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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래 권력자들은 자신을 치장하는데 많은 공을 들였다. 그가 왕일 경우 왕궁은 지배력이 미치는 영역 안에서 만큼은 가장 화려해야 했고 또 위엄이 있어야 했다. 그리고 그런 화려함과 위엄을 지키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가 흔히 일컫는 신비주의였다.

 

자연 섭리대로 정직하고 땅을 일구며 그 생산물을 최고 권력자에게 내놓아야하는 흔하고 천한 농민들이 보기에 화려함과 위엄을 갖추고도 쉽사리 그 속을 드러내지 않는 대상은 그야말로 신비 그 자체일 수 있었다. 권력은 과감한 노출을 선호하면서 동시에 신비주의 전략을 쓰곤 했다. 그것이 두려움에 기반을 둔 위엄을 지키는 유효적절한 방법이 되었기 때문이다.

 

권력을 바라보는 서민들 마음은 늘 두 갈래이다. 선망하는 대상이면서 동시에 조롱을 퍼부으며 고단한 일상이 주는 피로를 푸는 대상이 바로 권력(자)였다. 그런데 그런 권력이 바로 한때 자신들과 동고동락하던 자이고 심지어는 여전히 가까운 곳에서 자신들을 지켜보는(또는 지켜 주는) 이들이라면 그것은 권력 속성을 비트는 신선한 반전이 아닐 수 없다.

 

에릭 홉스봄의 <밴디트-의적의 역사>(민음사 펴냄, 2004)는 고단한 일상을 대변하는 서민·민중과 그런 삶에 신선한 일탈과 긴장 넘치는 반전을 선사하는 산적들이 어떤 관계를 맺으며 '로빈후드 신드롬'을 만들어왔는지를 다루고 있다.

 

그래, 나는 의적이 된 산적 이야기들을 '로빈후드 신드롬'이라 부르고 잠시나마 그 세계를 함께 살펴보고 싶다. 어떤 면에서는 사실이 아닌 신화에 가까운, 말하자면 현실감 넘치는 즐거운 상상이라 해야 할 그런 세상을 지금 잠시 보려한다.

 

권력과 민중 사이에서 줄타기 한 산적은 어떻게 의적이 되었나

 

"산적은 눈에 보이지 않는 불사신이 아니었나? '민중의 산적'은 언제나 다른 무법자들과는 다르다고 믿기며, 이 믿음은 산적들에 대한 농민들의 일체감을 반영한다. (중략) 여러 일화들은 농민과 산적의 그런 관계에 대한 상징적인 표현일 뿐이다. 죽지 않는 산적이라는 관념은 다소 복잡한 현상 같다. 또한 산적이 자기 고장과 자기편인 사람들 속에 있으면서 가지게 되는 안전감도 어느 정도 반영한다. 민중의 수호자가 패배할 리 없다는 소망도 어느 정도 표현되고 있다. 좋은 왕, 그리고 좋은 산적은 정말은 죽지 않았고 언젠가 정의를 회복시키러 다시 오리라는 신화를 끊임없이 만들어 내고 있는 것과 같은 종류의 소망이다. (중략) 산적의 패배와 죽음은 민중의 패배이며, 더 나쁘게는 희망의 패배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정의 없이도 살 수 있고 또 일반적으로 그래야 하지만, 희망이 없이는 살 수 없다."(<밴디트-의적의 역사>, 92~93)

 

