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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YS) 정부 시절의 날치기 악령이 되살아났다.

 

한나라당은 18일 국회의 회의장 문을 걸어 잠가 민주당 등 야당 의원들의 참석을 원천봉쇄한 채 외교통상통일위원회를 열어 한미FTA(자유무역협정) 비준 동의안을 날치기 상정했다. 그 과정에 국회에서는 망치와 해머 소리가 울려 퍼졌다.

 

며칠 전에 집권여당 대표는 "전국 곳곳에서 해머(망치) 소리가 들리도록 하지 않으면 이 난국을 돌파하는 동력을 얻기 어렵다"면서 전 국토가 거대한 공사장처럼 느껴지게 해야 한다고 했는데 그의 소원대로 국회부터 난장판이 되었다.

 

12년 전 신한국당 안기부법 날치기와 닮은꼴

 

참담한 현실 앞에서 망연자실한 원혜영 민주당 원내대표는 "내가 국회의원이 된 이래, '날치기'를 하더라도 이렇게 입장 자체를 원천봉쇄하고 처리한 적은 없었다"고 했다. 다수당의 횡포에 분노한 이정희 민주노동당 정책위의장은 한나라당 외통위원들의 명패를 바닥에 내던지며 울부짖었다.

 

한나라당의 전신인 신한국당은 1996년 4월 총선에서 승리했으나 그해 12월 26일 새벽 기습적으로 임시국회를 소집해 안기부법과 노동법을 날치기 통과시켰다. 당시 신한국당 의원 155명은 야음을 틈타 도둑고양이처럼 몰래 의사당에 모여 기습적으로 통과시켰다.

 

날치기 사건을 계기로 야당은 국회 농성에 돌입했고, 민주노총은 그 다음날부터 총파업에 들어갔다. 날치기 사건은 김영삼 정권 몰락의 신호탄이었다.

 

바로 그 날치기의 악령이 꼭 12년만에 부활한 것이다. 아니, 대화와 타협을 거부한 채 숫자를 앞세워 밀어붙인 이번 날치기는 그때보다 더 심한 악질 날치기다. 그때는 충돌을 피하려고 신한국당 의원들끼리 몰래했지만, 이번에는 야당 의원들에게 오후 2시에 회의를 소집하니 참석해달라는 문자를 보내놓고 문을 봉쇄했다.

 

또 하루 전부터 질서유지권을 행사해 경위들을 미리 배치했다. 그러나 이들의 임무는 회의장의 질서 유지가 아니라 야당 의원의 출입을 막는 것이었다. 백주대낮에 헌법상 보장된 국회의원의 직무 수행을 고의로 방해한 것이다.

 

알다시피 질서유지권은 국회법상 회의를 진행하면서 필요할 경우 발동할 수 있도록 돼 있다. 이처럼 회의 시작 전부터 의원들의 회의 참석을 원천봉쇄하는 데 쓰라는 것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절차법을 위반한 이번 날치기 상정은 원천무효다.

 

말이 씨가 되어 1주일만에 현실화된 '의회독재'

 

노무현 정부 임기말에 체결된 한미FTA는 아직 국민들 사이에 논란이 큰 사안이다. 또한 미국 대통령이 공화당에서 민주당으로 바뀌는 과도기인 만큼, 한미FTA 비준안은 화급을 요하는 사안도 아니다. 그럼에도 한나라당이 비준안을 폭력적으로 날치기 상정했다는 것은 앞으로 반대 의견을 깡그리 무시하고 가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다.

 

청와대와 한나라당은 이미 경제민생법안은 물론 이념법안까지도 이번 임시국회에서 밀어붙이겠다는 방침을 여러 차례 밝힌 바 있다. 그리고 이번에도 말이 씨가 되었다. 지난 11일 내년 예산안 처리를 하루 앞두고 국회에서 열린 민주당 의원총회에서 정세균 대표는 비장한 각오로 이렇게 말했다.

 

"의회독재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지금 172석 거대 여당의 지도자들이 하는 얘기나 국회를 운영하거나 정치를 해 나가는 모양을 보면 의회독재로 흐를 위험성이 대단히 많다.…(중략)…여야가 공존하면서 대화와 타협하며 국회가 운영하는 것이 의회주의인데 지금 대한민국에서 일어나는 양상은 의회주의는 버리고 의회독재로 흐르는 전주곡이 나오고 있는 것이 아닌지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숫자를 앞세운 의회독재는 그로부터 1주일만에 현실이 되었다. 내년 예산안을 일방적으로 강행처리한 한나라당의 홍준표 원내대표가 '법안 전쟁'을 선포한지 닷새, 박희태 당 대표가 이명박 대통령과의 청와대 회동에서 '질풍노도와 같은 속도전'을 강조한 지 사흘만의 일이다.

