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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중반의 나는 십수 년 전부터 이 땅을 떠나고 싶었다. 물론 여전히 떠나고 싶다. 도망치듯, 쫓겨나듯 나가는 것이 아니고 그저 아쉬움 없이 훌쩍 떠나버리고 싶다. 떠남으로써 국적을 버리고 싶었다.

 

이렇게 말하면 무슨 운동권으로 오해하기 좋겠지만, 나로 말하면, 아이 둘을 키우고 있는 전업주부다. 운동은 오로지 숨쉬기 운동과 아이들 데리고 산책하는 것 정도만 해 온, 진짜 아줌마다. 학생일 때도 혼자 노느라 바빠서 학생회 근처에도 가 본 적 없고, 사회인이 되어서도 사람 많은 동네는 피해다니며 조용한 걸 좋아했다.

 

그런 아줌마에게 민주노동당 분당은 뉴스를 집중해서 보게 하는 사건이었다. 진보연하는 사람들이 집안 싸움 끝에 갈라서는 모습을 보면서 그 이유가 궁금해졌다. 의견이 어떻게 다르기에 갈라섰는지 알고 싶었다. 게으른 탓도 있고, 엄마 손이 많이 필요한 어린아이들을 키우느라 인터넷을 뒤질 시간 여유가 없는 탓에 단행본으로 그런 얘기들을 하는 책들이 꽤 도움이 됐다.

 

<대한민국을 사색하다(산책자 펴냄)>는 민노당 정책위원장으로 일했던 당직자가 쓴 책이다. 갈라지는 두 진보 정당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혼자 걸어나왔다는 지은이의 행보부터 나의 궁금증을 풀어주기에 적당하다고 생각됐다.

 

물론 그가 어느 쪽에 치우치지 않고 설명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누구나 자기 상황에서 자기만의 눈으로 볼 테니 말이다.

 

만 54세라는 나이에 대한 사색으로 시작하는 글은 차분하고 솔직하다. 책에는 지은이가 살아온 세월, 애정을 품고 있는 우리 사회, 마음을 나눴던 사람들을 찾아나선 길에서 얻은 생각을 담았다.

 

존댓말로 설명하는 글의 형식도 자신의 마음을 대변하기에 참 알맞다. 내가 전혀 몰랐던 부분들에 대해 그 분야에서 청춘을 보낸 한 어른이 '그 땐 그랬어, 왜냐하면' 하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책에서 가장 눈길을 끈 대목들은 이 나라의 장점들을 긍정한 부분들이다. 그중에서도 토지개혁-사실 이 책을 보기까지 토지개혁에 대해 어떤 평가나 관심을 가질 기회가 없었다-과 영국 페이비언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소개, 구약 성서의 '희년'과 소농, 1950년 한국 전쟁이 가져다 준 평등한 천민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설명이다.

 

이상하게도 한국 기독교는 유난히 구약으로 설교하는 목사들이 많으면서도,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구절을 가르치는 목사가 없습니다. 오히려 서울 강남의 교회들은 ―아마 그중에 소망교회라는 교회도 있는 모양인데― '세금폭탄론'에 적극 동조하고 종합부동산세 반대론에 가세하고 있습니다. '부동산보유세를 많이 내는 것이 기독교적이다'고 설교하는 목사가 없는 한국 기독교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한국이라는 나라의 발전 과정에는 여러 가지 변수들이 작용하고 원인들이 얽혀 들었습니다. 우연적인 계기도 있었고 필연적인 원인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최초의 원인이 무엇인지 밝혀야 합니다. 거대한 물체가 한 번 움직이기 시작해야 비로소 다른 힘들이 보탬이 되고 작용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최초의 원인이 바로 토지 개혁입니다.

 

대한민국 건국 당시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보장하고, 보통선거권이 보장됐습니다. 당시 세계적 기준으로 봤을 때 손색이 없는, 최소한 법률과 제도상으로는 현대 민주주의 국가로 건국되었습니다. 유럽에서도 여성들에게 투표권을 준 게 그렇게 이르지 않습니다. 불과 몇 년 앞선 정도? 이 모두가 독립운동 시절 사회주의 운동의 결과라는 말입니다. 즉 대한민국 건국에 사회주의가 아로새겨져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 사회의 현재 모습을 가장 자본주의에 충실한 천민자본주의 사회로 보는 것과 그 원인을 역사 안에서 찾아준 것은 그동안 모르기도 하고 무관심하기도 해서 생각해 본 적 없는 나에게 신선하기까지 하다.

 

이 책 222쪽에 나오는 예는 한국이 위대한 천민의 나라가 된 배경을 간단하게 설명해 준다.

 

예를 들면 토지 문서와 귀금속만 챙겨서 월남하여 부산으로 온 평안도 출신의 양반 귀족이 있다고 합시다. 그는 더 이상 체면을 차려서는 먹고살지 못하기 때문에 양반 체면을 팽개치고 국제시장에 나가 장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옆자리에는 경상도 산골에서 온 노비의 후예가 장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서로 근본을 따져서 반상을 구분하고 존대와 하대를 할 이유도 여유도 없었을 것입니다.

 

더욱이 그 자식들은 같은 초등학교에 같은 날 입학한 동기 동창생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불과 할아버지 대까지만 해도 양반 귀족과 노비 천민이었던 흔적은 기억에서 사라지고 생존을 위해 몸부림친 나날의 기억들만 집단 기억으로 대물림되었습니다... 중략... 건국 당시의 대한민국은 평등했습니다. 세상 모든 사물의 평가는 상대적입니다.

 

제가 학생 시절에 자주 들었고 저 자신도 자주 썼던 말 중에 '천민자본주의'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자본주의 자체가 천한 것입니다. 진정한 자본주의라면 모두가 돈에 혈안이 되고 모든 것이 돈으로 환산되니 얼마나 천합니까? 잘은 모르지만 미국 사회가 그렇다고 들었고 그 미국이야말로 가장 전형적인 자본주의 사회 아닙니까? 그리고 한국이 바로 그다음으로 전형적인 자본주의 사회인지도 모르지요. 그렇다면 '천민자본주의'라는 말보다는 '가장 전형적인 자본주의'라는 말이 더 '과학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도 상품이 되어 시장에서 팔리는 사회가 바로 자본주의 사회 아닙니까?' 

 

이 책은 사회민주주의의 장점을 엿보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그리 반가운 책이 아니다. 지은이가 그동안 추구했던 정책에 대한 이야기도 거의 없다. 다만, 전국에 흩어져 있는 그의 옛 동지들이 살아가는 모습 속에서 우리 사회의 건강함을 회복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얇은 희망을 한 줄기 얻을 수 있을는지 모른다.  

 

주대환의 다음 행보가 궁금한 것은 신념을 갖고 인생을 건 어른들이 적은 나라에 사는 까닭이다. 언제나 버리고 떠나고 싶은 부끄럽고, 불편하고, 부당하고, 부정적인 이미지의 조국에 사는 게으른 자의 욕심이다. 그가 말하는 사회, 그가 바라는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 최소한 나의 불만이 조금은 줄어들 수 있는 곳인지 궁금하다.  

 

그처럼 오래 사회의 민주화와 평등에 대해 고민해 온 사람이 건네는 말에 귀 기울여보고 싶은 것은 떠나고 싶으나 여러 이유를 들어 차마 떠나지 못하고 있는,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곳에 대한 작은 예의일지도 모르겠다.


대한민국을 사색하다

주대환 지음, 산책자(2008)


태그:#진보, #주대환,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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