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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서 마지막 날이 밝았다. 오늘 밤에 델리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기에 오늘은 부담 없이 보내자고 합의가 이뤄졌다. 짧은 인도여행에서 좌충우돌하고 발발 거리며 돌아다녔으니 마지막 날은 마무리하는 의미로 여유롭게 보냈다.

 

짐을 6시쯤 빼는 걸로 숙박료을 치르고 공항가는 택시를 예약했다. 공항까지는 꽤 멀어 오토릭샤로 가면 오래 걸리기 때문이다. 더구나 릭샤로 가면 못 도착할지도 모른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밖으로 나와 라시 청년에게 간다. 라시 청년은 어제 밤에 들렀을 때 보니까 그렇게 돈을 잘 벌면서 가게 앞 손수레에서 자고 있었다. 그 붉은 옷을 벗은 채. 바나나 라시를 먹고 장이 작별의 의미로 자신이 여행 때 입었던 나이키 티를 선물로 주었다. 그 청년 동생이 수줍어하며 받았다. 잘 지내라는 인사를 나눴다.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으니.

 

 

코넛 플레이스로 가서 장이 살 기념품을 골랐다. 장은 부모님과 여동생 선물을 골랐다. 친환경 의류점 팝인디아로 가서 어머니 스카프와 여동생 티를 샀다. 내 예리한 안목으로 옷을 골라줬으나 훗날 듣기로 장의 여동생은 처음에 옷을 반가워했으나 한 번도 입고 나가지는 않았다고 한다.

 

팝인디아를 나와 장의 아버지 선물을 사러 갔다. 장은 샌달을 사주고 싶어해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코넛플레이스 지하상가가 널리 발달해서 이것저것 둘러보고 있었다. 순간 어느 상점에서 장은 구석에 걸려 있는, 먼지가 수북이 쌓여 있는 샌달에 마음이 꽂혔다.

 

하지만 장의 지갑에는 이미 돈이 다 떨어져 있었다. 인도 소녀 ‘부자’에게 2000루피나 주는 장인데 이 샌달 못 사주겠나 싶어, 갚겠다는 말을 모른 척하고 아버지께 내가 선물하는 거라 생각하라고 하고 샌달을 샀다.

 

여유롭게 옷가게를 둘러보다가 어느 인도인이 다가와 귀를 파주겠다고 한다. 호기심에 해봤다. 그동안 여행 탓인지 장의 귀에서는 자갈 같은 귀지들이 캐졌다. 날 파주는 분은 조금 성의가 없는지 내가 깨끗한지 별로 안 나왔다. 귀를 파는 게 귀 건강에 좋지 않은지라 별로 내키지 않았었다. 귀파주는 그들의 차림새를 보니 무슬림이란 걸 알고 “나마스테” 대신에 “앗 살라 알라이 쿰”이라고 말을 건넸더니 무척 좋아한다. 역시 말을 어떻게 하는지 중요하다. 

 

한국에서도 외모가 다른 외국인이 서투르게 “안녕하세요”라고 말하면 갑자기 친근감이 솟아오른다. 마찬가지로 외국 나갔을 때 그 나라 말을 쓰면 친화력이 생기고 호감도 올라간다. 여행하면서 얕게 배운 힌두어를 쓰고 다녔는데 어느 인도인은 힌두어를 쓰는 외국인을 처음 본다며 아주 반가워했다.

 

얼마 되지 않는 기본 회화를 익히면 말했을 때 소통하는 재미도 있고 상대도 좋아하고 꿩 먹고 알 먹기다. 인도가 영어를 제2외국어로 쓴다고 하지만 교육혜택을 받지 못해 영어를 모르는 인도인도 많기 때문에 힌두어를 조금 공부하고 갈 필요가 있다. 상대 문화에 대한 배려와 존중이라는 측면에서도.

 

그 동안 인도음식만 먹어서 점심은 중국요리를 먹었다. ‘상하이 프레스’라고 새로 생긴 요리 집에 들어가서 먹는데, 아주 맛있는 거다. ‘상하이 스페셜’이라고 채소들을 동그랗게 말아서 위에 튀김옷을 입혀 튀긴 다음 매콤한 양념으로 버무린 요리는 기가 막혔다. 처음에는 2가지를 주문했다가 먹으면서 2가지 요리를 더 시켜먹었다. 그런데 맛있는 값을 한다고 부가가치세에다 봉사세까지 붙어서 가격이 부쩍 올라갔다. 장에 이어 내 지갑도 텅 비었다.

