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일일삼성(一日三省), 삼사일언(三思一言)"

 

<명심보감> 등 어떤 고서에도 없는 경구다. "하루 세 번 자신을 살피고, 말을 하기 전에 세 번을 생각하라"는 뜻이다. 이 집의 가훈이다. 할아버지가 직접 지은 이 경구는 거실 입구에 할아버지의 친필로 현판에 새겨져 있다.

시간이 되면 한 소녀가 할아버지 방에 들어온다. 할아버지는 상을 편다. 그리고 한자 책(족보처럼 생긴 책 다발)이 꽂혀 있는 책꽂이에서 명심보감을 꺼낸다.

 

"먼저 어제 배운 것을 읽어 보아라."

 

할아버지의 말이 떨어지면 그 소녀는 어려운 한자를 마치 한글을 읽듯 낭랑한 목소리로 술술 읽어 내려간다. "어허 목소리는 좀 더 크게"라는 할아버지의 주문에 소녀의 목소리는 영락없이 커진다. "그 뜻이 무엇이냐"는 할아버지의 주문에도 소녀는 한 치의 막힘도 없이 그 뜻을 풀이한다. 

 

이런 풍경의 주인공은 박동복(80) 할아버지와 손녀 보람(초4)이다. 그렇다. 할아버지가 훈장이고 손녀가 제자인 셈이다.

 

 

손녀 보람이는 어렸을 적부터 할아버지 집에서 자랐다. 보람이가 5살 되던 해에 할아버지로부터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해서 <동몽선습>을 뗐고, 드디어 <명심보감>까지 이른 것이다. 할아버지가 보람이에게 한자를 가르치는 이유는, 손녀에게 자신이 잘 알고 있는 한자를 가르쳐 낱말을 제대로 아는 아이로 자라게 하기 위해서라고. 더욱 중요한 이유는 인격 수양과 예절 고취였던 것.

 

손녀 보람이도 이제 훌쩍 커 부모와 함께 평택에 살고 있지만, 요즘처럼 방학이 되면 안성 할아버지 집에 와서 살다시피 하며, 매일 할아버지에게 한자를 배운다.

 

"한자가 재미있어요. 그리고 자신감도 생겼어요."

 

하기 싫은 것을 시키면 잠시도 못 따라가는 요즘 아이들을 감안한다면 보람은 정말로 한자를 배우는 것이 재미있는 게다. 방학만 되면 할아버지 집에 와서 생활하는 것이 이를 증명해준다.

 

57년 동행한 아내 병수발도 훈장님 몫

 

이런 훈장 할아버지는 하루 일과를 거의 집에서 보낸다. 17년 전 중풍으로 쓰러진 아내가 3년째 침대에서 누워 거의 꼼작도 못하고 생활하기 때문이다. 세끼니 먹이기와 하루 3번 기저귀 갈기가 할아버지의 주된 일과이다. 때로는 마당 비닐하우스에 오가피를 직접 키워 수확한 후 끓여서 '오가피 물'을 만들어 할머니에게 준다. 중풍에 좋기 때문이다.

 

덕분에 할아버지는 바깥출입이 거의 없다. 하루 30분 정도 손녀에게 한자를 전수하는 일, 한자를 읽으며 뜻을 새기는 일, 한자를 쓰면서 마음을 다스리는 일 등이 주된 일과를 벗어난 취미생활이다.

 

두 분이 결혼한 지도 자그마치 57년. 박동복 할아버지가 23세, 정영화(77) 할머니가 20세 때에 결혼했으니 말이다. 그동안 농사꾼으로서, 농사꾼의 아내로서 5남매를 키우며 숱한 인고의 세월을 함께 걸어온 부부인 것이다.

 

 

그런데 오늘따라 신이 난 것은 오히려 할머니다. 오래간만에 젊은 사람인 내가 방문해서 자신들이 사는 이야기를 정성껏 적어가며 듣는 것이 반가운 게다. 할머니가 어눌한 발음(중풍 때문에)으로 더듬더듬 말을 이어갔다.  

 

"같이 살아주서 저 사람이 고맙죠. 다시 태어나도 저이랑 살거예유."

 

정확하지도 않은 할머니의 발음에 이어 할아버지도 "자신도 그렇다"며 대꾸했다.

덧붙이는 글 | 이 인터뷰는 지난 7일 박동복 할아버지(경기 안성 대덕면 건지리) 자택에서 이루어졌다.


태그:#훈장할아버지, #박동복 할아버지, #안성, #훈장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교회에서 목사질 하다가 재미없어 교회를 접고, 이젠 세상과 우주를 상대로 목회하는 목사로 산다. 안성 더아모의집 목사인 나는 삶과 책을 통해 목회를 한다. 그동안 지은 책으로는 [문명패러독스],[모든 종교는 구라다], [학교시대는 끝났다],[우리아이절대교회보내지마라],[예수의 콤플렉스],[욕도 못하는 세상 무슨 재민겨],[자녀독립만세] 등이 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