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1918년 세계 제1차 대전이 종전된 날. 1945년 대한민국 해군의 모태가 되는 해방병단이 창설된 날. 1977년 이리역 폭발사고가 일어난 날. 2003년 열린우리당이 창당한 날. 프랑스의 소설가 모리스 르블랑이 태어나고, 팔레스타인의 정치가 야세르 아라파트가 사망한 날….

 

11월 11일.

 

며칠 전부터 모든 슈퍼와 마켓, 편의점과 제과점에 들어 앉아 주인행색을 하던 '빼빼로'가 하나 둘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낱개로 나가고, 박스 채 나가고, 심지어 꽃과 함께 예쁘게 포장돼 팔려 나가기도 했다.

 

빼빼로를 생산하는 롯데제과의 매출이 늘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사실은 부산 중학생들이 '빼빼로를 먹고 날씬해지라'는 의미에서 친구들에게 빼빼로를 선물했고, 그게 빼빼로데이가 시초라는 그럴싸한 유래도 귀에 스며든다.

 

'1111'이란 모양이 빼빼로와 너무도 똑같아서 그 의도와는 별개로 만든 이의 센스에는 박수를 보내주고 싶은 심정이다. 꼭 기업의 상술이라는 비판적 잣대를 들이대지 않더라도 친구·연인과 빼빼로 하나쯤 먹는 게 그리 죄가 될 거 같진 않다. 

 

농업인의 날, 지체장애인의 날이기도 한 오늘

 

그런데 때를 같이하여 '내년에는 농사를 못 짓겠다'는 농민들의 한숨이 전해져왔다. 기름값, 사료값, 비료값이 2배가 올랐다고 한다. 농산물 값은 그대로라고 한다. 풍년의 기쁨은 농산물 값 폭락이 되어 돌아왔고, 가짜 농민의 쌀 직불금 수령 파문은 진짜 농민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참, 잔인한 11월이다.

 

1996년부터 정부에서는 매년 11월 11일을 농업인의 날로 제정해, 각종 행사를 추진해오고 있다. 농업인의 긍지와 자부심을 고취시키기 위함이라고 한다. 미국 대선이 끝나자마자 다시금 불거져 나오는 한미FTA. 정부와 여당은 조속한 추진을 외치고 있다. 그러고 보니 농업인의 긍지와 자부심은 도둑맞은 지 이미 오래다.

 

107만여 명의 사람들에게 이 날은 또 다른 의미다. 11월 11일을 '지체장애인의 날'로 기억하는 이가 얼마나 될는지는 모르겠지만, 한국지체장애인협회는 협회가 창립된 1986년 이래로 매년 11월 11일을 '지체장애인의 날'로 기념해 오고 있다.

 

지체장애인들에게 숫자 '1'은 직립(直立)을 뜻한다. 비록 신체적 장애로 자세가 올바르지 않지만, 똑바르고 당당하게 세상을 살아가고픈 이들의 욕구가 담겨져 있다고 하니, 오늘만이라도 이들이 힘차게 일어섰으면 하는 바람이다.

 

내년 오늘엔 뭔가 다른 그림을 그려보자

 

한편, 고3 수험생들에게 11월 11월은 그저 D-2에 지나지 않을는지 모른다. 또 미국에서 오바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것보다 동네 마트 두부 한 모 값이 더 중요한 주부들에게는 할인행사가 벌어지는 날 이상의 의미를 갖기 어려울지 모르고, 취업 준비생에게는 서류전형 결과가 나오는 날이기에 더욱 긴장되는 날일지도 모르겠다.

 

우리 모두에게 속하는 의미를 찾자면, 1년 중 315일 째 되는 날이다.

 

그럼에도, '1111'이 주는 묘한 기분 탓에 아침 인사 대신 빼빼로를 건넸다면, 내년 11월 11일은 이렇게 그려보는 것이 어떨까.

 

쌀로 만든 빼빼로를 들고 주위 지체장애인들과 함께 수능 철폐를 외쳐보자. 촛불 대신 빼빼로라면 뒤처리도 훨씬 간편하고, 쌀로 만든 빼빼로는 농민들의 얼굴에 미소를 되찾아 줄지도 모를 일이다. 지체장애인들과는 차별을 넘어 연대를, 그리고 수험생들에게는 경쟁이 아닌 평등의 가치를 선물해주자.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선샤인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빼빼로, #농업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