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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9년 완공된 에펠탑은 당시 흉물이라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100여년이 지난 지금 에펠탑은 파리를 상징하는 랜드마크입니다. 우리에게는 사람과 함께 나이를 먹어가는 근대건축물이 생길 수 없을까요. 계속 성형을 하며 젊음을 지키는 도시와 손수 가꾸며 곱게 늙어가는 도시, 과연 우리가 바라는 도시 모습은 무엇일까요. 여기 오랫동안 사람들과 추억을 나누다 쓸쓸히 사라졌거나 사라질 운명에 처한 건축물들을 소개합니다. 도시가 곱게 나이를 먹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보는 기회가 됐으면 합니다.  <편집자말>

최근 구 온양온천 역사(驛舍) 해체작업이 시작됐다. 1922년 6월 1일 만들어진 역사가 기억 속으로 사라질 날이 멀지 않았다.

 

충남 아산이 고향인 내 어린 시절 기억에는 온양온천역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옛기억이나 추억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냥 오래된 낡은 역사일 뿐이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특별할 수 있다. 옛 추억이 기억 속에서 사라지는 것처럼 썰렁하고 허탈한 느낌이다. 

 

당시 구 온양온천역 광장에는 작지 않은 분수대가 있었다. 광장엔 홍합과 번데기·다슬기·피조개 등을 먹기 좋게 만들어 파는 리어카 장사꾼들이 많았다. 또 극장도 있었다.

 

그곳은 항상 사람들로 북적였다. 보기에도 멋진 양복과 정장을 한 남녀를 자주 볼 수 있었고…. 아산으로 신혼여행을 온 사람들이었다. 역사가 근 1300년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온천인 온양온천은 당시 제주도와 함께 가장 인기있는 신혼여행지였다고 한다.

 

마땅히 특별한 재미를 느낄 만한 곳이 없었던 나를 비롯한 비슷한 또래 아이들은 온양온천역 광장을 자주 찾았다. 어른들도 마찬가지였다. 군침을 돌게 하는 먹을거리가 있었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볼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때는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나와 성룡이 되기도 하고, 어느 때는 이연걸, 어느 때는 이소룡이 돼 그들의 무술을 흉내 내기도 했다. 그 때 내 모습은 권상우가 주인공으로 나온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의 한 장면 그대로였다.

 

영화를 공짜로 볼 수 있다는 유혹에 빠져 일명 개구멍이라고 불리는 담벼락에 생긴 구멍을 통해 극장 안으로 들어가 영화를 즐기기도 했다. 그러다 들켜 귀볼을 잡혀 끌려나온 적도 있었으며, 군밤도 적지 않게 맞았다.  

 

어느 여름날에는 분수대 안으로 들어가 물에 발을 담그고 땀을 식히며 친구들과 수다를 떨며 시간을 보냈다. 어른들에게 혼날까봐 가끔 늦은 시간 사람들이 없는 틈을 노려 헤엄을 친 적도 있다.

 

추운 겨울에는 따뜻한 홍합국물이 끝내줬다. 성인이 돼 그 때 그 국물맛을 떠올리고 찾았지만 결국 그 맛을 찾지는 못했다. 그래서 아쉬움을 느꼈던 기억이 있다.

 

필자에게 온양온천역은 그런 곳이었다. 놀이터 같은 곳. 그때마다 항상 묵묵히 나를 지켜봐 준 곳 중 하나가 오래된 친구 같은 구 온양온천 역사다. 극장이나 다른 건물들은 그 모습이 없어지거나 바뀐 지 이미 오래다.

 

이런 사연으로 인해 나에게는 어린 시절 기억을 가장 많이 떠올릴 수 있는 대표 장소가 구 온양온천역이다. 마치 추억을 담아 놓은 주머니 같은 곳이랄까.

 

나는 어릴 적 온양온천이 그렇게 유명한 곳인지 몰랐다. 그 유명세는 나이가 어느 정도 들어서 알게 됐다.

