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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우중충한 영국
▲ 우울한 영국날씨 항상 우중충한 영국
ⓒ 김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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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바야흐로 1998년. 나는 영국 런던에서 유학생으로 공부하고 있었다. 갓 스무 살을 넘긴 어린 나이. 고고학을 공부하겠다는 야무진 꿈을 안고 신사와 철학의 도시 런던에서 나의 청춘은 시작되었다.

무엇이든 대충이란 것 없이 비자처리부터 은행계좌 개설까지 한없이 꼼꼼했던 영국. "뭐 이렇게 답답해? 그냥 보면 모르나? 꼭 문서 상으로 모든 것을 완벽하게 제출해야 하는 거야?"  대충 살아왔던 나에게는 시작부터 답답한 장벽이었다.

제국주의에 대한 자부심이 남아있는지 자기들만의 세계들이 있는지, 가까이 친해질 수 있는 영국인이 별로 없었다. 영국이 미국보다 비인기 국가여서 그런지 런던 내 한인사회 규모가 작았고 별로 뭉칠 일이 없었다. 어디 가나 소심하기 그지없던 터라 영어 못하는 나를 낮게 보는 영국인이 싫어서 피했다. 외곽 교회에 가야만 볼 수 있는 한인사회도 멀리 하게 되었고 결국 유럽과 아시아계 친구들하고 주로 어울렸었다.

98년 월드컵, 0대 5에 1대 3... 왜 한국은 지기만 할까

프랑스 월드컵
 프랑스 월드컵
ⓒ 김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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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월드컵이 열렸다. 98년 프랑스월드컵. 한국은 대회마다 단골로 나오는 멕시코에 1대 3으로 꺾였고 네덜란드에는 0대 5라는 기가 막힌 굴욕을 겪었다. 벨기에는 동점 취미가 붙었는지 네덜란드, 멕시코와 연이어 무승부하더니 한국과도 무승부로 경기를 끝내게 되었다.

외국에 홀로 있다 보면 누구나 애국자가 된다고 했던가. 안타까움과 창피한 생각이 어우러져 '차라리 나오지 말지 이게 뭐야'라면서 연신 혼자 투덜거리고 있었다.

학교를 가니 여기저기서 월드컵 이야기로 시끌벅적했다. 복도에서 영국인 교수님이랑 그 주위를 둘러싼 학생들이 이야기하는데 어떤 학생이 "그런데 한국이 어디 있는 거야?"라고 물었다. 내 앞에 있던 스웨덴 학생이 "그 말레이시아랑 인도네시아 중간에 있는 나라잖아"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지금도 후회되지만 발끈하여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아니! 그게 아니고 중국과 일본 사이에 있다"였다. 세상에! 이건 낚인 기분이었다. 대한민국을 대한민국이라 부르지 못하는 마음이 홍길동의 호형호제를 못하는 쓰린 마음과 같았을까? 고작 하는 나의 설명이란 게….

그때 모두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 네가 한국인이지? 그래 한국 잘했어. 노력했으나 멕시코가 워낙 잘하는 나라고 네덜란드가 워낙 축구 강국이다." 뭔가 억하심정에 가득 찬 나의 기운을 느꼈는지 옆의 일본친구가 어깨를 토닥이며 "너네는 그래도 한 번은 무승부잖아? 우리는 세 번 다 졌어"라고 말한다.

'볼보'와 '아바'의 나라 스웨덴, 축구강국 산업혁명의 근원지 영국, 거기에 축구에서는 별볼 일 없어도 기술과 선진국 대열에서는 경쟁력을 가진 일본. 세계인의 사랑을 흠뻑 받은 영국가수 존 레논의 부인 요코조차 일본인이잖아?

매일 빌붙어먹는 브라질 친구조차도 이번 기회에 월드컵에서는 조 1위로 아주 기세등등하다. 내가 설 곳은 어디인가? 다문화가 어우러진 런던 작은 건물에서는 인간 하나하나가 그 나라의 대변인이 되어 힘겨루기라도 하는 듯한 영상이 펼쳐졌다.

