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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세기 전 부산에서 서울에 가려면 대략 보름 정도 걸렸단다. 1905년 경부선이 뚫리면서 두 도시간 거리는 17시간으로 줄었다. 빠른 속도는 우리에게 많은 혜택을 주었다. 그와 함께 앗아간 것도 있다.
 한 세기 전 부산에서 서울에 가려면 대략 보름 정도 걸렸단다. 1905년 경부선이 뚫리면서 두 도시간 거리는 17시간으로 줄었다. 빠른 속도는 우리에게 많은 혜택을 주었다. 그와 함께 앗아간 것도 있다.
ⓒ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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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세기 전 부산에서 서울까지 가는 데는 대략 보름 정도 걸렸단다. 주 교통수단이 튼튼한 두 다리이던 시절이었다. 매일밤 주막에 들러서 그곳에서 난 음식을 먹고, 동네 이야기도 들었을 것이다. 동네를 둘러싼 산과 강·들도 구경했을 테고.

1905년 경부선이 뚫리면서 서울(서대문)-부산(초량)간 거리는 17시간으로 줄었다. 당시 그 빠르기가 얼마나 놀라웠는지 오죽 하면 최남선은 1908년 '경부철도노래'라는 노래에서 "빨리 부는 바람의 형세 같으니 날개 가진 새라도 못따르겠네"라고 노래했을까.

세월은 흐르고 흘러 2008년 고속버스는 같은 거리를 4시간30분, 고속철도(KTX)는 2시간40분만에 달린다. 100년 전과 비교하면 같은 시간에 같은 거리를 네 번에서 다섯 번 정도 갈 수 있을 정도로 빨라졌다. 지금도 계속 빨라지고 있다.

1970년 457.5㎞에 불과했던 고속국도는 2007년말 3368㎞에 이른다. 정부 계획대로라면 2020년엔 6000㎞에 이를 전망이다. 2010년이면 경부고속철도가 서울-부산을 2시간에 달리게 된다. 아침을 서울에서 먹고 점심을 부산에서 먹는 세상이 이제 열리는 것이다.

신기하긴 하다. 아침을 서울에서 먹고 점심을 부산에서 먹을 일이 생길 것 같진 않지만, 그게 꼭 좋은 일인가 싶다. 한 세기 전으로 돌아가 보자. 그 때는 각 지역을 고스란히 몸으로 느끼며 부산과 서울까지 걸어갔다. 한 번을 가도 각 고을에서 맛본 물맛, 밥맛, 인심은 기억 속에 고스란히 남았을 것이다. 지금 서울-부산을 100번을 왔다간다 한들 그게 가능할까.

교통이 빨라지면서 사람들은 농촌에서 도시로, 옛 도시에서 새 도시로, 지방에서 수도권으로 몰려든다. 속도가 준 선물이 있고, 속도가 앗아간 행복이 있다.

"수십년 동안 동네 가운데를 통과한 일반국도변의 경우 한편은 접속이 수월하거나 일방통행으로나마 지나가게끔 배려를 했어야 했다. 마을을 들어와 천천히 지나가야 할머니 국밥도 팔릴 것이고 그 지역 농산물 선전도 되는 것이다. …최근 내 고향은 남쪽바다에 있는 모든 섬들을 연육화한다고 교량건설을 위해 정책입안자부터 주민까지 목숨을 걸어왔다. 그러나 다리건설로 인해 도선업자는 망했고, 섬 주민 역시 결코 행복하지 않다고 한다. 섬의 땅값은 경제규모와 상관없이 허수로 천정부지까지 올라있고, 그나마 개조하여 아늑하게 만든 어촌민박마저 육지의 펜션으로 빼앗겼단다. 그리고 낚시 여행꾼이 버린 쓰레기와 전쟁 중이다."

한국토지공사가 건설교통부와 함께 발행하는 월간 <시민과 도시> 2007년 6월호에 조현세 도시계획기술사가 쓴 글이다.

빠르고 넓은 것을 탓할 생각은 없다. 빠르고 넓은 게 놓친 것을 살펴보고 싶을 뿐이다. 둘러가는 길을 한 번 찾아보자. 가장 길고 매우 굽으며 가능한 많은 마을과 마을을 잇는 길이면 좋다. 그렇게 찾은 길이 인천과 부산을 잇는 77번 국도다. 아직까지 미개통구간이 많지만 대략 900㎞ 가까이 된다. 경부고속도로가 417.4㎞니 질러가는 길보다 두 배 이상 돌아가는 길이다.

경부선 축이 중심인 우리나라에서 서해안과 남해안을 잇는 77번 국도는 변방일 수밖에 없다. 얼마 전까진 그랬다. 그곳에도 개발 바람이 불고 있다. 서해에선 새만금 개발이, 서남해안에선 연육교 건설이, 남해안에선 조선소 건설이 한창이다.

