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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네가 큰인물이 될 줄 알았다."

 

일자리를 빼앗기고 온몸에 상처투성이인 채 가만히 앉아 실업자의 첫날을 맞이하는 나에게 엄마가 이야기를 한다. 엄마는 항상 그런식이었다. 엄마는 다혈질이고 칼같고 언제나 철두철미했다. 그리고 가시같은 말을 한 마디씩 해야 직성이 풀린다.

 

10년 전이었으면 아마 또 나는 "그래서 어쩌라고? 엄마는 말투가 항상 왜그래?"라는 말을 했을 것이고, 그것을 시작으로 세계2차대전에 버금갈 만한 강폭풍이 우리집을 휩쓸고 지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서른이 벌써 넘어버린 나는 이제 예순을 훨씬 넘어버려 기운 없는 엄마에게 "그래, 나도 그럴 줄 알았어"하고 말아버린다.

 

나는 현대사회의 유행이었다는 핵가족(아빠·엄마·나)의 출생신분을 가졌다. 20대 때는 시대의 조류였다는 IMF를 겪었으며 그 시점 다른 여느 집처럼 집안은 몰락했다. 난 우리시대 전형적인 배경을 가진, 30대지만 아직 철이 덜 든 4대 무남독녀다. 25살 어린 나이부터 직업전선에 뛰어들어 서른 둘이 되기까지 정신없이 보냈다.

 

젊어서부터 자수성가한 커리어우먼이었던 엄마와 친구들의 배경은 대단했고 그 자제분들의 서열에서 나는 항상 특이하기는 한데 무엇이든 항상 중간쯤인 아이였다. 즉, 말하거나 생각하는 것은 그럴싸해 보이는데 다른 아이들처럼 좋은대학에 입학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예 딴따라로 빠지지도 못한 '어중간한 이'였다.

 

그에 반해 엄마는 항상 최강의 여자였다. 155(본인은 158cm 이라고 우기지만 174cm인 내가 보기엔 그게 그거다)cm정도의 작은 체구에 안 어울리게 카리스마가 넘치는 데다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는지 불의를 보면 어느새 강단있는 모습으로 맨앞으로 나간다. 또 무슨일을 하든지 명분이 있어야 하고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부끄러울 짓은 절대하지 말아야 한다고 늘 말하곤 했다. 그것이 말은 쉬운데 무척이나(본인이나 상대방이나) 피곤한 일이다. 그래서 우리집 식구들은 모두 마른체형이다.

 

이런 강한 엄마와 예민한 감수성을 가지고 태어난 나는 항상 천적이었다. 엄마는 유대인의 교육방식(대중앞에서 망신을 줘야 아이가 두 번다시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내가 무엇을 잘못하면 교문 앞에서 기다렸다가 친구들과 사이좋게 파하는 나의 뺨을 때린 적도 있었다. 이럴 때면 난 울분을 꾹 누른 채 측면공격을 하다, 한 번씩 빽 소리를 지르며 엄마와 싸우곤 했는데, 그럴 때 아빠는 집 밖으로 나가곤 했다.

 

한 번은 고교시절 항상 211번 버스를 타던 나에게 아이들이 "21번 왔어, 타"라고 하기에, 생각없이 탔다가 아이들이 "야야! 아니야 그건 21번"하는 것 아닌가. 아이들 목소리에 귀 기울이려고 버스 문에 서서 돌아보던 중 문은 닫혔고, 내 얼굴만 절묘하게 버스 문에 끼었다.

 

나의 얼굴은 정류장 수많은 사람들을 보고 있었고 버스기사아저씨는 어찌할 바 몰라 한 5초를 그렇게 서있었다. 청중은 입을 벌린 채 충격에 고정되어있었고 나는 버둥거리고 있는 상황. 정말 창피했다. 그때 가장 친한 친구였던 진희조차도 "야. 정말 미안해 웃어서 미안한데. 정말 웃겼어. 낄낄낄" 이랬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목청높여 꺼이꺼이 울었다. 그런데 엄마는 차가운 표정으로 '나가! 울려면 나가서 울고 들어와'이러는 게 아닌가. 어이가 없었다.

