 어머니

왜 그땐 외면했을까요

우주까지 확장되던 나의 공상과 치유할 수 없을 것 같던

죄의식 결핵균처럼 번져나가던 가난이라는 종양을

 

종일 연탄재가 날리던 수색

나는 재속에 죄를 묻었고

내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누군가 끊임없이 들춰내던 죄의 리스트

 

-85~86쪽, '바람의 서-새벽 비탈에게' 몇 토막

 

충남 금산에서 태어난 시인 정원숙이 펴낸 첫 시집 <바람의서>에 실린 시는 너무 아프다. '바람의 서'에 나오는 '핏기 잃은 바람'이라거나 '무릎 깨진 바람' '밀입국자처럼 떠도는 바람' '검게 물들이는 폭풍' '10년 전 자살한 대모' '어느 별의 지옥' 등 시어 자체가 내뿜는 빛깔이 너무 슬프고 너무 어둡다.  

 

정 시인이 쓰는 시어가 온통 죽어가는 빛을 띠고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이는 정 시인이 태어나는 모습을 그린 'I was bom'이란 시에 잘 드러나 있다. 시인은 아마도 비정상적으로 태어났던 것 같다. '천둥 번개 치던 밤', '스스로 탯줄을 끊고 죽은 나무 밑에 그 탯줄을 심던' '천둥은 나의 심장, 번개는 나의 항문' '구멍들을 찢고 터져 나오던 각혈' 등에서 출생에 따른 비밀을 엿볼 수 있다.

 

'태어남이 곧 죽음이던 그 밤'을 이겨낸 시인의 삶에 대한 지독한 집착. 그 집착은 '손가락 발가락은 온전하잖아요'로 표현된다. 시인에게 있어서 죽음이 곧 삶이며 삶이 곧 죽음이다. 따라서 시인이 바라보는 세상은 '공 空', 텅 빔이다. 시인은 그 텅 빔 속에 이 세상과 자신을 가두며 이 세상과 자신의 뿌리를 차분하게, 혹은 좌충우돌로 더듬는다.         

 

다락방 미싱 앞에 쪼그려 앉은 어머니

너덜너덜해진 자궁을 깁네

미싱은 비명도 없이 돌아가고

미싱이 돌 때마다

남동생이 태어나고

여동생이 태어나고

다락방은 어머니의 나라 -80쪽 '직녀의 나라' 몇 토막

 

시어가 톡톡 튄다. 하지만 왠지 쓸쓸하고 슬프다. 이번 시집을 읽고 있으면 아픈 기억 하나가 일생을 얼마나 쥐어짤 수 있는지 다시 한번 되짚게 만든다. 문학평론가 이승훈(시인)은 "정원숙은 탄생이 죽음이다. 이 죽음의 청춘은 울음을 삼키는 목조계단, 종일 연탄재 날리던 수색을 매개로 집시를 꿈꾸고 오르페우스를 꿈꾼다"고 평했다.

 

안개 속에서 손때 묻은 햇살 한 줌 줍는다

 

"여기까지 끌고 왔다 / 변변한 목줄도 없이 밀고 당겼다 // 주저앉고, 넘어지고, 날뛰어서, / 나는 어금니 부서지고 너는 살점 흩어졌다 // 길눈 어둔 나로 하여 / 비루 먹은 시여 // 이제 네가 나를 끌고 가라 // 기꺼이 떠돌겠다" -'시인의 말' 모두

 

1996년 <대전일보> 신춘문예로 작품활동을 시작한 시인 박미라가 시집 <안개부족>(예지)을 펴냈다. 첫 시집 <서 있는 바람을 만나고 싶다>, 두 번째 시집 <붉은 편지가 도착했다>에 이어 세 번째 시집이다. 이번 시집에는 '거미가 다녀갔다' '억새꽃 내 언니' '상처의 배후를 기록하다' '부레옥잠 그 여자' 등 4부에 모두 51편의 시가 실려 있다.