 

"온양온천은 국내에서는 가장 오래된 온천으로 백제·통일신라 시대를 거쳐 그 역사가 근 1300년이 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고려시대에 온수군이라 불리었던 것으로 보아 실제 온천의 역할을 수행해 온 기간은 600여년이 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세종대왕 15년(1433년) 정월에 안질치료차 행차한 후, 세조·현종·숙종·명종·영조·정조 등 여러 임금께서 온궁을 짓고 휴양이나 병의 치료차 머물고 돌아간 다수의 기록과 유적들이 남아있으며, 또한 현종·숙종·명종 때에는 온천에 임행하여 과거를 보게하여 인재를 발굴하였던 기록이 남아 있다."

 

아산시 문화관광 홈페이지에 나온 내용이다.

 

그러한 온양온천의 옛 추억을 고스란히 담고 있던 상징적 건축물인 구 온양온천 역사가 지금 해체되고 있으며,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옛 추억을 더듬으러 아산을 찾는 사람이 있다면 기억할 만한 곳은 이제 현충사가 유일할 것이다.

 

옛 추억을 더듬으려 아산을 찾는 사람이 있다면 기억 속에 그때를 기억할 만한 곳은 이제 현충사만이 유일할 것이다. '온양'이라는 지명도 사라진 지 오래고…. 이처럼 구 온양온천이 허무하게 사라지기 전 우여곡절이 많았다. 그 우여곡절을 여기에 소개하고자 한다. 그 이유는 전국 어디에선가 이뤄지고 있을 제2·제3의 구 온양온천역 문제를 환기하기 위함이다.

 

구 온양온천 철거-보존, 다시 철거 결정 내리기까지
 

[2008년 2월] 구 온양온천역사 철거, 남북 관통 대로를 약속하다

 

아산시는 오래전부터 주민들에게 구 온양온천 역사를 철거하고 역사 남북을 관통하는 대로(이순신대로 또는 충무대로)를 만들겠다고 약속해왔다. 앞으로 있을 교통대란을 막기 위해서 대로가 필요하다는 주민 요구를 받아들인 것이다.

 

시는 추진을 약속했고, 이에 따라 시민들은 시 부지 매입에 적극 협조했다. 올해 2월 강희복 아산시장은 시민과의 대화에서 주민들에게 다시 한 번 이러한 약속을 재확인했다.

 

[2008년 4월] 구 온양온천역사 보존, 박물관과 전시장을 짓기로 하다

 

두 달 뒤 이러한 약속은 바뀌었다. 시는 입장을 바꿔 구 온양온천 역사를 보존하고 이를 박물관 또는 전시장으로 활용하겠다고 입장을 밝혔다. 내세운 근거는 구 온양온천 역사는 현충사와 함께 국내 온천관광도시 메카를 상징하는 건축물로 앞으로 박물관과 전시장으로 활용할 경우 가치가 크다는 점이었다.

 

더불어 철도하부공간 조성사업을 추진한다면서, 이대는 청계천 복원사업보다 더 큰 초대형 공원조성 프로젝트라고 밝혔다. 공원에는 수경관, 광장, 족욕체험장, 생활체육시설, 분수, 자전거도로 등이 설치된다는 내용이었다. 아산시 관계자는 "현재는 온양권을 상징하는 공간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번 사업이 아산 원도심 활성화와 발전을 이루는 구심점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시민들 생각은 달랐다. 시가 일방적으로 약속을 어겼다고 느꼈다. 시민들은 강희복 시장이 공약을 뒤엎겠다는 것은 시민들을 우롱하는 처사라며 '양치기 소년'에 비유했다. 게다가 구 온양온천 역사는 1983년 구 역사를 대폭 리모델링해 근대 건축물로 가치가 없다고 비판했다. 마음이 돌아선 시민들에게 구 온양온천 보존은 다음 선거에 이용할 치적행정으로 비쳤다.

 

시민들은 약속 이행을 주장하며 '아산발전추진위원회(위원장 유동훈, 아산발전추진위)'를 만들어 조직적으로 대응했다. 아산발전추진위 관계자는 "행정은 일관성이 있어야 하고, 철저한 준비와 믿음이 뒤따라야 한다"며, "(공원조성) 사업에 대해 시민들에게 알리지 않은 것은 물론, 밀실행정과 졸속·즉흥행정을 일삼았다"고 질책했다.

