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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문화원에서 한학강좌를 하고 있는 전용국옹.
 예산문화원에서 한학강좌를 하고 있는 전용국옹.
ⓒ 장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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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시대라고 한다. 인터넷의 발달로 나라간의 경계가 허물어졌다고 한다. 영어를 잘해야 경쟁력 있는 인간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정말 그뿐이면 되는가. 이렇게 앞뒤 안 보고 달리다가 어느날 문득 '가만 , 나는 어디에서 왔고, 지금 어디에 있는 거지? 우리 사회는?'이라는 질문에 마주서면 어디서 그 답을 얻을 것인가.

어떤 독자로부터 제보가 왔다. 무슨 고발거리가 아니라 한학의 경지가 높지만 초야에 묻혀 사는 학자 한 분을 소개하라는 얘기였다. 아주 오래된 고문서, 그것도 초서체 같은 흘림 글씨로 써서 어지간한 사람은 독해할 엄두도 안나는 것도 그 어른에게 보이면 된다면서.

강의 듣듯 이어진 두 시간 인터뷰

전 덕산향교 전교이며 현재 예산문화원 부원장인 전용국(73)옹을 만나기 위해 충남 예산군 고덕면 호음리를 찾았을 때 집은 비어 있었다. 집주인을 찾아 집 안팎을 분주히 돌아다니는 기자를 보았는지 집 앞 텃밭에서 고추를 따고 있던 전옹의 모습이 나타났다. 전옹은 천천히 걸어 마당으로 들어가더니, 샘에서 천천히 손을 씻고, 천천히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어진 2시간여 동안의 인터뷰. 마치 강의를 듣는 듯했다.

전옹은 어떤 사실을 얘기할 때 늘 고서(古書)에 나오는 글귀를 인용한다. 한문에 어두운 세대들이 듣기에는 낯설지만 가만히 귀를 기울이다 보면 앞뒤가 딱 들어맞는 매우 논리적인 이야기다.

한학자 전용국옹의 집 대문 안쪽 풍경.
 한학자 전용국옹의 집 대문 안쪽 풍경.
ⓒ 장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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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들면 이런 식이다.

"한학을 처음 입문할 때 천자문을 뗀 뒤 명심보감을 배우는거냐"는 단순한 질문에도 "명심보감은 고려 때 학문계열과 무관하게 좋은 말을 뽑아 추적이 편찬한 책이다. 그러나 조선조 때는 주자학이 성해 정식 교과서로 쓰이지는 않았다. 지금에 와서 '명심보감에 보면…' 이라고 인용되는 이유는 그 안에 살며 알아야 할 좋은 말이 많기 때문이다"고 유래와 역사가 늘 함께 따른다.

평생을 공부하고 아직도 손에서 책을 놓치 않아서일까. 전옹의 기억력은 놀라웠다. 도대체 그 많은 한자들을 어떻게 익히고 어려운 고서들은 얼마나 공부해야 줄줄 읽고 이해할 수 있는 걸까.

"한자를 다 알 수는 없지. 한자를 많이 안다고 한학을 하지는 못해. 흔히 '문리를 깨친다'고 하는데, 사람에 따라 이 경지에 다다르는 시기가 달라. 어디까지 공부해야 문리를 터득한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이 단계에 오면 굳이 선생님이 없어도 스스로 공부할 수 있게 되는 거지."

그리고는 "글자 해석이 중요한 게 아니라 뜻을 알아야 하기 때문에 글씨는 몰라도 읽어 보면 무슨 얘긴지 안다"고 덧붙인다. 대체 무슨 얘기인지 아리송할 뿐, 문리를 깨치기는커녕 천자문 중에 아는 글자를 손으로 꼽아야 할 정도인 한글세대에게는 옛이야기를 듣는 것만 같다.

형편 안되니 가학을 이어라

전옹은 충남 홍성군 구항면 내현리에서 태어났고 해방되던 해 지금의 고덕면 호음리로 이사해 뿌리를 내렸다. 대대로 양반 집안으로 벼슬이 끊기지 않았지만 일제를 거치면서 가세가 기울자 선친께서 "형편이 좋지 않으니 장남인 너는 가학(家學)인 한학을 하고, 아우는 신학문을 시키라"고 명하셨다. 그렇게 서당에 다니며 한학을 익힌 것이 오늘에 이르렀다.

놀라운 사실은 그가 선생님을 모시고 배운 기간은 4년 반 뿐이라는 것이다. 전옹은 말 그대로 주경야독을 하며 문리를 터득하기에 이른다. 전옹은 힘도 들이지 않고 "본래 공부는 평생하는 것이고, 스스로 하는 것이다. 독학을 하다가 선생님을 찾아 학문논의를 하면서 정진하면 된다"고 말한다.

공부란 게 뭐 그리 재미있다고 수십 년 세월을 혼자서 한단 말인가. 또 농사를 지으며 남는 시간에 공부하는데 어찌 지치지 않고 꾸준할 수 있다는 얘기인가.

"삼여지공(三餘之功)이라고 했다. 즉 4계절 중에 겨울이 남는 시간이고, 하루 24시간 중에 밤이 남는 시간이며, 비가 오는 날이 또 남는 시간이니 그 시간에만 공부해도 면무식은 한다는 얘기다. 공부는 게을러서 못하는 것이지 시간이 없어서 못하지는 않는다. 또 공부는 죽기 전까지 항상 해야 한다. 지금도 돋보기를 쓰고 책을 들여다 보면 오래 보기 어려워 그렇지 다른 문제는 없다."

