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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오랜만에 남이섬 한 번 다녀오는 게 어때?”

“남이섬이라, 그것 참 좋은 생각이구먼, 다녀온 지 30년도 넘은 것 같은데...”

 

지난 11월 22일, 친지의 초청을 받아 춘천에 다녀오는 길이었지요. 가평이 가까워지자 누군가 남이섬 얘기를 꺼냈습니다. 모두들 좋다고 합니다. 친구들도 대부분 근래에는 남이섬을 찾지 않았던가 봅니다.

 

“오늘 남이섬은 추억여행이 될 것 같은데, 집사람이랑 연애할 때 와보고 이후론 한 번도 올 기회가 없었거든. 이럴 줄 알았으면 같이 오는건데.”

다른 친구는 부인이랑 연애할 때 다녀간 후 한 번도 와보지 못했다면 반색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 친구는 이날 부인과 동행이 아니어서 몹시 아쉬운 표정이었지요.

 

 

가평에서 남이섬으로 방향을 돌렸습니다. 남이섬으로 가는 길도 옛날하고는 너무 달라져 있었습니다. 옛날에는 한적한 길이었는데 지금은 온통 관광지 냄새가 물씬 풍겨나고 있었습니다. 길가에 즐비한 음식점이며 가게들 때문이었지요,

 

주말이어서인지 주차장도 붐비고 있었습니다. 선착장에 도착하니 다행히 매표소 앞은 그리 붐비지 않았습니다. 매표소 앞 공터에는 젊은 외국인 관광객들이 많았습니다. 일본인들인가 했지만 말씨를 들어보니 동남아 쪽 젊은이들이었습니다. 남이섬은 그 사이 외국인들에게도 많이 알려진 관광명소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선착장으로 내려가는 길엔 긴 줄이 이어져 있었습니다. 시간이 이미 오후 3시가 지나고 있었지만 배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행렬은 길었습니다. 배가 두 번이나 거처간 뒤에야 우리 일행도 배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왕복 승선비는 1인당 1만6천원, 사유지인 남이섬 유원지의 입장료까지 포함된 금액이었습니다. 배는 금방 남이섬에 닿았습니다. 배에서 내린 일행은 섬을 한 바퀴 돌아보기로 하고 왼편길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초겨울에 접어든 섬 풍경은 조금은 황량한 모습이었습니다. 대부분의 활엽수들은 잎이 져버려 썰렁한 모습이었으니까요. 길가의 메타세쿼이아 나무들도 모두 잎이 져버린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잣나무들은 변함없는 푸르름으로 싱싱한 모습을 잃지 않고 있었지요. 그런 산책로를 따라 자전거를 타고 달리거나 함께 타는 작은 탈 것들을 이용한 젊은이들은 마냥 신나는 모습이었습니다.

 

강폭이 넓지 않아 건너편의 풍경도 손에 잡힐 듯 가까웠지요. 산자락에 자리 잡은 유럽풍의 가옥들은 행락객들을 위한 펜션들인 것 같았습니다. 산책로는 숲길이었지만 길 한쪽이 강이어서 시야가 시원하게 열려 있었습니다. 산책로 좌우에는 키가 큰 나무들이 쭉쭉 솟아 있어서 느낌이 매우 좋았습니다.

 

 

“우리 이곳에서 사진 한 장 찍어주세요!”

친구부인이었습니다. 잠깐 걸어 선착장 반대편으로 돌아가자 길가에 갈대숲이 나타났습니다. 그러자 친구부인은 남편의 팔을 끌고 갈대숲으로 들어서며 사진을 찍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곳에 옛날의 추억 한 토막이 남아 있습니까?”

이들 부부도 당연히 이 남이섬에 옛 추억이 깃들어 있으려니 하고 물었지만 그게 아니었습니다.

 

“아니요, 전혀 없어요. 우린 왜 이곳에 한 번도 올 기회가 없었는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오늘 추억 하나 만들려고요. 호호호~”

그러고 보니 서울에 사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모두 이 섬을 다녀가진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강가에 앙상한 모습으로 서 있는 느티나무 주변에는 이 친구부부처럼 추억을 만들려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대부분 젊은 커플들이었지요, 나이든 사람들보다 젊은이들이 많은 것은 옛 추억을 찾아온 사람들보다 관광명소가 되어 있는 남이섬을 찾아 추억을 만드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일 것입니다.

