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말끔하게 단장된 삼지연읍의 주택들.
 말끔하게 단장된 삼지연읍의 주택들.
ⓒ 이병선

관련사진보기


"6·15와 10·4 공동선언을 이행해야 합니다. 먼저 정권들이 해놓은 것이라고 해서 북남 수뇌간 합의를 무시하고 새로 하자는 사람들과 어떻게 믿고 대화를 합니까?"

9월 27~30일 북한 방문 기간 동안 북측 관계자들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말이다. 그들은 '10·4 합의'에 따라 백두산 관광을 비롯한 남측과의 교류협력사업을 전면적으로 이행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북한 측이 남북간 교류확대에 대비해 많은 준비를 진행해 왔다는 사실은 방문하는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북측 관계자들은 자존심을 굽히면서까지 남측에 교류를 구걸할 생각은 없다고 한결같이 말했다. 이명박 정부에는 기대할 것이 없다는 말도 했다.

남북간 교류확대에 대한 기대와, 그것이 당분간 진전되기 어려울 것이라는 비관이 묘하게 교차한 3박4일이었다.

시설 확충하고 말끔하게 단장한 백두산 주변

9월 27일 아침 민간 대북지원단체 '평화3000(이사장 신명자)' 방북단의 일원으로 인천공항에서 평양행 대한항공 전세기에 몸을 실었다. '평화3000' 방북단은 118명 규모. 여기에 똑같은 일정으로 방북하게 된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방북단 100여명이 한 비행기에 타, 이 날 전체 방북 인원은 220여명 규모가 됐다.

'평화3000'은 2003년 창립된 비영리 사단법인으로, 남북간 사회문화교류와 대북 인도적 지원사업을 꾸준히 벌여온 단체다. 평화교육과 제3세계 빈곤아동들에 대한 지원사업도 전개하고 있다.

이번 방북의 주된 목적은 '평화3000'이 평양에 지어준 두유공장 시찰. 그러나 방북단은 이 단체 회원이나 후원자들만으로 구성되지는 않았다. 단순 관광 목적으로 참여한 사람도 상당수에 이르는 것으로 보였다.
 
북측 안내원들도 우리 일행이 편안히 관광을 즐길 수 있도록 배려해 주는 것이 느껴졌다.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중에도 호기심에 가득 찬 남측 관광객들의 쇄도하는 질문에 일일이 답해주는 것은 물론, 빡빡한 일정으로 지친 우리를 위해서 곧잘 농담도 던지곤 했다. 사진 촬영도 이동 중에 다소 제약을 받은 것을 제외하면 생각보다 자유로웠다.

추석 직후부터 재개된 대규모 남북교류에 고무된 분위기를 읽을 수 있었다. 북측은 특히 '10·4선언' 합의사항이기도 한 백두산 관광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세심하게 준비한 듯 했다. 도착해서부터 백두산 쪽 기상상황을 시시각각 전해주면서 한껏 기대를 부풀려 놓았다.

백두산 정상은 기상이 변화무쌍해서 천지가 보이는 날이 많지 않다고 한다. 당초 일정을 앞당겨 28일 새벽 같이 백두산으로 출발한 우리 일행은 오전 11시쯤 정상에 도착,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아래 청명하게 드러난 천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9월28일 맑은 하늘 아래 모습을 드러낸 백두산 정상의 천지.
 9월28일 맑은 하늘 아래 모습을 드러낸 백두산 정상의 천지.
ⓒ 이병선

관련사진보기


이 날 백두산 일대의 관광을 마치고 삼지연읍 외곽에 위치한 '베개봉호텔'에서 하룻밤을 잤다. 1986년 설립된 이 호텔은 최근 증개축을 통해 새롭게 단장했다고 한다. 우리 일행은 2년 전 완공했다는 신관에 들었다.

북한이 본격적인 백두산 관광에 대비해 왔다는 것은 이 밖에도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다. 백두산 관광의 관문인 삼지연 비행장은 대형 항공기의 이착륙이 가능하도록 최근 확장공사를 마쳤다고 한다.