요근래 읽은 책은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김구 선생의 글도 한학을 알아야 더 이해가 된다고 한다)>와 박근혜씨의 <평범한 집안에 태어났더라면>이라고 한다. 박근혜씨 대통령 출마 얘기가 나오면서 자연스럽게 남존여비 사상으로 이야기가 옮겨갔다.

"유학에서는 남과 여를 차별하지 않아. 오히려 서양에서는 결혼하면 남편 성을 따라 가지만 우리나라는 누구의 딸, 손녀로 대대손손 내려가잖아. 남녀차별은 본래 유학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만들어진 것이야."

전옹의 일갈이다.

선비정신 사라져 세상 혼탁

전옹은 선비정신에 대해 강조한다.

"맹자에 보면 '행일불의(行一不義) 하며, 살일불고(殺一不辜) 이득천하(而得天下) 개불위야(皆不爲也)'라고 했다. 단 한가지라도 의롭지 못한 일을 저지르고 한 사람이라도 죄 없는 사람을 죽여서 천하를 얻는 일은 다들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무릇 선비란 이득을 볼 때 옳은가 옳지 않은가를 반드시 따져보고 옳지 않은 이득은 취하지 않아야 한다. 그것을 지키지 않기 때문에 온갖 비리가 생기고 세상이 어수선해지는 것이다."

박학심문(博學審問), 즉 널리 배우고 신중하게 생각하고 분명히 판단해서 독실하게 실천해야 하는데 덜 된 사람들이 혹세무민하고 있는 것이 문제라는 한탄도 이어진다. 그리고는 한학의 역사를 죽 꿴다. 주자학이 나오고 노·장자학이 나온다. 학창 시절 단지 제목을 외우기만 했을 뿐 그 실체를 알 수 없는 고서들.

한자성어들을 한글로 받아적으려니 팔이 떨어질 듯한데 이제 본격적으로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논쟁사가 등장한다. 설상가상이다. 어쨌든 결론은 이렇다.

"현대학문은 기술학과 과학뿐이다. 어떤 학문이든 명심(銘心)을 안하고 기술적으로만 배우니 돈만 알고 돈만 벌어먹으려 한다."

요즘 학교교육에서 외치는 '인성교육과 학력신장을 모두 이루겠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무엇을 우선 해야 하는 것인지 생각케 하는 대목이다.

'본래'로 시작하는 이야기

그러고 보니 전옹의 호를 들어본 적이 없다.

"스승님께서 주신 호가 죽당(竹堂)이다. 요즘은 글씨를 쓰기 시작하면 누구나 호를 받던데 본래 호라는 것은 율 한장, 즉 시를 한수 할 줄 알아야 하고, 장택과 혼택(장사지내는 날과 혼인하는 날을 정함)을 할 줄 알아야 하며, 자기 문집을 낼 정도가 되면 스승이 주는 것이다."

전옹의 말은 '본래'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세상살이가 원칙에서 많이 벗어나 있기에, 본래의 이치를 알기에 자연스럽게 쓰게된 말이리라. 그런데도 고리타분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흐트러지지 않은 자세로 낮고 차분하게 '앞은 이렇고, 뒤는 이러니, 이래야 한다'고 강조하는 이야기를 듣노라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전옹은 현재 예산문화원에서 한학 강좌를 하면서 집으로 찾아오는 제자 두어 명을 가르치고 있다. 또 예산지역에서 알음알음으로 찾아와 송덕비문을 써달라, 고문서를 해석해 달라, 전통의식 절차를 가르쳐 달라, 택일을 해달라고 요구하면 선뜻 응한다. 그리고 삶의 지표를 잃고 헤메는 이들에게도 좋은 길잡이가 돼 준다.

그런데 지금이야 예산군 끄트머리, 당진군계에 위치한 전옹의 집으로 가면 된다지만, 훗날 누가 그를 대신해 '본래'이치를 가르쳐 줄 것인가. 이 어르신의 몸에 밴 학식과 정신을 어떻게 기록하고 보존해야 할지 그것 또한 우리의 숙제다.

문화원 한학강좌 풍경

편안한 얼굴 나즈막한 목소리로 한학강의를 하고 있는 전용국옹
 편안한 얼굴 나즈막한 목소리로 한학강의를 하고 있는 전용국옹
ⓒ 장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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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가 끝나고 오후 시간, 예산문화원에서 열리는 한학강좌에 쫓아가 사진을 찍었다. 수강생들보다 일찍 도착한 전옹이 칠판 가득 판서해 놓은 글귀들의 내용을 알 길은 없다.

다만 편안한 얼굴, 낮은 목소리로 열강하는 노학자와 행여 스승의 한마디라도 놓칠까 열중하는 예닐곱 명의 수강생들이 만들어내는 '공부시간' 풍경이 매우 여유롭다는 것만 느낄 뿐이다. 무릇 공부는 이렇게 하는 것이라고. 배우고자 하는 열의와 가르치는 기쁨이 하나돼 서로 행복해야 하는 것이라고.

2년전 맹자, 논어까지 진도가 나갔던 예산문화원 한학강좌는 전옹이 지난해 병을 얻어 병원에 입원하면서 끊어졌다. 올해 예산문화원 회원들의 강력한 요청으로 부활한 이 강좌는 초학자를 대상으로 명심보감과 동몽선습이 진행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예산 무한정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한학자, #예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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