 

섬의 서쪽 끝을 돌아 나오자 이번에는 강가에 정말 멋진 길이 나타났습니다. 강가에 통나무와 판자발판길이 놓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강가에 서 있는 나무들 사이로 놓인 이 길은 두 사람이 겨우 비껴갈 수 있을 만큼 좁았지만 강변 나무들 사이로 오밀조밀 놓여 있어서 여간 멋지고 아름다운 길이 아니었습니다.

 

“여기 이길 참 멋지네, 내 사진 한 장.”

같이 걷던 아내가 통나무에 걸터앉으며 사진을 찍어 달랍니다.

 

“옛날엔 이런 시설도 없고 그냥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었는데 너무 많이 달라졌네, 가난했지만 그때가 참 좋았었던 것 같아?”

아내는 전혀 다르게 변한 풍경 속에서 옛날의 추억을 더듬고 있었습니다. 큰 아이가 돌을 넘겼을 즈음 모처럼 함께 이곳을 다녀갔던 기억이 떠올랐나봅니다.

 

 

그때는 청량리에서 춘천행 기차를 타고 가평에서 내려 이곳 남이섬을 찾았습니다. 아이는 내가 안고 아내는 기저귀가방에 담은 우유와 간식을 들고 왔었지요, 그땐 별다른 시설이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여름이어서 나무 그늘 밑에 앉아 쉬기도 하고 강변을 산책했던 기억밖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래도 아내는 그때를 추억하며 그리워하고 있었습니다. 젊은 시절에 대한 향수지요. 젊음은 가진 것이 없어도 그 자체만으로도 희망이고 행복이었으니까요.

 

강변길에서 나와 섬 가운데로 나왔습니다. 가운데 길은 더욱 장관이었습니다. 양편으로 늘어선 은행나무들이 잎을 모두 떨어뜨려 길바닥은 온통 노란빛이었습니다. 수북하게 쌓인 은행잎을 밟으며 초겨울의 정취에 빠진 젊은이들이 기쁨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4명의 젊은 여성은 서로 손을 맞잡고 늘어서서 카메라 앞에서 멋진 자세를 잡느라 애를 썼습니다. 그 모습이 여간 재미더군요. 옛날에는 전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시설들이 많아 옛 풍경은 전혀 기억해낼 수 없었습니다.

 

나뭇가지에 각양각색의 천들을 걸어놓은 모습은 옛날 시골 당산나무를 연상시키기도 했고, 재미있는 구조물들을 만들어 놓은 작은 연못가에는 얼음이 두껍게 얼어 완연한 겨울풍경을 연출해 놓기도 했습니다.

 

음식점들과 찻집, 그리고 기념품 가게 등 수많은 편의시설들은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이 그만큼 많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조각상들이며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거나 놀이시설들도 매우 많아서 젊은 연인들이나 젊은 가족들이 찾아와 하루 이틀 머물기에 불편함이 없을 것 같은 풍경이었지요.

 

 

섬 안에는 카페와 갤러리 안데르센 홀, 유니세프 홀, 노래박물관 등의 전시관과 문화공간이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몇 년 전 드라마 <겨울연가>에서 배용준과 최지우가 메타세쿼이아 길과 은행나무 길을 걸으며 사랑을 속삭였던 장소도 표시되어 있었지요.

 

“어머, 시간이 너무 늦었네, 다른 사람들 기다릴 텐데. 빨리 배 타러 나가야지.”

너무 달라진 풍경과 시설들을 둘러보며 시간가는 줄 몰랐는데 어느새 오후 다섯 시가 지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섬 안에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서둘러 선착장으로 나가려다가 살펴보니 사람들이 줄서 있는 것이 바라보입니다. 무려 300여m는 될 것 같은 긴 줄이었습니다. 모두 배를 타고 돌아가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일행을 만나 함께 줄을 서 있는 동안에도 섬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남이장군 무덤은 선착장에서 가까운 곳에 있었습니다.

 

 

白頭山石磨刀盡(백두산석마도진) : 백두산 돌을 칼을 갈아 다하고

豆滿江水飮馬無(두만강수음마무) : 두만강 물을 말에게 먹여 없애리라

男兒二十未平國(남아이십미평국) : 사나이 스무 살에 나라를 평정치 못하면

後世誰稱大丈夫(후세수칭대장부) :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하리오.

 

조선조 세조 때 28세 나이로 병조판서가 되었던 남이장군의 기개가 담긴 시조입니다. 그러나 예종 때 유자광의 모함에 빠져 결국 참혹한 죽음을 당한 장군의 시 한 수가 땅거미 지는 무덤가에 전설처럼 외로운 모습이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유포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이승철, #남이섬, #추억, #남이장군, #가물가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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