77번 국도 주변엔 각종 지방도와 이름도 없는 해안도로가 많다. 이들 도로는 빼어난 절경을 안고 있지만 둘러간다는 이유로 자동차는 꺼린다. 자전거를 타기엔 최상이다.

자동차가 시속 100㎞로 고속도로를 달린다면 자전거는 평속 12㎞ 속도로 77번 국도를 달릴 것이다. 꼭 국도를 고집하진 않는다. 국도 옆을 달리는 지방도가 있거나 이름도 없는 도로가 있다면 그 길을 달릴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77번 국도 옆길 기행이 되겠다. 둘러가는 길로 가기, 좁은 길로 가기, 많이 쉬기가 이번 여행 방식이다.

부산에서 77번 국도가 끝나는 인천까지 며칠이 걸릴 것인가. 두달? 석달? 지금으로선 알 수 없다. 알 수 없는 그 곳으로 떠난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린다.

대한민국 두번째 도시 부산, 지난 12년간 28만여명이 줄다

부산은 항구다. 멀리 뻗어나가는 기운과 밖에서 들어오는 기운을 끌어들이는 넉넉함을 항구에서 느낄 수 있다. 다리 건너 보이는 섬이 영도다.
 부산은 항구다. 멀리 뻗어나가는 기운과 밖에서 들어오는 기운을 끌어들이는 넉넉함을 항구에서 느낄 수 있다. 다리 건너 보이는 섬이 영도다.
ⓒ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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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은 항구다. 목포도 항구고, 인천도 항구고, 군산도 항구다. 그 많은 항구 중 부산은 가장 큰 항구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항구도시 부산에선 본 것은 '역전'이다. 역사에선 작고 힘이 없는 것이 크고 강한 것을 집어삼키는 일이 종종 일어난다. 부산은 원래 가야 땅이었다. 뒤에 신라가 집어삼키며 신라땅이 됐다. 삼국 중 가장 약했던 신라는 이후 백제·고구려를 꺾고 한반도의 지배자가 된다.

조선시대 초기까지 이 땅 이름은 동래였다. 부산은 동래현에 딸린 동평현의 한 지역 이름이었다. 지금은 부산이 이 지역을 대표하는 이름이며, 동래는 부산시 16개 구·군 가운데 하나가 됐다.

이 또한 모른다. 역사란 알 수 없는 법이니. 신라 수도 경주는 한적한 문화도시인 반면, 신라 시대 이후 줄곧 변방도시였던 부산은 '대한민국 두번째 도시'라는 지위를 누리고 있다.

해방 이후 줄곧 사람을 빨아들였던 부산은 언제부턴가 사람이 빠져나가는 도시가 됐다. 지난 12년간 28만여명이 줄었다. 웬만한 중소도시 크기다. 서울시 인구는 지난 4년간 15만명이 늘었다. 경기도는 지난 1년 동안에만 24만명이 늘었다. 서울 중심으로 돌아가는 대한민국에서 1위와 2위 도시간 격차는 점점 커지는 느낌이다.

인구가 계속 몰리는 서울에 살고 있는 처지에서 인구가 빠져 나가는 대한민국 두 번째 도시는 어쩐지 생소하다. KTX에 자전거를 싣고 3시간여 달려 도착한 곳에서 서울을 생각한다.

자전거는 16인치 바퀴 자전거인 스트라이다다. 흔히 타는 자전거가 26인치이니 10인치 정도 크기가 작다. 여행을 해본 결과 시간당 대략 12㎞ 정도 간다. 20인치 자전거로 시간당 17~18㎞ 정도를 갔으니 5~6㎞ 정도 줄었다. 그만큼 더 많은 풍경을 더 자세히 볼 수 있을 것이다.

시작은 부산역이다. 경부선기차역과 경부고속철도역이 끝나는 역이다. 1905년 1월 1일 영업을 시작한 이 역은 애초 이름이 초량역(草梁驛)이었다. 1943년 12월 10일 부산부두역(釜山埠頭驛)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1945년 6월 10일 부산역이 됐다. 