 

[2008년 7월] 시민들, 감사원에 아산시에 대한 감사를 청구하다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아산발전추진위는 지난 7월 30일 "역사 보존을 위해 도로 개통을 할 수 없다는 아산시의 결정은 부당하다"며 감사원에 아산시 감사를 청구했다. 같은 날 국민권익위원회(구 국민고충처리위원회)와 충남도에 민원도 제청했다. 청구서와 민원서류에 서명한 시민은 이종암 아산발전추진위 부위원장을 비롯해 5346명이었다.

 

감사원은 아산발전추진위 손을 들었다. 답변서를 통해 '충청남도에서 2003년 2월 27일 고시한 아산시 도시계획변경 결정내용을 검토한 결과 충무대로(도시계획대로 3-10)는 온양온천 역광장을 그대로 존치한 채 이를 기점으로 종점지인 3-3대로까지 연결·개설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고 전제한 뒤, '다만, 역광장 뒤쪽에 설치되어 있는 구 온양온천역사는 철거 후 위 도시계획대로 3-10을 개설하는 것으로 결정 고시된 사실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다만 역사 건물을 우회하는 도로를 개설할 수는 있으나 충남도 도시계획위원회의 심의 및 도지사의 도시계획 변경 결정 절차를 거쳐야 한다고 단서를 달았다.

 

[2008년 10월] 아산시, 구 온양온천역사 철거를 결정하다

 

아산시는 10월 21일 구 온양온천역사 철거를 결정하고, 이 자리를 비롯한 철도하부공간에 온천테마공간 조성을 본격 추진한다고 밝혔다. "그동안 논란이 돼왔던 구 온양온천 역사는 관계 전문가와 지역사회 각 계층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한 후 아산시 도시계획 위원을 비롯해 시의원, 언론인, 철도 관계공무원으로 구성된 별도의 대책회의를 개최해 최종 철거키로 결정했다"는 것이 시의 설명이었다.

 

이어 "이번 결정은 오는 12월 수도권전철 개통을 계기로 2000만 수도권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한 것"이라며 "장항선 고가화로 생긴 하부공간 1.65km(5만5000㎡)를 활용해 물과 빛, 음악이 어우러진 도심 속 명품공원을 내년 6월까지 완료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광장엔 자전거도로, 산책로가 만들어져 신정호와 이어지고, 5일장을 유치해 앞으로 약령시장으로 발전시키겠다고 덧붙였다.

 

[2008년 현재] 시민들, 그럼 충무대로 개통은?

 

아산시가 구 온양온천역사 철거 방침을 밝혔지만 아산발전추진위는 여전히 시와 불편한 관계다. 충무대로 개설이 핵심인데, 이에 대해선 아무런 조치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산발전추진위 한 관계자는 "우리는 감사원과 국토해양부, 충청남도에 도시계획변경이 이뤄지는 시점에 다시 감사를 요청하기 위해 현재 감사 서명을 진행하고 있음을 알린다"고 전제한 뒤 "현재 용화동의 주민단체도 합류해 서명을 지속하고 있으며, '2만명 서명'을 위해 지속적인 운동을 할 것이며, 현재 약 8000명의 서명이 이뤄진 상태"라고 설명했다. 2만명 서명이 이뤄지면 현 시장을 공천한 정당에 민원사항을 접수할 방침이다.

 

[그리고] ...

 

아산시와 시민 간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변화가 있다면 구 온양온천역사가 철거-보존-철거로 결국 제자리로 돌아왔다는 점이다.

 

오랫동안 남는 건축물을 만들기 위해선 신중한 선택과 오랜 계획이 필요하다. 아산시가 보인 행동이 여간 아쉬운 게 아니다. 이를 시민에게 충분한 설득한 뒤 추진했으면 어땠을까 싶다. 아산시는 작품을 만들어 추억이 사라지지 않는 명소를 우리 후손에게 물려주기를 바란다. 오랜 세월이 변하지 않는 또 하나의 고향, 마음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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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박성규 기자는 충남 아산의 지역신문인 <아산투데이> 기자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태그:#온양온천역, #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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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충남 아산 지역신문인 <아산톱뉴스>에서 편집국장을 맡고 있다. 뉴스를 다루는 분야는 정치, 행정, 사회, 문화 등이다. 이외에도 필요에 따라 다른 분야도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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