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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에 선 가로수들도 잎사귀를 파르르 떨며 단풍빛을 곱게 물들이고 있습니다
▲ 낙엽지는 오솔길을 올라오는 유모차 거리에 선 가로수들도 잎사귀를 파르르 떨며 단풍빛을 곱게 물들이고 있습니다
ⓒ 이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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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가을'이 한껏 깊어가고 있습니다. 거리에 선 가로수들도 잎사귀를 파르르 떨며 단풍빛을 곱게 물들이고 있습니다. 저만치 하늘이 빠진 계곡을 흘러내리는 거울 같은 물 위에는 먼저 떨어진 단풍잎이 조각배로 떠돌고 있습니다.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 이 가을도 밟으면 바스락 하고 부서지는 낙엽처럼 어디론가 떠나버리고 말겠지요.

해마다 낙엽이 툭툭 떨어지는 늦가을 이맘때만 되면 낙엽 한 잎 한 잎 속에 가만가만 떠오르는 시인들 이름과 그들이 쓴 쓸쓸하고도 아름다운 가을시가 절로 읊조려지곤 합니다. 박인환, 서정주, 김남주 그리고 프랑스 시인 폴 베를레느와 레미드 구르몽… 목마와 숙녀, 푸르른 날, 옛 마을 지나며, 가을의 노래, 낙엽…. 

가을을 무척 많이 타는 남자인 저는 이들 시인들 이름과 이들이 쓴 시를 낙엽 지는 벤치나 낙엽 지는 계곡에 앉아 읊조려야만 가을을 느낍니다. 올 가을에도 저는 야트막한 산 계곡에 앉아 떨어져 뒹구는 낙엽 몇 장 주워 그 위에 이들 시인들 이름과 시를 깨알처럼 써서 계곡물에 띄워 보냈습니다. 지금도 가슴에 박혀 있는 사랑에게 보내는 편지처럼.

시인들 이름과 시를 실은 낙엽들은 흐르는 계곡물을 따라 내려가다가 바위틈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자그마한 소 한 귀퉁이에 다른 낙엽들과 함께 머물기도 하고, 계곡을 따라 끝없이 떠내려 가다가 제법 넓은 산장호수에 닿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제 올 가을을 그렇게 시와 함께 떠나보내려 합니다.           

술병이 바랄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 목마와 숙녀 술병이 바랄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 이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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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 이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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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傷心)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서진다.
그러한 잠시 내기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愛憎)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孤立)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랄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 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등대(燈臺)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들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通俗)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박인환, '목마와 숙녀' 모두

서른 살 젊은 나이에 이 세상을 훌쩍 떠나버린 박인환(1926~1956) 시인. 강원도 인제에서 태어난 시인은 서울 종로에서 마리서사(書肆)라는 서점을 꾸리면서 수많은 시인들과 알게 되었습니다. 1946년부터 시를 쓰기 시작한 시인은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세월이 가면> <목마(木馬)와 숙녀> 등 가슴을 찡하게 만드는 아름다운 시를 참 많이 남겼습니다.

초록이 지쳐 국화꽃으로 피어나는 자리
▲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초록이 지쳐 국화꽃으로 피어나는 자리
ⓒ 이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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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 알알이 영근 사과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 이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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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드는데

눈이 내리면 어이하리야
비가 또 오면 어이하리야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서정주, '푸르른 날' 모두

'국화 옆에서'를 쓴 서정주(1915~2000) 시인은 전북 고창에서 태어났습니다. 시인은 <화사> <자화상> <귀촉도> 등을 통해 불교사상과 자기성찰 등을 시구 속에 아름답게 표현한 국내 최고의 시인입니다. 하지만 1942년 7월 <매일신보>에 다츠시로 시즈오(達城靜雄)라는 이름으로 평론 '시의 이야기-주로 국민 시가에 대하여'를 발표하면서 친일작품을 쓴 탓에 그가 남긴 절창이 점점 빛을 바래가고 있습니다.

