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말투도 달랐고 복장도 달랐던 복학생들은 먹는 것도 달랐습니다. 한 해 선배들은 후배들에게 먹고 싶은 것을 먼저 물어보는 예의와 본인들이 결정하더라도 웨스턴 스타일을 선택함으로써 신입생들에게 언제나 인기가 좋았죠. 그런데 복학생들은 막무가내였습니다.

"순대국에 소주 한 잔 해야지?"

생각해 보니 중고등학교 학창 시절에는 좀처럼 먹을 일이 없는 것이 바로 순대국입니다.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 가족의 외식으로는 삼계탕의 고급성에 밀리고 학생들끼리 식사하기에는 '순대국집 포스'가 이를 허용하지 않죠. 너무나 서민적이라고 말들은 하지만 어딘가 중학생 혼자 앉아 있기에는 불안한(?) 그래서 한끼 식사로 '딱'이라는 말은 순전히 어른들만의 생각이라고 치부했습니다.

그런 순대국을 복학생들은 대낮부터 찾았습니다. 전 그들이 소주를 마시기 위해서 핑계를 찾는 알코올 중독자인줄 알았죠. 하지만 신기한 것은 그렇게 낮술을 마셨음에도 불구하고 순대국을 먹었다는 선배는 점심 이후 오후 시간 내내 뭔가 뿌듯한 느낌을 감추질 못했습니다.

마치 굶주렸다가 제대로 식사를 한 표정이랄까요? 강의실 뒷자리에서 "역시 점심은 제대로 먹어야 기분이 좋다니까~", "단백질을 제대로 보충했더니 힘이 솟는 걸~" 등의 점심식사 예찬론이 그들의 입에서 멈추질 않았습니다.

단지 순대국만이 아닌 <순대국>
 단지 순대국만이 아닌 <순대국>
ⓒ 오찬호

관련사진보기


그리고 결국은 그 물에 휩쓸려 순대국을 먹으러 가게 되죠. 순대국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다가 선배에게 끌려 간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입니다. 순대국집에 다른 메뉴가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확인하는 순간 선배들은 '묻지마 주문'을 하고 식사가 나오기 전에 이미 소주잔을 부딪히고 있네요. 반찬이라고는 김치와 깍두기, 그리고 양파와 풋고추 정도가 전부인데 그걸 안주 삼아 말이죠.

순대국이 나왔습니다. 본격적인 '복학생 아우라'는 바로 그때였죠. 대충 소금간을 해서 먹는 것이 아니라 취향에 따라서 이것저것 뿌리고 첨가하는 것이 많았습니다. 그 망설임 없는 손놀림은 후배들의 눈빛에는 아주 신기해 보였죠. 그때서야 앞에 있던 새우젖의 용도를 알게 되었죠. 무작정 선배들을 따라했고 그렇게 순대국, 아니 정확히 말해서 순대국을 먹는 '문화'와 조우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감에 따라 나 역시 그 복학생들처럼, 그리고 그 순대국집에 매료되기 시작했습니다. 얼큰한 것이 먹고 싶을 때, 얼큰한 것과 소주 한잔을 마시고 싶을 때, 얼큰한 것과 소주 한잔, 그리고 솔직한 대화를 누군가와 하고 싶을 때, 혹은 혼자라도 생각에 잠기고 싶을 때,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끼를 좀 제대로 먹었다는 느낌을 원할 때마다 순대국은 늘상 함께 했습니다.

언론에서는 이러한 순대국을 '서민의 음식'이라고, 순대국밥을 '서민의 식당'이라고 말하더라구요. 선거 때마다 후보자들의 단골 방문지이기도 하구요.

2009년 새해 첫날의 순대국

새해 첫 날. 아내와 함께 새해 첫 식사를 하기 위해 순대국집을 찾았습니다. 최근 재료값 상승에 따라 5000원짜리 순대국이 내용이 너무 부실해진 것이 사실이었죠. 그런데 제가 가는 집은 아예 가격을 6000원으로 올려버리고 '먹는 즐거움'은 유지시켜 주고 있습니다. 한끼 식사로 저렴한 편은 결코 아니죠.

이른 시간이지만 순대국을 드시는 분은 무척이나 많았습니다. 목소리만 크고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취중 대화가 곳곳에서 오가고 있었습니다. 단체 손님도 꽤 많았습니다. 복장을 보니 대충 이들이 어디서 오신 분인지 알 듯 했습니다. 해맞이를 다녀 오신 분들이었습니다. 아니면 해맞이에 일맥상통하는 신년행사를 다녀 오신 분들이었습니다.