서민 또는 민중 아니 아예 그저 평범한 개인 정도로 해두고 우리 삶을 넌지시 바라보자. 하루에도 수없이 이런저런 일탈을 꿈꾸기도 하고 신선한 변화들이 튀어나오기를 바라지만 그게 어디 늘 있는 일이던가. 자신이 사는 세상을 통째로 틀어쥔 권력자들에게서 평범한 일상을 비추는 빛을 기대한다는 게 언제라도 가능한 일이던가. 그걸 일부러라도 거부하고 저항하는 사람이 없는 한 신선한 변화는 그야말로 한낮 꿈에 그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치근덕거리는 그런 권력의 손길을 거부하고 저항하며 인간 개개인의 삶을 선망한 대표 인물이 바로 산적이었다. 권력자를 벗어나려한 이들이 산적이었고 권력의 영역을 벗어난 곳이 바로 본래 그들 거처인 농촌에서 멀지 않은 주변 산악지대였다. 여기서 농민, 산적, 그리고 권력자 간에 미묘한 삼각관계가 발생한다. 이들 산적은 결코 본래 삶이 농촌사회에 근거하면서도 동시에 실제 삶은 일정 범위 안에서 자유로운 권력을 행사하는 자이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 농민과 권력자를 모두 이용하는 술수를 발휘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본래 이런 이중 성격을 지닌 산적이 의적이 되는 것은 그 산적이 농민과 권력자 사이에서 어느 쪽에 더 무게를 두느냐에 따라 달라졌다. 아니, 때로는 억압과 반복된 일상에 지친 농민들이 단순한 산적에 불과한 이들을 권력에 반하는 의적으로 만들기도 했다. 일단 산적이 주변에 있기만 하면 말이다. 이렇듯 산적이란 평범한 이들이 꿈꾸는 세상을 잠시나마 투영하는 대상이면서 동시에 잠시나마 즐거운 일탈을 대리 경험케 해주는 즐거운 인생 동반자이기도 했다.

 

"앞서 보았듯이 정치적으로 산적은 농민들에게 진정한 대안을 제시할 능력이 없었다. 더구나 전통적으로 권력자와 가난한 자들 사이에서 모호했던 그들의 입장은, 민중의 편에 서 있긴 하지만 나약하고 수동적인 사람들을 경멸하는 남자로서, 보통 때는 기존 사회와 정치 구조에 대항한다기보다는 그 안에서 혹은 그 변방에서 활동하는 세력으로서, 혁명에 있어 제한적인 가능성을 지닐 수밖에 없다. 사람들이 서로 형제처럼 지내는 자유로운 사회를 꿈꾸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성공적인 산적 혁명가가 가질 수 있었던 가장 분명한 희망은 지주가 되는 것이었다."(같은 책, 165)

 

사회 저항을 실천하는 용감한 '약자 대변자'이면서 동시에 언제든 농민의 희망을 송두리째 뒤엎을 '권력의 시녀'가 될지 모를 이들이 바로 산적이었다. 그들이 의적으로 남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농민의 희망 외에도 권력의 저울이 어디로 향하느냐하는 정치경제적인 외부 조건도 한몫을 했다. 말하자면, 산적은 처음부터 끝까지 실제 인물일 수 있는 반면에 의적은 결코 완벽한 실재는 아니었다. 거기엔 농민들이 바라는 희망과 역사 이래 있어온 수많은 '의적'이 뒤섞인 움직이는 희망이었다.

 

지금도 '의로운 산적'은 가능할까

 

이 책은 에릭 홉스봄이 사회 운동의 원형적 형태에 대한 연구서 <원초적 반란자들(Primitive Rebels)>(1959)의 첫장이었던 <의적(The Social Bandit)>에서 비롯되었다. 그로부터 10년 후인 1969년 이 책 초판이 런던에서 발행된 이후 이 책은 네 번째 개정판이라고 한다.

 

책은 서론격인 '어느 산적의 초상'에서 어느 한 산적 일대기를 그려내면서 의적 역사에 관한 본격적인 서술로 들어간다. 본문에 해당하는 부분이 총 10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산적이 지닌 전통적 의미, 산적이 되는 과정과 의미, 다양한 산적 사례, 산적이 신화를 덧입고 실제 이상의 의미를 지니게 되는 과정, 사회정치적 의미와 의의, 시공간을 뛰어넘는 상징으로 승화하는 이유와 그 흐름 등 산적에서 의적으로 넘어가는 과정에 얽힌 다양한 이유, 사례, 의미 등을 살피고 있다. 