 

보통 엄마들 같으면 "우리새끼 무슨 일이야." 정도는 되지 않는가? 기로에 서있었다. 울음을 그칠 것인가 아니면 정말 나가서 울고 들어올 것인가. 그런데 껄떡대는 목구멍은 나를 집밖으로 내몰았고 나는 아파트 뒤 주차장에서 다시 울려다가 집중력이 풀려 그냥 터덜터덜 집에 돌아왔다. 집에 돌아와 보니, '그들 부부'는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친구에 대한 배신감, 서러움 플러스 가족의 냉정함이 사무쳤던 그날 밤이었다.

 

 

어느날 집이 몰락을 해버렸다. 유일한 재산인 45평짜리 전세아파트도 없어지고 인천 어딘가 9평짜리 빌라 지하층에 그 짐이 다 가게 되었다. 세 식구는 각자의 생계를 위해 뿔뿔이 흩어졌다. 자존심이 쎈 엄마는 여전히 잘나가는 주변환경으로부터 스스로를 도태시켜버렸고 아빠는 잠적해 있다가 환자가 되어 나타났다. 나는 그때 모든 고통도 기쁨도 함께 할 것 같던 사람들도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냉담해진다는 것을, 결국 개인의 일은 개인이 해결해야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상황에서도 엄마는 말했다.

 

"나는 과거를 돌아보지 않아."

"근데 엄마 나는 깜냥도 안 되는데 세상에 대한 분노는 가득해. 그러면서도 아직도 젊은 열정이 언젠가 식을까봐 두렵고."

"세상의 분노는 소용이 없다. 어차피 그네들의 인생이니깐. 하지만 열정은 나이에 반비례하지 않아. 열정은 육십 칠십이 되도 있을 사람은 있는 거야 넌 그런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봐."

 

29인치 TV가 생겼다. 20년째 똑같은 TV를 보고있는 엄마에게 갖다주고 싶었다. 그래서 친구한테 실어달라고 했다. 이제는 20여평이 된 엄마 전셋집에 가는길이 화창하고 좋았다. 집으로 다가올수록 공장들이 눈에 띄였다. 무심코 친구가 말했다. "여기 완전 똥창이구만." 난생 태어나서 처음 들어본말. 하지만 발음만으로도 임팩트가 강한 그 말 똥창. 씩씩한 우리엄마가 사는 동네를 똥창이라고 하다니. 정말 많이 울었다. 물론 그 친구와는 절교를 선언했지만. 근데 내 실수는 엄마가 왜 걔랑 절교했냐고 했을때 '똥창'사건을 이야기 해버린 것이다. 그러나 엄마는 그냥 "걔는 악마의 영혼이 들어갔대니?" 이렇게 차분하게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말했다.

 

얼마 후 명절이라고 가족 몇이 모였다. 평화로운 분위기에 와인을 조금 마셨는데 얼큰하게 취하니 만감이 교차하고 뭔지 모르게 연휴라는 것 자체가 여유를 누리는 것 같아 그만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엄마. 나는 우리집이 항상 안정적일거라고 생각했고 나이가 든다는게 어떤것을 확고하게 이루어가는건지 알았어… 그런데. 왜 이렇게 된거지? 난 최선을 다한것같은데…."

"넌 내 인생에서 나에게 한 번도 행복을 준 적이 없었어."

 

"엄마는 또 왜 그렇게 말을해?"

"난 학벌이나 직업가지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야. 그리고 다른 애들하고 비교하는 것도 아니야. 너의 약한…."

 

"그래. 넌 그렇게 힘든 상황이 되면 울지 그냥 울어버리지."

"난 엄마의 그런 말투가 정말 너무너무 독해!"

나는 취한 데다가 너무 화가나서 그냥 등을 지고 자버렸다.

 

계속해서 일이 안 풀렸다. 엄마도, 나도 계속 세상이 고양이처럼 우리를 궁지에 몰아넣고 오른쪽 왼쪽뺨을 번갈아가면서 할퀴어 댔다. 그래서 정말 말도 안 되게 점을 보러 갔고 굿을 하기로 결정을 하였다. 나는 항상 미신적이었지만, 역시나 엄마는 '본인은 그다지 굿이라는것을 100% 믿지 않으며 다만 깨끗해진다는 마음가짐으로 뭔가 새로운 기분이 들도록 다짐하는 의미에서' 굿하는데 동의를 하겠노라고 뻔뻔하게 말했다.