 

이 때문에 주례회동에서 이 대통령이 "개혁법안을 임시국회 내에 반드시 처리해달라"고 주문했다는 말도 들린다. 그래서 대화와 타협을 기반으로 한 의회주의를 거부하는 다수당의 폭거 뒤에는 효율만을 강조하는 청와대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 있다고 보는 것이다.

 

박 대표의 '거침없는 하이킥'은 MB의 주문생산?

 

이런 이유로 야당을 향한 박 대표의 '거침없는 하이킥'은 청와대와 '코드 맞추기'를 통해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그리고 코드 맞추기의 배경에는 재보궐선거에서 원내에 진출해 6선 의원으로서 18대 국회 후반기에 필생의 목표인 국회의장이 되려는 의도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사실 '돌격'이니 '돌파'니, '해머소리'나 '망치소리' 같은 투박하고 직설적인 어투는 고사성어를 즐겨 사용하는 은근한 은유가 트레이드 마크인 박희태 대표의 평소 어법이 아니다. 그는 지난 11월 27일 청와대 조찬회동 때만 해도 이렇게 말했다.

 

"정기국회 들어 무엇을 했다 많지 않은 것이 국민 인식이다. 다수당 줬을 때 한나라당이 뭐라도 하라고 준 것이다. 이제 한나라당은 박차를 가할 때가 됐다.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멀다. 문자 그대로 일모도원(日暮途遠)이다. 석양에 빛을 좀 올리자."

 

사마천의 <사기>에 나오는 일모도원은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멀다, 곧 사람이 때가 늦거나 나이가 들어 뜻하는 바를 쉽게 달성할 수 없다는 뜻이다. 어쩌면 평생을 망치와 해머 소리를 들으면서 공사판에서 잔뼈가 굵은 MB식의 속도전을 강조하면서도 갈 길이 먼 자신의 정치역정을 한탄하는 소리로도 들린다.

 

현재 국회 상임위 현황을 보면, 한나라당은 날치기 상정한 외통위(17/29)를 비롯해 모든 상임위에서 과반수를 점하고 있다. 마음만 먹으면 모든 법을 얼마든지 무더기로 통과시킬 수 있다. 그러나 국민이 한나라당에 과반수 의석을 준 것은 대화와 타협으로 갈등을 풀라는 것이지 이처럼 '힘자랑'을 하라고 준 것은 아니다.

 

12년 전 날치기 안기부법과 이번 날치기 상정 한미FTA는 닮은꼴

 

이번 사태의 장본인인 박 대표와 홍 원내대표는 이번 의회 쿠데타와 힘자랑의 논거로 10년 전 외환위기의 야당 책임론을 든다. 이는 'IMF 외환위기도 DJ(김대중) 때문'이라는 YS의 주장과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이같은 주장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1997년 당시 박 대표는 신한국당 원내총무였다. 날치기가 남긴 후유증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IMF 외환위기의 직접적인 원인 제공자는 신한국당이었다. 노동법과 안기부법 날치기가 없었다면 국정 운영이 그처럼 파행을 겪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12년 전 날치기한 안기부법과 이번에 날치기 상정한 한미FTA는 닮은꼴이다. 당시 안기부법 개정은 도무지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공화당에서 민주당으로 정권이 바뀌고 경제위기로 미국 자동차 3사의 운명이 어찔될지 모르는 판에 한미FTA 비준안도 아무런 서두를 이유를 찾을 수 없다.

 

안기부법 날치기와 IMF 외환위기의 추억을 떠올리면 해답은 나와 있다. 설령 박 대표가 MB의 지침을 충실히 이행해 국회의장이 된들 이미 통법부(通法府)로 전락한 국회의 수장에서 무슨 의미와 '가문의 영광'을 찾을 것인가. 이런 식의 힘자랑은 군복만 안 입고 총만 안 들었을 뿐, 명백한 의회 쿠데타이다.

 

이런 식의 힘자랑은 야당을 장외투쟁으로 내몰고 '제2의 촛불 정국'을 부를 뿐이다. "이명박 정부가 얼마나 오래갈 지 두고 보겠다"는 이정희 의원의 울부짖음이 귓전에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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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날치기, #한미FTA 비준안, #박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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