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진안의 방과후아카데미 '데미샘학교' 학생들의 전시회 안내 포스터
 진안의 방과후아카데미 '데미샘학교' 학생들의 전시회 안내 포스터
ⓒ 강현화

관련사진보기


인구 2만7천명의 조그마한 산촌 지역인 전라북도 진안. 변변한 전시시설이 없다보니, 기성작가들이 자신들의 작품을 가져와 ‘찾아가는 미술관’ 같은 이름으로 드물게나마 잠깐 전시회를 열고 가는 것이 고작인 지역이다. 이른바 ‘오지’를 애써 찾아가는 이례성에 작가들의 정성까지 겹쳐져 최근 언론의 반짝 주목을 받기도 했다.

이처럼 여느 시골 지역과 마찬가지로 문화적 소외지대라 할 만한 이 고장에서 ‘특별한’ 미술전시회가 열리고 있어 관심을 끈다. 진안군청소년수련관(관장 양윤신)에서 이루어지는 방과 후 아카데미인 '데미샘 학교'(‘데미샘’은 금강과 섬진강의 발원지로 진안의 상징 가운데 하나다.) 청소년들이 다음달 5일까지 하고 있는 ‘나만의 예술상상 전’(이하 ‘상상전’)이 그것이다.

전시회가 ‘오픈’하는 20일 오후, 진안 읍내에 자리 잡고 있는 진안군 청소년수련관에 들어서자 ‘상상 전’을 알리는 포스터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건물 안벽에 붙은 화살표를 따라가자 회의실을 공들여 전시실로 꾸민 세 칸짜리 공간이 나왔다. 임시로 꾸민 특별전시실이었다. 다양한 조명과 전시대 설치 등, 전시와 무관하던 사무공간을 공들인 미술전시실로 꾸며놓은 모습이었다.

작품들 앞에서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까닭

작품 작업과정을 보여주는 40여명의 드로잉 160여점
▲ 드로잉들 작품 작업과정을 보여주는 40여명의 드로잉 160여점
ⓒ 강현화

관련사진보기


‘나만의 예술상상전’은 기성 또는 신진의 성인 작가들이 아니라 진안의 14~15세 청소년들이 창작한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선 특별하다. 게다가 지난 3월에 시작해 12월 전시 직전까지 꽤 긴 기간을 작업했다.

하지만 좀 더 가치 있는 점은 이들이 창작 그 자체만을 위한 창작을 한 것이 아닌 데서 찾을 수 있다. ‘상상전’은 데미샘 학교의 교과목 가운데 하나인 ‘나만의 예술상상’ 과정을 매개로 여러 달 동안 자아 탐색의 노정을 어렵사리 걸어온 청소년들이 힘겹게 토해낸 결과다. 작품들 앞에 서면 그것들이 진실하게 내면을 드러낸 작품들이라는 것을 느끼게 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열네 명의 청소년들이 내놓은 열네 점의 작품들에 배 있는 사유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다는 느낌이 드는 것도 그 때문이다.

우선 전시실 초입에는 1년 동안 함께 작업한 40여명의 청소년작가들이 내놓은 160여 점의 드로잉이 전시돼 있다. 40명이 끝까지 작업에 참여했지만 끝내 완성작을 내놓지 못한 청소년들도 있는 탓이다. 이 드로잉들에는 최종 작품에 이르기 이전 단계의 이들의 자기표현이 담겨 있다. 드로잉에 대해 암시하거나 직접 설명하는 문구들도 포함돼 있어서, 드로잉으로써 뿐 아니라 일종의 작업일지의 의미도 있다. 드로잉 전시실에는 1년의 작업과정을 연속 사진으로 보여주는 슬라이드 영상 코너도 마련돼 있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전시실에는 완성된 열네 점의 작품이 전시돼 있다. 정대화(진안중 1)는 세모, 네모, 동그라미 모양으로 각각 오린 종이들에 세 가지 형태의 신체적 장애를 가진 이들의 이야기를 만화로 그렸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협력과 화합이라는 내용에 덧붙여진 세 가지 도형의 어울림이라는 이중적 장치에서 세밀함이 느껴진다.