 

시인 박미라가 펴낸 이번 시집은 흘러간 날들에 대한 기억이다. 시인은 그 기억을 통해 백악기로 가서 역사가 남긴 씨알 같은 시를 줍기도 하고, 이미 이 세상을 등진 아버지와 병든 노모를 만나 세월이 남겨둔 수틀에 시를 갈고 또 간다. 이 오래 묵고 낡은 것에 대한 시인의 끝없는 사랑은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다름 아닌 어머니다. 시인은 백내장을 앓고 있는 늙은 어머니, 그 흐릿한 눈을 통해 어머니가 힘겹게 살아낸 삶을 차분히 되짚는다. 어머니가 살아낸 삶 속에 아픈 세월이 탱자가시처럼 찔려 있고, 이 땅에서 살아왔고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수군거리고 있다. 아버지와 억새꽃 내 언니, 부레옥잠 그 여자도 그 속에 들어 있다.  

 

백내장을 앓는 어머니 모시고 병원에 간다

 

그녀는 오래전부터 안개의 부족이었다

눈동자에 찍힌 안개의 문장 아니어도 증거는 있다

새벽부터 밤중까지 쉬지 않고 돌아다니지만

발자국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안개 위를 떠다니는 것이 틀림없다

마른 논바닥처럼 먼지 풀썩이는 상심 따위도

그녀에게 기대면 금방 촉촉하게 젖어든다 -114쪽 '안개부족' 몇 토막

   

시인 박미라는 백내장을 앓는 어머니를 통해 이 세상을 가리고 있는 안개, 그 안개를 걷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 안개가 더욱 짙게 끼어 이 세상 모든 모서리를 지우길 기도한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안개 속에 지워지고 나면 그 자리에서 어머니가 "손때 묻은 햇살 한 줌 수줍게 꺼내" 보일 것이라 믿고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새벽부터 밤중까지 마구 돌아다니지만 신기하게도 발자국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도 기억 속에 스물스물 피어오르는 안개가 지금 있는 모든 것을 지워버렸기 때문이다. "마른 논바닥처럼 먼지 풀썩이는 상심 따위도 / 그녀에게 기대면 금방 촉촉하게 젖어든다"는 것도 백내장으로 모든 것이 흐릿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박미라 시에서는 한 기억이 또 다른 그리움을 낳는다. 한 그리움이 한 기억이 되고, 한 기억이 또 하나의 그리움이 된다는 그 말이다. 따라서 시인이 나아가고자 하는 길은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과거에 있다. 시인은 현재와 과거를 통해 우리 사회의 총체적인 모순과 그 모순 속에서 싹트는 새로운 희망을 줍는다.

 

죽음의 순간에는

한 생애가 영화 필름처럼 지나간다는데

시금치를 삶아 보니 알겠다

물감 통을 툭 친 듯 속절없이 엎어지는 한 생애 -60쪽 '내 눈 속의 찌르레기' 몇 토막

 

문학평론가 이은봉(시인)은 "시인은 지난 시간을 기억하는 자"라고 말한다. 이은봉은 "박미라의 이번 시집도 확연히 과거의 기억을 향하고 있다. 그녀의 시 곳곳에는 천년 세월의 흔적이 아로새겨져 있다"며 "오래 되고 낡은 것들을 향한 각별한 애정의 시선이야말로 박미라 시에서 눈여겨 볼 대목"이라고 덧붙였다.

 

한국시단은 지금 목이 꽤 마르다. 불볕더위를 칙칙 식혀주는 한 줄기 소나기 같은 시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특히 여성시인들의 앙증맞고도 귀여운 반란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때다. 아무쪼록 이들 여성시인들이 펴낸 신작시집이 갈증에 시달리는 한국시단에 시원한 샘물이 될 수 있도록 등을 토닥토박 두드려주어야 할 때가 아니겠는가.


바람의 서(書)

정원숙 지음, 천년의시작(2008)


태그:#시인 조명, #시인 정원숙, #시인 박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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