한국전쟁 당시 최후방이었던 부산엔 수많은 피난민이 몰려들었다. 생계수단도 없이 몰려들었던 피난민들은 악착같이 삶을 이어갔을 것이다. 부산시 동광동 테마계단거리엔 그 시절 어머니를 기억케 하는 상징물을 만들었다.
 한국전쟁 당시 최후방이었던 부산엔 수많은 피난민이 몰려들었다. 생계수단도 없이 몰려들었던 피난민들은 악착같이 삶을 이어갔을 것이다. 부산시 동광동 테마계단거리엔 그 시절 어머니를 기억케 하는 상징물을 만들었다.
ⓒ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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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역이 있는 동구엔 사진촬영지로 잘 알려진 곳이 두 곳 있다. 일제 말기 바다를 메워 만들어진 범일5동을 비롯 영화 <히어로> 촬영지인 범일6동이 그 곳이다. 사진촬영지로 유명한 곳은 못사는 곳인 경우가 많다.

2만달러 시대를 사는 우리들은 몇십년 전 모습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그 곳에 가서 '이색'을 느낀다. 누구는 그 곳에서 묘한 아름다움을 느끼고, 누구는 궁색을 담아내는 것에 죄스러움을 느낀다.

이들 풍경이 사람들 눈길을 끄는 것은 어쨌든 곧 사라질 풍경이기 때문이다.

부산역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잡고 달리다 보면 사라진, 또는 사라질 풍경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부산역 건너 동광동엔 40계단 테마거리가 있다. 한국전쟁 때 이곳까지 밀려온 피난민들이 이곳 계단을 오르내리며 고된 삶을 이어갔더랬다.

임진왜란 때 최전방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지역 가운데 하나였던 부산은 한국전쟁 때는 최후방으로 수많은 피난민을 받아주었다. 그 숫자가 대략 70만이다. 해방 뒤엔 20만이 넘는 일본 귀환 동포를 받았다.

40계단 테마거리엔 대화재 전 옛 부산역을 주제로 한 기찻길, 뻥튀기 아저씨 조형물, 옛날 영화 포스터가 그 시절을 현실로 불러낸다. '복고'가 흥행이 되는 시대라지만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영향이 크다.

아직까지 '복고'는 장식품일 뿐이다. 과거와 현재가 평등하게 어우러지길 바라는 것은 지금으로선 먼 꿈인 듯싶다. 근처엔 부산타워가 있다. 1973년 10월에 준공된 국내 최초 전망전용 타워다. N서울타워가 1975년 7월 30일에 완공됐으니 2년이나 빠르다. 부산시는 지난 7월 부산타워를 헐고 주상복합상가를 세우겠다는 '용두산공원 재창조사업안'을 발표했다.

프랑스 파리 에펠탑(1889년 건립),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1931년 건립)처럼 오래 가는 건축물을 우리는 가질 수 없는 것일까. 

부산타워가 있는 중구엔 과거 미화당백화점이 있었다. 1949년 12월 세워진 이 백화점은 설립 당시 4층 목조건물이었다. 1950년대 초까지 부산 최고층 빌딩이었던 이 백화점은 1997년 10월 부도를 냈다. 롯데와 현대 등 대형백화점 진출이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한다. 미화당백화점이 있던 자리엔 표지판이 쓸쓸하게 과거를 추억하게 한다.

돈 걱정 없이 치료받는 세상을 꿈꾸는 의사가 있는 동네

중구 국제시장에서 국수를 시켰다. 많이 달라고 했더니 이렇게 주셨다.
 중구 국제시장에서 국수를 시켰다. 많이 달라고 했더니 이렇게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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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남부민동. 뒷산이 천마산이다.
 부산 남부민동. 뒷산이 천마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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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는 계속 서쪽으로 달린다. 큰 산이 앞을 딱 가로막는다. 산 중턱까지 집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최충언의 책 <달동네 병원에는 바다가 있다>에 나오는 동네다. 부산미문화원사건으로 수감생활을 한 의사가 가난한 사람들과 울고 웃으며 돈 걱정 없이 치료받는 세상을 꿈꾼다는 그 동네다.

자전거를 끌고 오르막을 오른다. 속도계가 5~6㎞를 오간다. 숨소리가 거칠다. 가방을 멘 아이들, 장바구니를 든 아주머니, 허리 굽은 할머니가 힘겹게 고개를 오른다.

천마산 허리를 돌아 감천동에 닿았다. 산이 신화 속에 나오는 큰 거인 같다. 저 산 꼭대기까지 터를 닦고 집을 만든 사람들의 파괴성을 탓할 것인가 아니면 저렇게까지 삶을 이은 사람들의 치열함에 감탄할 것인가.

평지에서나 이런 생각을 하지 오르막을 오르노라면 어서 빨리 길이 수그러지기만 바랄 뿐이다. 오르막은 길고 경사는 급하다. 처음 오를 땐 멋모르고 자전거를 끌고 올랐고, 두 번째 오를 땐 마을버스에 자전거를 실었다. 그 가파르고 긴 오르막을 자전거를 끌고 오른다는 것은 정말 끔찍한 일이다.

