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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말 나는 음악회에 다녀왔다. 초청장도 없이 공공기관에서 여는 소문나지 않은 음악회였다. 별로 탐탁치는 않았지만 남편이 워낙 가고 싶어해 동행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건물 옆에 차를 대고 있을 때 하얀 지팡이를 가진 사람(시각장애인)이 앞에서 느리게 걸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마침 문으로 들어서려는 한 남자를 붙잡고 뭔가를 물었다. 그 다음 서로 말이 통(?)했는지 시각장애인은 남자의 옷자락을 한껏 움켜쥐고 신이 나서 따라 갔다. 그는 희색이 만면한 게 '오늘 재수 좋은데'하는 표정이었지만 남자는 약간은 당황한 듯 마지못해 동행해주는 모습이었다.

초청장이 없는 음악회이므로, 또 그럼에도 꽤 괜찮다고 생각하는 프로그램이었으므로 우리는 인원이 다 차면 어쩌나싶어 이른 시간인데도 좋은 자리라고 생각되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남편과 서로 번갈아가며 볼일을 보러 다녀왔다. 그런데 내가 잠시 자리를 떴다 돌아왔을 때, 앞에서 한 남자가 일어나 무언가를 손에 들고 사람들의 동의를 구하고 있었다.

 

너무나도 당연한 요구를 했던, 시각장애인


가만히 들어보니 그는 아까 본 그 시각장애인인 것 같았고, 문 앞에서 나누어준 팸플릿을 문제 삼는 것 같았다. 말의 요지는 '자신도 음악회에 왔는데 자신은 이 팸플릿을 조금도 읽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는 소수자인 자신 같은 사람들을 위해 좀 글자를 키워서 팸플릿을 만들어주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항변한 것이다.  

그리고 곧 그는 팸플릿을 나누어 주는 안내데스크에 가서 항의했고 자리에 앉아 기다리라는 답변을 들었는지 다시 돌아와 앉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 남자는 밖을 향해 외쳤다. '언제, 음악회가 시작되고 나서 해줄거냐' 등등. 그러다 밖으로 다시 나갔고, 나가서 또 큰소리로 물었다. 자연 우리의 시선도 그 남자를 따라 이동했는데, 느닷없이 제복을 입은 젊은 남자들이 나타났다. 그의 외마디 외침이 들린 것도 그때였다.

"왜 이러세요. 나도 봐야 해요. 이러지 말아요!"

그의 외침은 처절하게 들렸지만, 그리고 그 외침을 따라 나가보고 싶었지만 나는 끝내 일어나지 못했고 그의 목소리는 차츰 멀어져 갔다. 그의 편이 되어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난 그냥 일찌감치 맡아놓은 그 좋은 자리에 연연하면서 안타까움과 동정심으로 가슴을 콩닥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뒤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저러면 정말 직원들도 질릴 거야."
"그렇지, 벌써 10년 째 저러고 다닌다며…?"

글쎄, 내가 잘못들었을까? 아무래도 그 말은 그 남자를 빗댄 말인 것 같았는데…. 난 그 말을 들으면서 양 쪽의 입장을 생각해봤다. 그러면서 그 10년 동안 우리 사회는 소수자를 위해 얼마나 배려하고 달라지려고 노력했을까? 또 과연 그들은 그때보다 달라진 사회를 느끼고 있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여전히 더딘, 우리사회의 소수자에 대한 배려

 

여전히 내 촉각은 문쪽에 바짝 다가가 있었다. 혹시라도 그 남자가 다시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 때문이었지만 끝내 남자는 나타나지 않았고 음악회는 시작되었다. 소란을 피울까봐 아예 내쫓은 것 같은데, 방법이 그것밖에 없었을까?

 

정히 그게 염려되었다면 맨 끝에 앉게 하고 다짐을 받아도 됐을 텐데. 나는 찜찜함을 지우지 못한 반쪽의 열망으로 음악을 감상했다. 그러면서 굳은 채 꼼짝 못하고 앉아 듣고 있다가 불현듯 초등학교 때를 떠올렸다.

나는 어린시절을 산골에서 보냈다. 30~40분을 걸어서 학교엘 갔고, 늘 여럿이 모여서 다녔다. 하루는 우리가 매일 다니는 길에서 벗어나 다른 길로 집에 오게 되었는데, 그날 동행한 친구들은 모두 한 반 친구들이었다. 그때도 왕따는 있었다. 이웃 마을에 사는 한 친구였는데 그 아이의 별명은 '그지할멈'이었다. 얼굴에 흉터가 많고 사나워 보이는 인상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었다.

처음에는 다 같이 출발을 했는데 얼마 안 가 왕따 친구는 따돌려졌고, 아이들은 그 애를 놀리기 시작했다.


"누구누구는 그지 할멈이래요. 누구누구는 그지 할멈이래요."

그 아이는 그 놀림이 싫어 앞서 걸었고, 아이들은 쫓아가면서 놀렸다. 마음 약한 나는 놀리는 아이들이 영 못마땅했다. 솔직히 얼굴에 흉터가 있고 인상이 사납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애가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조금씩 그애가 가여워지기 시작했고 내 걸음이 빨라져 그 아이 옆에서 걷게 되었다. 그리고는 아이들이 뭐라고 하거나 말거나 그애와 함께 걸었다.

제지하지 못한, 내 비겁함에 부끄러워하다


그땐 대여섯 명이 고작인 아이들 사회였고, 그렇기에 난 당당히 그 왕따아이와 함께 할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당장 내 옆에 있는 내 남편이 불만스러워 할 거고, 밖으로 나간다 해도 나 혼자 감당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난 마음만 애태웠을뿐 제지하는 쪽과 조금도 다름없는 구경꾼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음악회를 보는 내내 내 마음은 편치 않았다. 우리 사회가, 그리고 생활환경이, 또 문화가 10년 전 보다는 정말 많이 좋아졌다. 그래서 요즘 웬만한 공공기관에서 선진 행정이니, 선진 문화니 하는 구호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소수자의 배려 없이 그저 우리(?)라고 하는 다수의 누림만으로 선진화가 가능할까? 의문도 가져보았다.

음악회가 끝나고 간단한 다과회가 열렸다. 가짓수는 적었지만 음식은 충분했고 모두 다 배불리 먹고도 남았다. 사실 이 음악회는 잔치 형식이었다. 좋은 음악도 듣고 음식도 나누어 먹자는 취지에서 행한. 그런데 그 잔치라 하면 역시 옛날 배고팠을 때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고, 옛날의 잔치에는 어느누구나 다 같이 참여해 즐겼다.

하다못해 동냥을 하러 다니는 걸인들도 한 자리를 차지했고 배불리 먹도록 배려해주었다. 그런데 21세기인 지금은 오히려 우리와 다르다는 이유로 자주 우리 이웃을 배제하고 있다. 마치 우리가 만든 사회라 우리만 자격이 있는 것처럼 희희낙락 먹고 즐기는 형국이 되버린 것이다. 나는 음악을 들으면서도 음식을 먹으면서도 그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선뜻 나서지 못한 내 자신의 비겁함을 아주 많이 부끄러워하면서.

태그:#맹인, #음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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