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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덕 방파제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바다, 매일 다른 모습이지만 그 언젠가의 그 모습 그대로인 바다.
함덕 방파제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바다, 매일 다른 모습이지만 그 언젠가의 그 모습 그대로인 바다. ⓒ 김민수

제주, 그 곳을 떠난 지 3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그 3년의 세월 동안 나는 많이 변해버렸다.

내가 변해버린 만큼의 거리만큼 제주의 산하도 내게 정을 떨쳐내려는지 일주일 머무는 내내 맑은 하늘을 보여주지 않았다. 마지막 날이 되어서야, 그래도 다시 올 마음은 남겨두어야겠다는 듯 맑은 하늘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가야지 가야지 하면서도 일정이 빡빡하여 찾지 못했던 용눈이오름,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 억새풀 피어나기 시작한 용눈이오름에 올랐다. 예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토양유실을 막기 위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산책로뿐, 그 곳에서 때가 되면 피어나던 들꽃들은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 피어나고 있었다.

 

참취 용눈이오름에서 만난 참취,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가운데 오름 정상에 제주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서있는 들꽃의 모습은 변함이 없다.
참취용눈이오름에서 만난 참취,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가운데 오름 정상에 제주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서있는 들꽃의 모습은 변함이 없다. ⓒ 김민수

용눈이오름 정상에 서니 비안개로 바로 앞에 있는 다랑쉬오름도 보이질 않고, 오름의 분화구조차도 희미하다. 바람이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몰아치며 귓가에 휘파람소리를 남긴다.

가을이 늦은 제주, 아직 물매화나 보랏빛 꽃향유는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지만 쑥부쟁이와 이질풀과 쥐손이풀, 참취, 조개방풀 등이 고단한 삶의 흔적을 작은 키에 새긴 채 꿋꿋하게 서있다.

 

'너희들만 변하지 않았구나, 그동안 사람들은 참 많이 변했는데 자연, 너희들만 여전히 그대로 피어나는구나.'

 

내게 말을 걸던 제주의 들꽃들은 말이 없다. 그들이 변해서가 아니라 내가 변한 탓이리라. 그들과 다시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려면 이별의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야고 억새풀 사이에서 기생하는 야고도 가을이면 어김없이 피어난다.
야고억새풀 사이에서 기생하는 야고도 가을이면 어김없이 피어난다. ⓒ 김민수

'자연, 그들은 사람들의 손길에 속수무책인 듯하면서도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반격을 준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때론 하나 둘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숨어들다 마침내 단 한 송이 피었던 꽃마저 열매를 맺지 않음으로 자신들의 뜻을 전하는 것이 아닐까? 하루에도 수십종의 동식물들이 그렇게 자신의 대를 잇기를 거부하면서 인간들에게 '지금이라도 돌이키라고'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람들의 귀는 막혀버린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니 이전에 만났던 들꽃들이 그 자리에 피어준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일년을 돌아 또 다시 피어난다는 것, 그것은 희망의 메시지다.

 

갯쑥부쟁이 함덕바닷가 언덕에 피어난 갯쑥부쟁이가 파도소리와 바람에 춤을 춘다.
갯쑥부쟁이함덕바닷가 언덕에 피어난 갯쑥부쟁이가 파도소리와 바람에 춤을 춘다. ⓒ 김민수

오름을 지나 함덕바다에 섰다. 해안가에 늘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던 꽃인데, 이제 만나면 언제 만날지 기약할 수 없음에 더 가슴저미게 다가온다.

 

그들은 사람들처럼 교활하지 않고, 거짓말을 모르며, 차라리 이전보다 더 흉한 모습으로 피어난들 정직하다. 그래서 못생긴 들꽃 하나, 상처받은 들꽃 하나가 더 시리게 다가오는 것이리라. 갯쑥부쟁이가 파도소리를 음악삼아, 제주의 바람을 타고 춤을 춘다.

 

제주의 바람은 아직도 슬프다.

 

1948년 4.3 항쟁으로 죽어간 무고한 영혼들의 숨결이 그 바람 속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보수극우파는 아직도 그들을 좌익으로 매도하지 못해 안달하고 있으니 아무것도 모르고 죽어간 어린 영혼들의 숨결, 죽고 싶지 않아 발버둥치다 이념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죽어간 이들이 숨결이 울부짖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갯강아지풀 바람만 불면 반갑다며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풀, 그들도 변함없이 그 곳에 피어난다.
갯강아지풀바람만 불면 반갑다며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풀, 그들도 변함없이 그 곳에 피어난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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갯강아지풀들의 몸부림을 보면서 '변하지 않는 것은 너희뿐인가 보다'했다.

 

'모든 것이 변해도 너희들은 태고적의 모습 그대로 피고지며 너희를 바라보며 웃음짓던 사람들 혹은 너희를 뽑아버리던 사람들이 다 죽어 흙으로 돌아간 후에도 여전히 너희들은 그 자리에서 피어나겠지.'

 

제주의 가을꽃, 가을이 늦은 제주라지만 억새풀도 기지개를 펴고 풀섶에 하나 둘 가을꽃들이 분주하게 계절맞이를 한다. 들꽃들의 삶, 길어야 일년이요 짧으면 한 계절이지만 변함없이 피어남에 그들의 삶은 영원하다.

 

다시 서울, 남해 어딘가를 지나자 희뿌연 스모그가 대지를 덥고 있는 모습이 확연하다. 비행기 창으로 바라본 성냥갑 같은 집들과 거미줄처럼 이어진 길마다 빼곡한 차량들의 행렬이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피곤한 몸으로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간다. 그런 곳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이 기적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또한 사람이 희망이요, 들꽃보다 아름다운 것일까?


#제주도#가을#함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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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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