60여 명 넘는 학생 앞에서 '재벌'로 망신당한 기분이란...

지금은 우스갯소리로 이야기하지만 내가 수업시간 중 자발적인 발표를 한 것은 딱 한 번이었다. 우리 학급 내 최고 실력을 뽐낸 그 발표는 '개발'에 대한 수업에서 교수님이 "한국 말 할 줄 아는 사람?" 이렇게 물어보았을 때다.

이 말에 단연 학급내 혈혈단신 한국인이던 나는 손을 들었고 무얼 시키려고 이러지, 라는 기분이 들었다.

"이것 좀 읽어 봐. Chaebol."

별다른 생각없이 우뚝 일어선 나는 당당하게 "재벌" 이랬고 "채벌?" "채볼?" 이런 소리로 장내가 어수선했다. 그래서 나는 똑똑히 "재벌!" 이렇게 친절하게 발음 교정까지 해주었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이어진 강의는 브라질과 대한민국을 개발도상국으로서 비교하는 사례였는데, 대한민국은 재벌의 정치적 유착관계와 독점체제 때문에 단기간의 성공은 이뤘을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해가 된다고 했다. 덧붙여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용어는 한국에서 대표적으로 발견되기 때문에 한국어를 고유명사(Chaebol)로 채택하게 된 것이라고 했다.

정신적 공개 처형이란 게 이런 것일까. 자부심 강한 영국교수와 별 생각이 없는 학급친구들은 이러한 말들이 나에게 상처가 되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것은 그냥 객관적인 학습내용이고 이해를 돕기 위해서 그런 것인데 '니가 오바하는 것이다'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아주 외딴 타지에서 파란눈 까만눈 곱슬머리 노랑머리 갈색머리 60여 명이 넘게 나를 주시하고 있을 때 내 조국의 치부 두 글자를 자랑스럽게 외쳐댔고 잘못 알아듣는 이의 이해를 친.절.하.게 도왔다.

맥주가 나오는 기계
▲ 무슨 술을 드실래요? 맥주가 나오는 기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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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부터 비뚤어진 심성으로 변한 나는 괜한 욕심과 분노에 말도 안 되는 행동들을 해댔다. 사실 잘하지도 못하는 공부를 일부러 애들 보라고 아침부터 문닫을 때까지 도서관에서 했다. 결과는 별로 좋지도 않았지만, 상관 없었다. 단지 이미지 전략이었으니까.

저녁에 술을 마실 때면 무조건 다 이겨야 했다. 겉모습도 중요하다고, 대략 20㎏ 넘게 쪄버린 살도 그 때 다 뺐다.

한국에 있는 부모님에게 의상부터 소품 리스트까지 보내서 동대문 짝퉁 명품으로 몽땅 받아내 한두 번쯤 입고 바자회를 열었다. 아이들에게 싼 값에 팔아서 나에게 명품 따위는 너무 쉬운 것이라는 쿨한 모습을 보여줬다. 아이들은 그것들이 모두 진짜라고 믿었으니까, 실제로 나에게는 경제적으로 이득이었다.

눈에 띄고 싶었고 좀 있어 보이고 싶었고 무언가 저력을 보이고 싶었다. 열등감으로만 가득찬 어린 나로서는 별다른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에릭을 닮은 사람. 에릭은 아니다.
 에릭을 닮은 사람. 에릭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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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그래, 우리집 사자와 고릴라 기른다"

안달이 나 있던 나에게 그 당시 우연찮게 가장 친한 친구가 생겼다. 탄자니아에서 온 에릭 바킬라나라는 학생이었다. 흑인 중에서도 까만 편인데 손바닥은 빨갛고 손등은 까맣다.

너는 왜 손등만 태웠냐고 놀려도 웃기만 하던 그 아이는 탄자니아를 무한한 밀림의 도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네 집에는 사자나 고릴라도 있냐"고 호기심 담아 물어보는 것이 지겹고 신물이 난다고 했다. 이어 이제는 "응, 사자 이름은 심바고 고릴라 이름은 봄바다"라고 여유있게 말한다면서 웃었다.