그 끔찍함도 꼭대기에 이르면 눈녹듯이 사라진다. 영화 <슈퍼스타 감사용> <히어로>가 왜 이 곳에서 촬영됐는지 수긍이 간다. 성냥갑 같은 집들이 울긋불긋 만들어낸 색깔에서 오히려 비현실감이 느껴진다. 누군가는 이 모습을 보고 '부산의 산토리니'라는 별명을 붙였다.

부산 감천2동. 누구는 이 동네를 보고 '한국의 산토리니'라고 별명을 붙였다.
 부산 감천2동. 누구는 이 동네를 보고 '한국의 산토리니'라고 별명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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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녀봉에서 감천동을 봤다.
 옥녀봉에서 감천동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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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꼭대기에 있는 식당에 들어가 돼지국밥을 시켰다. 대번에 멀리서 온 줄 안다. 부산 곳곳에서 이곳을 보러 온단다. 충청도에서 부부가 온 적도 있고, 서울에서도 종종 내려온단다. 서울서 내려왔다는 말을 듣고서도 그다지 놀라는 눈치가 아니다. 그만큼 많이 온다는 뜻일 게다.

주인 아주머니에게 옥녀봉에 간다고 했더니 천마산에 꼭 가보라고 강조한다. 부산 최고 조망 명소란다.

동네는 소득이 낮은 편이다. 마감칠을 제대로 할 여력이 없는 동네사람들이 각자 형편에 따라 칠을 하면서 지금처럼 울긋불긋 동네가 됐다고 한다. 김원중이 부른 '눈물꽃'이란 노래가 있다. 눈물에서도 꽃이 피어난다. 진흙밭에서 연꽃이 피는 것처럼.

자전거를 메고 옥녀봉을 올랐다. 아마 옥녀봉 꼭대기를 밟은 자전거는 처음이 아닐까. 저 멀리 감천항이 보인다. 부산시가 아시아 최대 식품가공산업단지로 키우려고 하는 곳이다. 2008년 9월 18일 감천항국제수산물거래소가 문을 열었다. 감천항은 드라마 <타짜> <히트>, 영화 <사생결단> <님은 먼 곳에> 촬영지다. 이순신 장군이 서평포(西平浦)해전을 벌인 곳이기도 하다. 적선 9척을 깨트렸다. 그 때가 1592년 10월 5일이다.

옥녀봉 꼭대기에 무덤이 있다. 비석엔 "태어나지 말아라, 죽음이 괴로움이요, 태어나지 말아라, 태어남이 괴로움이니라"고 쓰여 있다. 도대체 누가 이 높은 곳에 무덤을 만들었을까. 이곳까지 힘들게 올라와서 저 감천항을 바라보노라면 온갖 생각에 잠기게 될 것 같다. 의외로 꼭대기에 무덤이 많다. 무덤 옆을 길이 지난다. 몇몇 무덤은 오랫동안 돌보는 이가 없었는지 허물어져 있다.

국밥집 아주머니 말대로 천마산에 올랐다. 부산에서 가장 전망 좋은 곳이라는 평가가 빈 말이 아니다. 천마산에 올라서면 두 랜드마크를 볼 수 있다. 지금 부산 랜드마크인 광안대교에 대표 상징물 자리를 내줬지만 오랫동안 부산을 상징하는 건물이었던 부산타워가 다른 한 곳이다.

천마산 정상 부근엔 조각공원이 있다. 노내식 작가가 만든 '나는 희망한다'에 눈길이 간다. 작가는 신·구가 화합할 때 미래의 모습이 밝으리라 생각한다고 작품 배경을 밝혔다.
 천마산 정상 부근엔 조각공원이 있다. 노내식 작가가 만든 '나는 희망한다'에 눈길이 간다. 작가는 신·구가 화합할 때 미래의 모습이 밝으리라 생각한다고 작품 배경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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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게 펼쳐진 바다를 보면서 깨달은 것은 부산은 바다의 도시이자 산의 도시라는 사실이다. 산과 바다가 빚어낸 조화를 감상하며 눈 호사를 누렸다. 자전거를 메고 내려간다. 방향은 서쪽이다. 이 큰 도시를 빠져나가기 위해선 꽤 애를 써야 한다. 수많은 길이 얽히고설킨 도시에서 다른 도시로 넘어갈 그 길을 찾아낸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주선이 지구에서 이륙할 때 연료 절반을 쏟아붓는다는 이야기를 떠올렸다. 자전거가 부산에서 진해로 가기 위해 이륙할 때다. 2번 국도를 찾기 위해 부지런히 발을 놀린다.

덧붙이는 글 | 2008년 10월에 다녀왔습니다.



태그:#부산, #77번국도, #자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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