시간은 오전 10시. 하지만 오후 10시라고 하여도 꽤 '대단한' 소주병들이 그들과 함께 있었죠. 이야기를 살짝 들어보았습니다. 내용은 '새해와 관련된' 것인데 뉘앙스는 약간 달랐습니다.

일반적으로 새해 첫날, 일출을 바라보면서 결심하는 분위기는 진취적, 이상적 그리고 대책없는 몽환적 느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잘 살아보자!(진취적), 돈 벌어보자!(이상적), 나는 잘 될거야!(몽환적)". 뭐 이런 레퍼토리 아닐까요?

하지만 새해 첫날, 순대국집에서는 비관적, 음모론적, 현실순응적 레퍼토리가 핵심입니다. "올해 어떡하나?(비관적), 그 새끼만 아니면 맘 편하겠는데~(음모론적), 그런데 어쩌겠수~ 이렇게 살아야지(현실순응적)" 정도로 그 시끄러운 순대국집을 관통하는 맥락을 정리할 수 있죠.

도덕적 인식론으로는 왜 새해첫날부터 저렇게 '망가지는가'하는 한탄이 가능할 것입니다. 저의 무식한 사고지만 그들의 외모에서 풍기는 느낌이 그다지 '고액 연봉자'도 아니었죠. 뭔가를 이루어내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항상 남을 탓하면서 한잔, 자신이 가장 많이 참았다면서 한잔, 그러니까 자기를 건드리지 말라면서 한잔씩을 하고 있으니 말이죠.

하지만 이러한 느낌은 사실 굉장히 단편적인 것이죠. 물론 그 현장의 프레임을 나누어서 보면 문제가 있죠. 하지만 순대국집 '안'에서의 그 장면은 이상하게도 '어울러져' 있습니다.

일단 그 시끄러운 소음들이 이상하게도 단순한 '큰 소리'로만 들리죠. 그래서 나 역시 '큰 소리'로 대화를 해야하는데, 이게 이상하지 않습니다. 모두를 위해서 서로가 '목소리를 낮추어 주면' 좋겠지만 그건 이곳의 예의(?)가 아닙니다. 옆 테이블을 인정하고 나도 '크게' 말하면 됩니다. 그럼 옆 테이블에서 이쪽을 인정하고 그쪽도 '더 크게' 말하겠죠. 여긴 이 법칙이 한결 편하답니다.

그러면서도 이 분위기가 전혀 무섭지가 않습니다. 갑자기 내가 심장마비가 오면 이 중에 누군가가 반드시 날 도와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다들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사실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공감대가 이러한 생각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건 바로 '살아가는' 이야기입니다. 그 중에서도 '짜증나고 우울하고 분노했던'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죠. 자식 욕하는 앞테이블, 직작 상사 욕하는 옆테이블, 쫄딱망한 사업이야기를 하는 건너편 테이블 모두가 사실은 '우리'의 이야기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우리는 서로가 '듣기 위해' 그렇게 목청을 높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곳이 바로 '순대국집'입니다. 그 안에 순대국이 있죠. 그리고 소주를 통해 순대국 문화가 완성됩니다. 새해첫날이지만, 어딘가에서 올 한해 '경건하게' 살겠다고 다짐한 지 몇 시간이 지나지도 않았지만 여기에 오면 그렇게 소주를 마시고 고함을 질러야 합니다. 그렇게 새해 첫날부터 아내와 전 두 번째 소주를 시켰습니다.

오래전 복학생들은 아마도 '진취적 이상과 헛된 꿈에 사로잡힌 신입생 문화'보다 지극히도 현실적이고 결국은 우리가 머물러야 하는 그 문화에 매료되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서민들의 꿈을 체념시키고 현실을 개혁시키지 못하는 공공의 적 <순대국>.

그런데 그것이 결국 '우리'의 모습인 듯 하네요. 우리의 모습과 '다른' 능력을 요구하는 이 사회의 압력때문인지 여길 찾는 사람은 언제나 고향을 간만에 찾는 느낌으로 순대국과 소주를 주문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http://blog.daum.net/och7896 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태그:#순대, #순대국, #순대국집, #소주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