 

이렇게 적지 않은 변화를 겪으며 다시 태어난 <밴디트>는 사회 저항의 원형과 서민의 오랜 희망이 역사 이래 어떻게 현실과 끝모를 대화를 이어왔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참고로, 에릭 홉스봄은 10장('상징으로서의 산적') 끝부분에서 이반 올브라흐트라는 사람의 입을 빌어 의적으로 승화하는 산적 전설의 의미와 의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인간에게는 정의에 대한 그칠 줄 모르는 갈망이 존재한다. 정의를 부인하는 사회 체제에 대해 그는 영혼으로부터 반항한다. 그리고 어떤 세상에 살든지 그 사회 체제를, 혹은 정의롭지 못한 그 구체적인 세계 전체를 고발하는 것이다. 인간은 사물들을 기억하고 사유하고 변화시키려는 이상하고 고집스러운 충동으로 가득 차 있다. 또한 게다가 자신이 소유할 수 없는 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소망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다. 꾸민 이야기의 형태로라도 말이다. 이것이 아마도 모든 시대, 모든 종교, 모든 민족, 모든 계급의 영웅담의 기초일 것이다."(같은 책, 217)

 

대립각이 분명한 전쟁이 버튼 하나로 진행되고 심지어 끔찍한 놀이로 희화화하는 시대에 고색창연한 산적 이야기를 하자니 다들 듣기 민망해할런지 모르겠다. 그런데 조금만 달리 생각해봐도 이 시대는 여전히 산적 아니 의적에 얽힌 오랜 이야기들을 틈날 때마다 곱씹고 있다. 어렵고 힘들고 또 혼란스러울 때에 나와 가까운 듯하면서도 권력을 향한 도전에 매우 적극적이고도 용감한 이가 나타난다면, 여기서 우리는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면서 무한한 감동과 행복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서민이 공통으로 지닌 소박함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이 바로 권력을 거부하는 한 개인에 불과한 산적이 일정한 무리를 이끌고 새로운 공동체를 꿈꾸게 하는 의적으로 승화하는 첫 걸음이 된다. 이런 이야기가 실제로는 전혀 불가능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 가치나 의미만큼은 여전하다는 점이 매우 중요하다. 이 시대에도 '로빈 후드'는 어디서든 다양한 이름으로 나타날 수 있다.

 

결국, 산적은 사실상 진정한 대안을 제시하는 자가 아니며 그저 핏빛 권력을 흉내내는 도적에 머무르는 경우도 있다. 혼란스럽고 불확실한 권력 틈바구니를 비집고 들어선 유사(類似)권력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한낱 도적에 불과한 존재일 수 있는 산적이 '의로운 도적'으로 승화하는 일은 불확실한 환경, 존재감 없는 불분명한 권력, 반복하는 억압이 뒤섞일 때에 언제든 벌어질 수 있다. 요컨대 그것이 바로 이 책이 주는 진정한 의의라면 의의일 수 있겠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도 세계 곳곳에서 여전히 수많은 산적들이 현대적 의미인 게릴라로 활동하면서 때로는 '의적'으로 남기도 한다. 물론 그들이 실제로 의적일 수도 있지만 단순한 유사(類似)권력일 수도 있다. 물론, 산적인지 의적인지 알 수 없는 그들이 풍기는 신화 가득한 불분명한 냄새는 오로지 권력에서 멀찍이 선 농민(민중)들만이 분간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설명한다는 것은 거의 옛 신화에 현재 생성하는 신화를 덧씌우는 일이 되기 싶다. 결국 그 실재는 아무도 정확하게 규정할 수 없다.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온갖 희망과 신화로 덧칠한 '의적'은 지금 여기에도 있을 수 있다. 행여 진짜냐고는 묻지 말라. 그 답은 당신의 사회적 위치가 어디냐에 따라 달라질 테니까. 

덧붙이는 글 | <밴디트-의적의 역사> 에릭 홉스봄 지음. 이수영 옮김. 민음사, 2004.
(원서) Bandits by Eric Hobsbawm


밴디트 - 의적의 역사

에릭 홉스봄 지음, 이수영 옮김, 민음사(2004)


태그:#밴디트, #산적, #의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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