더욱 눈을 사로잡았던 것은 삼지연읍의 모습이다. 버스로 지나가면서 차창 너머에 비친 마을의 모습은 가난에 찌든 북한 시골마을의 이미지와는 전혀 달랐다.

적어도 도로변의 집과 건물들은 최근에 손을 본 듯, 깨끗이 가꿔진 지붕과 외벽이 고산지대의 침엽수들과 잘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거리 곳곳에 나붙은 혁명구호만 아니었다면 서구의 어느 겨울 휴양지를 지나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북측 안내원이 "외부 관광객들을 맞이하기 위해 최근 마을을 대대적으로 단장했다"고 귀띔해줬다.

백두산 관광의 거점인 베개봉 호텔 구관의 모습
 백두산 관광의 거점인 베개봉 호텔 구관의 모습
ⓒ 이병선

관련사진보기


2년 전 증축했다는 베개봉호텔 신관의 모습.
 2년 전 증축했다는 베개봉호텔 신관의 모습.
ⓒ 이병선

관련사진보기


평양 두유공장, 원료공급 어려움으로 가동 중단

다음날(29일) 오전 평양에 돌아와 이번 방북의 주 목적인 두유공장 시찰에 나섰다. 두유공장은 평양의 유일한 가톨릭 교회인 장충성당 경내에 자리잡고 있다.

'평화3000' 운영위원장인 박창일 신부에 따르면 이 공장은 북측이 제공한 땅과 건물에, 남측이 기계설비를 설치해 2006년 완공했다. '평화3000'이 정기적으로 콩 등 원료를 공급해 공장을 가동해 왔다. 매일 200㎖ 두유 5천잔을 생산해 평양 시내 탁아소와 유치원·병원 등에 무상으로 배분했다고 한다.

그러나 올해 들어 국제 곡물가격이 폭등한 데다가 정부와의 이견도 있어 원료 공급이 원활히 이뤄지지 못하면서 공장 가동이 멈춘 상태다. 하지만 이번 방북을 계기로 문제가 풀려 곧 중국으로부터 콩 등 원료가 도착할 예정이라고 한다.    

평양의 유일한 가톨릭 교회인 장충성당.
 평양의 유일한 가톨릭 교회인 장충성당.
ⓒ 이병선

관련사진보기


우리 일행을 맞은 장충성당 평신도협회 김영일(세례명 시몬) 회장은 교회 봉사활동의 일환으로 두유 분배사업을 벌여왔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북한에는 사제가 없지만, 매 주일 장충성당에 모여 평신도들끼리 '공소예절'을 갖는다고 설명했다.

북한의 가톨릭 신자는 1988년 장충성당 축성식 당시 800여 명이었으나, 그 동안 옛 신자와 그 자제들을 찾아내는 사업을 꾸준히 벌여 현재는 3000여 명에 이른다고 김 회장은 말했다.

북측 관계자들은 "공화국은 그 어렵던 '고난의 행군' 시절에도 아이들에게는 하루에 우유 한잔씩을 꼭 먹였고, 콩을 섞어 영양이 더 충실해졌는데…"라면서 두유 생산이 중단된 데 대해 아쉬움을 표시했다.  

김정일 건강 물었더니 돌아오는 건 웃음 뿐

이번 방문을 통해 북한 사회가 어느 정도 안정되어 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제한된 관찰이었기 때문에 북한 사회를 속속들이 들여다볼 수는 없었으나, 적어도 우리 일행이 접한 사람들과 호텔·참관지·거리 등에서 받은 인상은 그랬다.

혹시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건강이상설에 따른 동요의 조짐이 나타나지 않을까 눈에 불을 켜고 찾아봤지만, 끝내 발견할 수 없었다. 북측 안내원들에게 김 위원장의 건강에 대해 에둘러 질문을 던지면, 무슨 의도인지 다 알겠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받아넘겼다.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부인하지도 않았다.  