홍시 하나 남겨둘 줄 아는 / 조선의 마음이여
▲ 땡감 홍시 하나 남겨둘 줄 아는 / 조선의 마음이여
ⓒ 이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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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마을에 호박이 하나 추억처럼 덩그러니 매달려 있다
▲ 노랗게 여문 호박 옛 마을에 호박이 하나 추억처럼 덩그러니 매달려 있다
ⓒ 이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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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 서리
나무 끝을 나는 까치를 위해
홍시 하나 남겨둘 줄 아는
조선의 마음이여

-김남주, '옛 마을을 지나며' 모두

'시인'이라기보다 스스로 '전사'라고 부른 김남주(1946~1994) 시인은 유신헌법이 선포되자 이강 등과 전국 최초로 반(反)유신 지하신문 <함성>을 제작했습니다. 그 뒤 시인은 <남민전> 사건으로 15년형을 선고 받은 뒤 9년 3개월 동안 옥중생활을 하다가 1988년 12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습니다. 하지만 석방 뒤 불과 5년 남짓 지난 1994년 초에 췌장암으로 이 세상을 훌쩍 떠나버렸습니다.

사랑에 찢어진 / 내 마음을 / 쓰리게 하네
▲ 단풍잎 떠도는 계곡 사랑에 찢어진 / 내 마음을 / 쓰리게 하네
ⓒ 이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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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 아닌 몸이련만 / 오가는 바람따라
▲ 잘 익은 도토리 낙엽 아닌 몸이련만 / 오가는 바람따라
ⓒ 이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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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날
비올롱의
긴 흐느낌,
사랑에 찢어진
내 마음을
쓰리게 하네.

종소리
울려 오면
안타까이 가슴만  막혀
가버린 날을
추억하며
눈물에 젖네.

낙엽 아닌 몸이련만
오가는 바람따라
여기 저기 불려다니는
이 몸도 서러운  신세.

-폴 베르레느, '가을의 노래' 모두'

프랑스 시인 폴 베르레느(1844~1896)는 프랑스 메츠에서 태어나 1870년에 결혼해 부인과의 사랑을 노래한 시집 <좋은 노래>까지 펴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부인과 헤어지고 말았습니다. 시인은 그 뒤 후배 시인 랭보와 동성애에 빠져 벨기에로 가서 함께 살기도 했으며, 정신병으로 랭보를 권총으로 쏘아 투옥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끝내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오지 못하고 실의에 빠진 채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 가까이 오라, 밤이 오고 바람이 분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 이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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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 나무 잎새 떨어진 숲으로 가자.
낙엽은 이끼와 돌과 오솔길을 덮고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낙엽 빛깔은 정답고 모양은 쓸쓸하다.
낙엽은 버림받고 땅위에 흩어져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발자국 소리가.

해질 무렵 낙엽 모양은 쓸쓸하다.
바람에 흩어지며 낙엽은 상냥히 외친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발자국 소리가.

발로 밟으면 낙엽은 영혼처럼 운다.
낙엽은 날개 소리와 여자의 옷자락 소리를 낸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발자국 소리가.

가까이 오라, 우리도 언젠가는 낙엽이니
가까이 오라, 밤이 오고 바람이 분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발자국 소리가.

-레미 드 구르몽(1858~1915) '낙엽' 모두 

프랑스 시인이자 소설가, 평론가인 레미 드 구르몽(1858~1915)은  프랑스 북서부 노르망디주 오른에서 태어나 법률을 공부했습니다. 시인은 1884년 파리로 가 국립 도서관 사서가 되었으나 1891년 잡지 <메르퀴르 드 프랑스>에 비 애국적인 기사를 발표했다는 이유로 해고당하고 말았습니다. 생전 50권의 책을 남긴 그는 '시인의 시인'으로 불리는 에즈라 파운드(1885~1972)와 TS 엘리어트(1888~1965)에게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어때요? 오늘 저녁은 낙엽 지는 벤치에 앉아 이 다섯 시인들 이름과 시를 가만가만 읊조려보는 것이. 한때 누군가 제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시를 읽는 사람이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며 가장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저무는 늦가을, 시 몇 편 읊조리며 시인들 삶을 되돌아보는 것도 나를 찾는 지혜가 아닐까요.     


태그:#박인환, #김남주, #구르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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