 

처음으로 가보는 굿당, 준비해놓은 음식들, 정말 조상님이 오시기는 하는것일까? 무당 4명에 둘러싸여 7살 나이로 돌아가버린 나는 무서움반 호기심반이었고 엄마는 담담하게 굿을 맞이 하고 있었다. 듣던데로 산신령님이 오셨고 장군님들도 오셨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모두들 굿에 집중하게 되었다. 그때 엄마의 조상부터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내가 너 할아버지야… 어디어디에서 살다가 어떻게 죽은… 내 새끼야… 내가 보살펴줄게…." 참. 사전정보를 준적이 없는데(그리고 내심 시험해보고싶은 못된 심보도 있었다) 들어맞는 이야기들을 하고 있었다. 아, 그러다 쉬는 타이밍에 갑자기 엄마가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할매야!"(나중에 무당이 서있는 뒷테가 엄마를 키우신 엄마의 외할머니랑 똑같았다고 했다)

 

"이것아. 내가 너 미음 끓여다가 맥이고… 우리새끼 하루에도 몇 번씩 죽고싶은데. 이거 이거 니 딸래미 혈육 하나 있는 것 때문에 못 죽고. 니가 어디가서 말도 못하고 그렇지 니가 왜 맨날 산에를 가니. 왜 맨날 강가를 걷니 맨날 죽고 싶다고 죽고 싶다고 이것아 할미한테 다들려 이것아. 딸이라고 하나 낳아서 빠작빠작 살겠다고 하는데 힘도 못되고 너도 힘들고… 이 딸래미만 없었으면 벌써 죽었겠지?"

 

 

세상에. 엄마가 죽으려고 했다고? 나땜에 억지로 산다고? 외할머니와 접신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그 무당의 손을 잡고 얼굴을 만지고 울고 있는 엄마는 정말 힘들었다고 죽고싶었다고 어리광부리고 있는 어린아이였다. 뭐야. 어디갔어? 그렇게 당당하고 강한 엄마는? 그러면 엄마에게도 약한 모습이 있었단 말이야? 왜 나에게 말을 안했을까? 괴롭히지라도 말지 그러면 말은 꼭 왜 그렇게 해?

 

그 후 마음을 고쳐먹었다. 말이라는것은 진심의 아주 작은 일부이며 받아들이는 태도에 따라 굴절될 수도 반사될 수도 흡수될 수도 있다. 생각해보니 절대절명의 순간에 엄마는 항상 담대했다. "무엇이든 새로시작해도 괜찮아", "나는 모험이 두렵지 않아", "우리는 가진 것이 없으니 정신만은 놓아선 안된다" 등등. 엄마 당신이 흔들리지 않기 위해 했던 말들과 교육방식이 어쩌면 나를 험난한 이세상에 여자로서 그나마 씩씩하게 견디게 했던 것 같다. 조금 우스운 것은 마음을 고쳐먹은 뒤 엄마가 발사하는 가시총알에는 여전히 묵묵 부답이라는 것이지만(속으로는 여전히 '욱'한다).

 

보름 전 실직을 했다. 괜찮을 것 같았는데 막상 퇴사일이 다가오니 조금 두려웠다. 엄마가 제안한다.

 

"너 열심히 일했는데 좀 쉬어야지 이참에 우리 앙코르 왓트나 가자!"

"돈은 어떻게 하게?" 

"너 퇴직금 받는다며?"

"그래 그래 가자 엄마! 앙코르왓트 가자!"

 

여전히 뻔뻔한 엄마와 나는 앙코르 왓트를 갈 것이다. 고상하게 마스카라 칠하고 새로운 신세계를 항해할 준비를 하러 우리는 앙코르 왓트 가는 거야! 그리고 뒤끝있는 나는 대책없는 엄마에게 물어볼 것이다.

 

"엄마 대체 큰 인물이 뭔데?"

덧붙이는 글 | '가족에게 길을 묻다' 응모글입니다.


태그:#가족, #엄마, #엄마딸천적,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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