세상을 향해 손짓하는 자아

온몸에 문신이 새겨진 고래. 희망을 찾아 떠나는 작가 자신의 모습이다.
▲ 편혜성 작 <바다를 찾아서> 온몸에 문신이 새겨진 고래. 희망을 찾아 떠나는 작가 자신의 모습이다.
ⓒ 강현화

관련사진보기


전진(진안중 1)은 이 지면에서 다음 지면으로 구멍을 통해 이동하도록 설계된 <눈 올 땐 방이 최고>라는 제목의 책을 만들었다. 폭력과 전쟁, 농촌의 공동화 같은 현실을 ‘귀신들의 [인간적이고 아이다운] 송년회’ 같은 허구와 대비시켰다. 액자소설 형식을 빌어 자신의 인도주의를 표현한 것이다.

편혜성(진안여중 1)의 <바다를 찾아서>는 문신을 빽빽이 몸에 새긴 고래다. 고래의 몸과 그 몸에 새겨진 문신들은 그녀 자신이다. 슬픔과 외로움, 분노와 좌절, 사회적 부조리 같은 것들의 이미지가 그것이다. 하지만 문신들이 새겨진 고래는 ‘바다를 찾아’ 떠나는 희망의 근거이기도 하다.

보다 직접적으로 청소년작가들의 자의식을 표출한 작품들도 있다. 이산하(홈스쿨러)의 그림들은 마지막 단풍잎, 눈물을 떨구는 닭, 스스로 위로받는 자아, 온몸에 붕대를 감은 자기 자신 같은 소재가 외로움과 소외라는 주제로 통합되어 있다. 하지만 그녀가 자기연민에만 빠져있는 것은 아니다. “청소년은 학교에서건 학교 밖에서건 어디에서도 구속받지 않고 자유롭게 꿈꾸고 건강하게 활동할 수 있어야 한다”고 당당하게 자기의 생각을 밝히기 때문이다.

무기력한 존재에서 생명있는 바위로

무기력한 존재에서 생명력 넘치는 바위로.
▲ 천성주 작 <바위> 무기력한 존재에서 생명력 넘치는 바위로.
ⓒ 강현화

관련사진보기


다른 작품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겠지만, 특히 천성주(진안중 2)가 그린 <바위>에 대해서는 그를 아는 것이 작품의 메시지를 제대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는 공부와는 ‘담을 쌓은’ 친구다. 그의 학교생활은 기계적이고 그는 무기력한 존재였다. <데미샘 학교>에서 그는 날개를 달았다. 그의 탁월한 생활의 능력(타고난 현실감감과 손재주, 리더십 등)이 발휘되고 제고되었다. 화폭을 가득 채운 바위덩어리와 그 표면을 뚫고나오는 어린 풀들, 활짝 핀 꽃송이 들은 그의 현재 모습을 비추는 듯하다.

꼭 필요한 존재이자 무언가 부재한 존재로써 '가족'
▲ 안주성 작 <가족> 꼭 필요한 존재이자 무언가 부재한 존재로써 '가족'
ⓒ 강현화

관련사진보기


"계속해서 뒤죽박죽인 사람을 만들어갔다."(작가의 말)
▲ 송대연 작 <몸> "계속해서 뒤죽박죽인 사람을 만들어갔다."(작가의 말)
ⓒ 강현화

관련사진보기


이들 청소년들의 작품들은 보는 이의 발길을 오래 머물게 한다. 이진혁(진안중 2)의 <나무>도 그렇다. 자신의 몸집보다도 큰 세 그루의 나무들은 사실적이면서도 간결하다. 두 갈래로 뻗어나갔을 본줄기의 한쪽은 밑둥에서 잘려있고, 다른 줄기의 잔가지들도 그 끝이 모두 도막나 있다. 꽃잎들의 모양과 위치는 비정상적이면서도 탐스럽고 풍요롭다. ‘나만의 예술상상’ 과정과 ‘상상 전’을 지도한 화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인 정진웅(46)씨는 이진혁의 드로잉이 “마치 대가가 데포르메 한 것 같다”고 말했다.