그 학생은 항상 수석이었고 다방면으로 못하는 것이 없어서 주위에는 점점 많은 학생들이 존경반 호기심반으로 친하고자 몰려들었다. 덕분에 미리부터 친했던 나는 무임승차 격으로 괜히 옆에서 격이 높아지는 것 같았다. 과제물을 제출할 때는 에릭의 도움을 많이 받아 그나마 괜찮은 성적을 유지했다.

EU 가입국가나 영국보다는 10배나 많은 학비를 내고 다니던 대한민국 유학생인 나는 IMF가 터지면서 직격탄을 맞았다. 환율이 3배로 껑충 뛰었다. 꼼꼼한 영국은 수업료를 내지 못하는 나를 수업종료시점에 맞춰 비자도 만료시켜 버렸다.

무언가를 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몇 년의 시간에 결국 딱히 목표를 이루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각인시킬만한 뚜렷한 일도 하지 못했다. 나는 그냥 그렇게 튈려고 노력하고, 있어보이려고 발버둥치다가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인간의 두뇌 속에 증오와 애정을 느끼는 부분이 동일하다고 했던가? 그래서인지 나는 나의 영국생활과 그 때 나의 모습·환경·시간들에 대해 미워하고 그리워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어느날 서른이 되는 1월 1일에 영국으로 훌쩍 건너갔다. 다시 보고 싶었다. 깊어져서 독이 되어버린 그리움에 찾은 영국은 변함이 없어보였다. 심지어 다시 찾아간 학교에는 그 당시 선생님들이 거의 다 계셨다. 친구들은 모두 떠나고 없고 대만 친구 한 명만 박사과정을 공부하고 있었다.

어쩜 아직까지 다 그대로 있네.
▲ 영국교수님들 사진 어쩜 아직까지 다 그대로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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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사이 한국에 대한 위상이 바뀌다

"한국 많이 뜨고 있어."

런던 한복판에 개봉 전인 <친절한 금자씨> 포스터를 보며 사람들은 이야기 한다. 그 위에 빛나는 삼성의 전광판. 이제 조금 대한민국이 인지되고 있는 것일까. 대한민국 구성원으로서 내가 한 일이 무엇일까.

"너네 2002년 월드컵 때 대단했어! 그 때 트라팔가 광장은 붉은 빛으로 물들었단다. 꽉 메웠었어. 한국 사람이 그렇게 많은 줄 처음 알았단다."

한국 사람들이 런던에 많았었구나. 그날 얼마나 감동이었을까?

"에릭은 연락돼? 뭐한데?."
"걔? 말도 마. 전액장학금으로 박사까지 마치고 런던 최고 법률회사에서 변호사로 있대. 연락되는 사람 없어. 암튼 무척 잘 나간대…. 넌 좀 친하지 않았냐? 나도 좀 친해놓을 걸…."

다시금 생각해본다. 어쩌면 에릭이 진정한 복수를 했는지 몰라. 낮에는 공부를, 저녁에는 택시기사로 일하면서도 그 누구에게도 비참한 일상을 말하지 않았고 조용히 자기 계획을 이뤄나간 것이다. 이제는 연락이 되지 않는 단벌신사 에릭이 말이야.

그러고 보면 나는 차별이라는 생각만으로 모든 문제를 대했다. 어떨 때는 '한국인'이라서 '동양인'이라서 '동양여자'라서 이렇게 구실을 만들어서 모든 것을 차별로 분류했다. 해결하는 방법도 '차별을 깨겠다'는 생각에만 미친 나머지, 내가 해야 할 일이나 진실로 중요한것은 놓쳐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서른이 넘어서야 그런 것들을 깨달은 나는 문득 에릭의 안부가 궁금해지고 그 당시 내 아픔만 주장하고 내세웠던 것이 창피해진다. 그리고 결심한다. 너의 주인은 너. 내가 숨쉬는 바로 이 공간에서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내가 할 수 있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그것부터 생각해 볼 것을. 그리고 천천히 다시 시작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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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차별의 기억 응모글입니다.



태그:#차별, #런던, #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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