평양 시내의 건물들은 낡았지만 그런대로 깨끗하고, 거리도 잘 정돈되어 있었다. 방북 경험이 많은 '평화3000' 관계자는 최근 주요 도로변 건물들에 새로 칠을 한 것 같다고 말했다.

방북 마지막 날(30일) 묘향산 방문을 위해 왕복 5시간을 버스로 달리는 동안 펼쳐진 산들은 대부분 민둥산일 것이라는 선입관과 달리 제법 나무들로 채워져 있었다. 키가 아직 작은 걸로 봐선 최근에 심은 나무들인 듯했다. 북측 안내원에게 물어보니 역시 최근 나무심기 사업을 활발히 벌이고 있다고 한다.

들판에는 추수작업이 한창이었다. 일부 논에는 추수가 끝나 볏짚이 쌓여 있고, 다른 한쪽에선 누렇게 익은 벼들이 수확을 기다리고 있었다. 올해는 큰물(홍수) 피해가 없었고, 추수기의 날씨도 좋아 작황이 괜찮을 것 같다며 북측 안내원은 고무된 표정이었다.

일요일 아침에는 많은 주민들이 대로변에 나와 거리를 청소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일부는 망치와 정 등을 들고나와 차도와 인도를 가르는 화강석의 떼를 벗겨내기도 했다. 평일 아침 저녁으로는 출퇴근하는 주민들로 거리가 제법 활기를 띠었다.

우리 일행이 머문 양각도 호텔은 220여명의 남측 방문단 이외에도 중국에서 온 단체 관광객들로 꽤 북적거렸다. 뉴질랜드에서 왔다는 관광객 2명도 만날 수 있었다. 평양에서 아리랑축전과 국제음악제 등의 행사가 열리면서 많은 외국 관광객들이 찾아오고 있다고 북측 관계자들은 설명했다.

공사가 도중에 중단돼 골조만 앙상히 남은 흉물이 된 평양의 최고층(105층) 건물 '류경호텔'도 최근 공사를 재개했다고 북측의 한 관계자는 밝혔다. 실제 류경호텔 꼭대기에 녹색 펜스를 치고, 크레인을 설치해 작업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북측 안내원에게 "저 호텔에 손님을 다 채우려면 외국 관광객들을 많이 받아야겠다"고 하자, 그는 "그럴 계획"이라고 대답했다.

동틀무렵, 양각도호텔에서 바라본 평양 시내 전경, 멀리 우뚝 솟은 '류경호텔'의 모습이 보인다.
 동틀무렵, 양각도호텔에서 바라본 평양 시내 전경, 멀리 우뚝 솟은 '류경호텔'의 모습이 보인다.
ⓒ 이병선

관련사진보기


미국·일본 선거 전망에 비상한 관심 표명

그러나 북한이 '고난의 행군' 시기를 지나 겉으로는 이렇게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고 해도 근본적 문제가 해결된 것은 없다. 북측 관계자들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북측 관계자 누구도 경제재건을 위해서는 외부와의 교류와 협력을 확대해야 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다. 조용히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눌 기회가 생기면 그들은 국제정세, 특히 미국이나 일본의 최근 정치상황에 대해 물어봤다. 11월 미국 대통령 선거나 10월 말로 예정된 일본 총선의 전망에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그 결과에 따라 북한이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에 대해서까지 이야기가 진전됐다.

그리고 이명박 정부의 향후 대북정책 방향에 대해서도 내심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북측은 '10·4 선언'을 이행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사실을 거듭 강조했다. 추석 이후 재개된 대규모 방북이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 변화를 의미하는지 우리 일행을 통해 알아보려 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속 시원한 대답을 줄 수 없었다. 정부가 추석 이후 왜 대규모 방북을 허용하기 시작했는지, 이런 방침은 앞으로 지속될 것인지, 기자로서도 어느 하나 확실한 판단의 근거를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집어든 남측 신문에는 김하중 통일부장관이 국군의 날 행사 참석 등을 이유로 10·4 남북정상회담 1주년 기념행사에 불참하기로 했다는 '어이없는' 소식이 실려 있었다.


태그:#평화3000, #백두산, #평양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