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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조리. 옛 사람들은 섣달 그믐에서 정월 초하루 사이에 1년 동안 쓸 조리를 사서 집안에 걸어 놓았다.
 복조리. 옛 사람들은 섣달 그믐에서 정월 초하루 사이에 1년 동안 쓸 조리를 사서 집안에 걸어 놓았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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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리’라는 게 있었다. 대의 속대를 엮어 만든 것으로, 알곡을 분리해내는 도구였다. 우리 어머니들은 밥을 짓기 전에 이 조리로 쌀을 일었다. 조리는 쌀을 뺀 자잘한 돌이나 쭉정이, 잡것 등 이물질을 걸러내는데 맞춤이었다.

시대가 발달하면서 조리는 본래의 역할보다는 ‘복이 들어오는 조리’라는 뜻의 ‘복조리’로 사랑을 받았다. 옛 사람들은 섣달그믐에서 정월 초하루 사이에 1년 동안 쓸 조리를 사서 걸어놓았다. 일찍 살수록 복이 많이 들어온다고 해서 미처 사지 못한 이들은 새해 첫 장날에 달음질 쳐 사기도 했다.

사람들은 이 조리 한 쌍에 돈이나 실을 넣어 방 귀퉁이나 대청에 걸어두고, 1년 내내 복을 받고 재물이 불어나길 바랐다. 10∼20년 전까지만 해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복조리의 재료가 되는 산죽(왼쪽). 네 가닥으로 쪼갠 산죽은 부드러워지도록 물에 반나절 정도 담가 놓는다.
 복조리의 재료가 되는 산죽(왼쪽). 네 가닥으로 쪼갠 산죽은 부드러워지도록 물에 반나절 정도 담가 놓는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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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조리를 만드는 일은 네 가닥으로 쪼갠 산죽 댓살을 씨줄 날줄로 꿰어야 한다.
 복조리를 만드는 일은 네 가닥으로 쪼갠 산죽 댓살을 씨줄 날줄로 꿰어야 한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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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화순군 북면 송단마을. 해발 810m의 백아산 줄기가 북으로 뻗어가면서 만들어놓은 차일봉 서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산골마을이다. 곡성 옥과에서 화순 동복 방면으로 가는 도로에서 산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 있다.

마을주민들은 논에 벼를 심고 밭을 일궈 고구마, 감자, 찰옥수수, 콩 등을 심어 생활하고 있다. 최근엔 불미나리와 인진쑥도 많이 재배하고 있다.

이 마을이 이른바 복을 짓고 또 복을 보내는 ‘복조리마을’이다. 한때는 집집마다 복조리를 만들면서 한 해 10만개까지 만들어 팔았다. 그때는 복조리를 필요로 하는 기업체나 중간상들이 먼저 돈을 가져다주고 물건을 기다릴 정도였다.

마을 어르신들은 위 어르신들에게, 그 어르신들은 또 그 위 어르신들에게서 복조리 만드는 기술을 배웠단다. 마을주민들의 복조리 만들기 전통이 100년도 넘은 셈이다.

새해를 앞두고 전라남도 화순군 북면 송단2구 강계마을 주민들이 복조리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오른쪽 할머니가 60년 넘게 복조리 작업을 해왔다는 유연순 할머니다.
 새해를 앞두고 전라남도 화순군 북면 송단2구 강계마을 주민들이 복조리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오른쪽 할머니가 60년 넘게 복조리 작업을 해왔다는 유연순 할머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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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승식 씨가 아낙들이 씨줄 날줄로 엮어놓은 것을 복조리 모양으로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다.
 나승식 씨가 아낙들이 씨줄 날줄로 엮어놓은 것을 복조리 모양으로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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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 끝내고부터 설 전까지 집집마다 정신이 없었제. 조리 맹그니라고. 내가 시집왔을 때 시어른들이 만들고 있었응께, 적어도 100년은 됐겄지라.”

열여섯 살에 시집 와서 복조리를 엮기 시작했다는 송단2구 강례마을 유연순(80) 할머니의 말이다. 10∼20년 전만 해도 마을에서 복조리를 만들지 않는 집이 없었고, 밤새 아이들까지 나서 만들어도 주문량을 대지 못할 정도였다고. 복조리 덕에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공책도 샀으니, 복조리는 따로 밑천 들이지 않고도 짭짤한 소득을 보장해 주는 마을의 복덩이였다.

이 마을이 이처럼 ‘복조리마을’로 명성을 지켜온 것은 백아산의 산죽(山竹) 덕분이었다. 지금은 숲 가꾸기 사업 탓에 많이 줄었지만, 당시만 해도 산죽이 무성하게 자랐다. 복조리는 이 산죽 가운데 그해에 새로 돋은 것만을 베어 쓴다.