 

남은 오후 시간은 영화를 볼까하고 영화관을 갔으나 힌두어로만 된 영화관밖에 없다고 해서 코넛플레이스 중앙 공원에 앉아서 쉬었다. 새들을 보고 바람을 느끼고 하늘을 보며. 그러다 델리에 있는 지하철을 타고 싶어 역으로 내려갔다. 어디 목적지가 없기에 날씨가 더워 강 근처의 역을 목표로 잡고 지하철을 탔다.  

 

내려서 보니 수많은 학생들이 지나다녔다. 우연하게도 델리대학이 근처에 있는 역이었다. 역 근처 나무 가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 구경을 하였다. 혹시 한국사람 만나면 인도와 힌두교에 대해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려 했으나 정작 한국인 비슷한 사람들이 지나갔을 때 말을 건네지는 못했다. 그냥 구걸하는 인도아이들에게 물을 주고 행인들을 바라보았다. 티베트 스님도 있고 유럽인들도 있고 중동 아시아인들도 보이고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하늘은 파랬다.

 

숙소로 돌아와 쉬었다. 장은 인도 여행을 하면서 인도에 판매하는 담배란 담배를 다 폈다. 담배를 태우지 않았던 그지만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인도에서는 오지게 담배를 물어대었다. 가끔 옆에서 나도 한두 대 태웠다. 담배를 핀다고 시름이 날아가는 건 아니지만 담배연기를 바라보면 ‘나, 외롭구나’라는 감정을 느낄 수 있다. 그 고독감에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는 것도 나름대로 실존감이라 여길 수 있어 흡연을 막지는 않는다. 나도 그만큼 외롭기에 담배 피는 사람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으니.  

 

숙소 입구에서 택시 오기를 기다리며 서 있는데 인도인 두 친구가 오더니 유창한 일본말로 말을 걸기 시작한다. “함 자빠니 네이헤, 코리아헤(나는 일본인이 아니에요. 한국인이에요)”라고 하자 이번엔 한국말로 말을 건다. 여행객들에게 쓸 만한 한국말과 일본말만 외워서 사용하는 것이었다. 몇 단어는 일본말로 서로 농을 치다가 인사를 나눈 뒤 택시를 타고 출발했다. 

 

서울의 휘랑찬란한 밤과 다른 델리의 캄캄한 밤을 지나며 이 여행도 이 어둠과 함께 막을 내리고 있는 걸 느꼈다. 그러나 인도의 열기가 내 가슴을 덥혀놔서 둥둥 거리는 북 소리 따라 곧 다시 배낭을 멜 거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공항에 도착했으나 비행출발시간 3시간 전에 입장할 수 있다기에 rest room에서 쉬려고 했으나 입장료를 내야 한다기에 그 앞에서 쉬었다. 참, 마지막까지 쉽지 않았다. 밤 깊은 시간, 꾸벅꾸벅 졸면서 출발을 했다.

 

델리를 떠나는 비행기에서 여러 기억들이 떠올랐다. 맛있는 라시, 소와 사람들이 엉켜서 자는 거리, 타즈 마할 근처의 한국말 간판들, 푸쉬카르의 호수와 영특한 부자, 델리대학의 위렌드라와 매캐한 델리 시내, 이 모든 걸 뒤로 하고 한국으로 출발했다.

  

인도는 아주 큰 나라이기에 간만 본 정도의 여행이었다. 따로 레와 스리나가르 지역, 꼴까타부터 네팔에 이르는 지역, 인도남부지역 이렇게 3번은 더 와야 인도를 제대로 알 거 같다. 내 눈으로 보면 문제가 너무 많은 곳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문제가 없는 곳이기도 했다. 중요한 건 마음이기에. 노 프라블럼을 외치며 씨익 웃어본다. 아직 비자는 많이 남아 있고 내 발바닥은 튼튼하기에 다시 인도로 떠나고픈 마음을 잠시 달래며 눈을 감았다.


태그:#인도여행, #델리대학, #인도지하철, #라시, #현지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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