정씨는 “1년의 작업을 마친 아이들이 일단 밝아졌다”며 “이번 작업이 아이들이 자존감을 획득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전시회를 감상한 학부모들도 뿌듯해하는 모습이었다. 한 학부모는 방명록에 “저희 아이들 작품을 보고 느낀 점이 많았다”면서 “훌륭한 수업과 선생님들에게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게 감사한다”고 적기도 했다.

꿈틀거리며 살아있는 연필선
▲ 김유진 작 <지네> 꿈틀거리며 살아있는 연필선
ⓒ 강현화

관련사진보기


"진짜 열심히 했다고 생각한다."
▲ 이진혁 작 <나무> "진짜 열심히 했다고 생각한다."
ⓒ 강현화

관련사진보기


"자의식 만져보고 자존감 획득 계기 되길..."
[인터뷰] 정진웅 지도교사

'나만의 예술상상' 프로그램 진행
▲ 화가 정진웅씨 '나만의 예술상상' 프로그램 진행
ⓒ 강현화

관련사진보기


- 이런 전시회를 연 배경은 무엇인가?
"‘나만의 예술상상’ 프로그램의 마지막 단계다. 자신의 작품이 대중을 통해 객관화되는 것까지 느껴보자는 취지였다. 직접 만든 전시장에서 진솔하게 드러내자는 것이다. 원하는 전시장이 없어 전시를 포기할까도 생각했었다. 청소년수련관장을 만나 전시취지를 설명했다. 어설프지 않은, 꼭 볼 사람들이 보는 그런 전시를 생각했다."

- 이번 전시가 만족스러운가?
"상당히 만족한다. 그럴 가치가 충분하다. 보아서 알겠지만, 예술적인 면에서도 절대 학예회 수준이 아니다. 어른들에게도 분명 느낌이 있을 걸로 본다. 학예회 수준이라고 생각해서, 초대받고도 안 온 분들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아이들이 그 나이에 이렇게 자신을 드러낸 것을 보라. 아이들이 미숙한 존재일지언정 미성숙한 존재는 아니구나, 진실이구나 하고 작품을 보면서 느낄 것이다. 그 사유의 무게가 그렇게 녹록치 않다는 것을."

- 아이들을 지도하는 입장이었는데….
"구성원 중 하나일 뿐이지 아이들을 대상으로 본 건 아니다. 서로 간섭하고 교감하는 존재였다."

- 가장 큰 의미라면….
"내게는 여기서 만난 40명과의 관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들이 자기와 맺는 또 다른 관계에 미치는 영향들이 오랫동안 천천히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것도 생각보다 크게. 그래서 그들이 세상을 바르게 바라보게 되기를 더욱 기대하는 거다."

- 선생님이 강조하는 ‘자존감 획득’이란 뭔가?
"‘관계’ 속에서 평등하고 동등한 입장에서 자기존재의 의미를 깨닫는 것이라고 할까. 이번 작업에서 아이들이 자신을 쉽게 드러낸 것이 아니다. 우물 속에 있는 것을 더듬듯이 자의식을 한번 만져보자는 거다. 그래야 자유로워지기 시작할 수 있다. 성인으로 살아가면서, 역경에 처하거나 인정을 받아야 하는 때가 반드시 생긴다. 그때, 나는 완전하고 가치 있는 존재다 하고 자연스럽게 확인할 수 있기를 바란다."

* 정진웅씨는 화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다. ‘관계’를 내용으로 하는 작업으로 개인전을 열었으며, 자의식 또는 관계에 대한 다섯 번의 전시를 기획했다. 현재 '데미샘 학교'에서 아이들을 만나고 있으며, 새로운 ‘관계’를 기본으로 한 대안학교를 준비 중이다.

덧붙이는 글 | 문만식 기자는 '데미샘학교' 강사입니다.



태그:#데미샘학교, #예술상상, #진안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