복조리를 만드는 과정은 산에서 산죽을 베어내는 것으로 시작된다. 먼저 산죽을 베어다 삶아 하루쯤 햇볕에 말려 껍질을 벗긴다. 이것을 네 가닥으로 쪼개서 물에 반나절 정도 담가둔다(옛날엔 냇물에 담갔다). 물에 불어야 댓살이 부드러워져 작업이 한결 수월하기 때문이다. 그 다음 한 줄씩 씨줄 날줄로 꿰어 조리 모양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복조리 만드는 일은 겉보기에 그다지 어려워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막상 해보려면 힘들다. 댓살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한쪽 무릎을 세워 시종 발로 눌러줘야 한다. 몸이 비틀어지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다. 금세 옆구리가 결리고 목이 뻣뻣해진다. 댓살을 이리저리 끼우다 보면 손끝도 까칠해진다. 손바닥에 깡이 박히는 것도 시간문제다.

씨줄 날줄로 엮어진 복조리는 나승식 씨의 손에 의해 완전한 제품으로 태어났다.
 씨줄 날줄로 엮어진 복조리는 나승식 씨의 손에 의해 완전한 제품으로 태어났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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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승식 씨가 복조리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그 옆에서 동행한 예슬이가 신기한 듯 쳐다보고 있다.
 나승식 씨가 복조리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그 옆에서 동행한 예슬이가 신기한 듯 쳐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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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침체가 계속되면서 몇 년 사이 복조리의 수요가 눈에 띄게 줄었다. 주민들도 주문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만들 생각을 않는다. 주문이 들어온 다음에야 동네사람들을 불러 모아 그만큼만 복조리를 만들고 있다.

“옛날에야 많이 많들었지라. 지금은 대중없어요. 주문이 들어오면 만들고, 안 그러면 논디. 엊그제 새해 기념품으로 군청에서 1000개, 또 이장님이 1000개를 주문받아서 이렇게 만들고 있그만이라.”

윤연숙(56) 마을부녀회장의 말이다. 주민들이 복조리를 엮는 것도 돈 때문이 아니다. 예전에는 농한기 쏠쏠한 돈벌이가 됐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시쳇말로 “노느니 복조리라도 맹근다”고.

씨줄 날줄로 엮어진 산죽 살이 나승식 씨의 손에 의해 어엿한 복조리로 태어나고 있다.
 씨줄 날줄로 엮어진 산죽 살이 나승식 씨의 손에 의해 어엿한 복조리로 태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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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하고 나면 온몸이 쑤시고 아픈디. 젊은 사람들 누가 요런 것 하것소? 우리 같이 늙은 사람이나 하제.”

아낙들이 씨줄 날줄로 엮어놓은 것을 복조리 모양으로 마무리하고 있는 나승식(56)씨의 얘기다. “마무리 작업은 베테랑이 하는 겁니까?”라는 질문에 “그럼 베테랑이 하제”하면서도 “사실은 마무리 작업이 힘든께 남자가 하는 것”이라고 덧붙인다.

나씨의 손을 거쳐 어엿한 복조리가 된 것은 50개씩 한 줄로 꿰어진다. 이렇게 꿰어진 복조리를 ‘한 저리’라고 하는데, 한 저리에 4∼5만원 정도 받는다. 산죽을 베어내는 일부터 시작하는 노동력에 비하면 “껌값도 안 된다”는 게 마을사람들의 얘기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복을 짓고, 또 다른 사람들한테 복을 보내준다는 생각에 열심히 손놀림을 하고 있다고.

암울한 일이 많고, 잘못된 정책으로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요즘이다. 일상생활도 버겁기만 하다. 조리로 이 찌꺼기들을 다 걸러내 버리고 좋은 일, 모두가 함박웃음을 지을 수 있는 일만 남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 마음으로 이번 정월엔 집안에 복조리 한 쌍씩 걸어보면 어떨까.

나승식 씨가 다 만들어진 복조리를 50개씩 줄로 꿰고 있다. 복조리는 이렇게 '한 저리'로 엮어져 출하된다.
 나승식 씨가 다 만들어진 복조리를 50개씩 줄로 꿰고 있다. 복조리는 이렇게 '한 저리'로 엮어져 출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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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조리 작업을 끝낸 마을 할머니들이 노닥노닥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승식 씨의 마무리 작업을 지켜보고 있다.
 복조리 작업을 끝낸 마을 할머니들이 노닥노닥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승식 씨의 마무리 작업을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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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복조리, #복조리마을, #송단마을, #화순, #나승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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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찰이 일상이고, 일상이 해찰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전남도청에서 홍보 업무를 맡고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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