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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군이 가자시티 남동부 제이툰 마을에서 110명의 팔레스타인인을 한 집에 몰아넣었다. 이스라엘은 하루 뒤 그 집을 폭격하여 30명가량을 숨졌다는 외신 보도가 사실이라면 '전쟁'을 넘어선 '(민간인) 학살'이다. 숨진 이들 중 절반가량은 어린들이었고, 엄마 주검 옆에서 어린아이들은 움츠린 모습으로 있었다. '이스라엘은 냉혈인'이라 해도 이스라엘은 변명할 수 없다.

 

'민간인 학살'과 '냉혈인'이라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그들은 오늘도 '폭격' 여염이 없다. 이 소식을 접하면서 스벤 린드크비스트가 지은 <폭격의 역사>가 생각났다.

 

<폭격의 역사> 스벤 린드크비스트 저ㅣ 김남섭 옮김 ㅣ 한겨레신문사

 

"왜 그들은 습관적으로 국제 분쟁을 해결하고 자국의 이익을 지키는 주요 수단으로 이처럼 폭격에 매달리는가? 그 이유는 분쟁 당시의 정치적, 경제적 상황이 아니라, 제국주의 시대 이후의 지난 세계 분쟁의 역사에서 찾고자 한다. 그리고 비행기가 발명되기 이전 17세기 말 공중으로부터의 폭격이 일부 선구적인 작가들에 의해 처음으로 '상상'되기 시작한 때부터, 20세기 끝자락에 있던 걸프전에 이르기까지 긴 역사를 검토한 뒤 그가 찾아낸 거의 습관화된 폭격의 근본 이유는 언제부터인가 바로 서구인의 머리 속에 깊숙이 박혀 있는 타 인종 특히 비서구인에 대한 경멸감, 즉 인종주의이다." (본문 7쪽 인용)

 

'인종주의'가 눈에 들어온다. 폭격을 밥먹듯 하는 원인 중 하나가 깊이 배여 있는 '인종주의'가 있음을 갈파한 스벤 린드크비스트 말은 팔레스타인을 침공한 이스라엘을 이해할 수 있는 핵심이다. 자신들만 선택받은 거룩한 백성이라는 뿌리깊은 '시오니즘'이 팔레스타인 폭격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폭격의 역사>는 국제법도 인종주의가 내재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프랑스 지배에 항거하기 위하여 시리아에서 1925년에 반란이 있었다. 프랑스는 폭격을 지속하였다. 1000명 이상의 민간인이 희생되었다. 시리아는 전시 법규에서 무방비 도시들에 대한 폭격을 언급하면서 항의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악당들'을 상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구상에는 세 가지 종류의 인간들, 즉 문명인, 야만인, 미개인인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국제법은 문명인들만 완전히 인정한다. 왜 아시아인과 아프리카인들은 일부 사람들, 예를 들어 범죄자, 천치, 혹은 매우 어린 아이들이 권리를 가질 수없듯이, 그와 똑같은 이유로 유럽인들과 동등한 권리를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본문 126쪽 인용)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느낌이다. '하마스'거 로켓 공격을 했다는 이유로 이스라엘은 탱크과 폭격기를 동원하여 쉽새없이 민간인 학살을 자행하고 있다. <폭격의 역사> '폭격' 단순히 전쟁 중에 일어나는 전략, 전술로만 여겼던 것을 비판한다. 폭격은 아군을 위한 단순한 전술이 아니라 자신들과는 다른 인종을 향한 폭격이며, 그들의 상황과 환경, 나이, 성별, 군인과 민간인의 구별은 필요 없다. 그들의 이익만 된다면 폭격을 통하여 그들의 목적한 바를 이루면 그만이다. 폭격은 서구인의 비서구인에 대한 경멸, 곧 인종주의라는 그의 주장은 섬뜩할 정도로 현실이라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폭격이 무엇인지 알고자 하는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전쟁과 평화 : 21세기를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 노암 촘스키 등저 | 삼인 | 2001년

 

<전쟁과 평화>는 인간의 존엄과 인류의 평화를 원하는 18명이 '당대비평과 평화네트워크'가 공동으로 기획한 책이다. 9·11은 분명 미국의 오만함이 나은 결과이다. 

 

2001년 9월 11일 어떤 이는 하루의 지친 일상을 안식하게 위하여 몸을 누이고 있었고, 어떤 이는 하루를 시작하기 위하여 분주히 집을 나서고 있었고, 어떤 이는 열심히 자기의 일을 하고 있었다. 그때 조용한 적막을 깨치는 폭발음은 세계의 눈과 귀를 멈추게 하였다.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세계인이 하나같이 심장의 고동 소리까지 멎어버렸을까? 미국의 중심이 무너졌기 때문일까? 모두 그렇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수단의 화학공장이 공격을 받아 몇 명이 죽었는지, 팔레스타인의 질곡의 삶과 죽음, 니카라과, 파나마, 칠레 등이 경찰국가로 자칭하는 세력에 의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갈 때에는 눈과 귀, 그리고 심장이 멈추는 충격을 받지 않았다. 그들의 죽어간 이유가 미국 중심의 패권주의에 반한 자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부시 미 대통령은 공습을 감행했음을 밝히면서 미국은 평화적인 국가라고 주장했다. 미국이 총애하지 마지않는 외교관 토니 블레어는 부시 대통령의 목소리를 그대로 반영해 우리는 평화적인 국민이라고 뒤따랐다. 며칠 뒤 연방수사국 본부에서 부시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이번 보복 공격은 우리의 소명입니다. 미 합중국이 떠맡아야 하는 소명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자유로운 국가로서, 미움과 폭력, 살인과 사악함을 거부하는 근본적인 가치 위에 세우진 국가가 바로 미국입니다. 우리는 지치지 않고 끝까지 이러한 소명을 다할 것입니다." (본문 35쪽 인용)

 

정의로운 국가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침략한 후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가 미국과 서양의 사상과 종교, 문화에 얼마나 세뇌되었는지 알 수 있다. 종교적인 신념으로는 선악을 구분 지을 수 있다.

 

과연 이슬람은 문명의 적인가? 팔레스타인 청년인 '앤디 클라노'의 말하는 이스라엘과 비교해보자.

 

"이스라엘은 전투기, 헬리콥터, 탱크, 중화기 등을 정기적으로 이용해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공격해 왔다. 이러한 공격은 비밀 결사 조직이 아닌 이스라엘 정부에 의해 수행되었다는 이유로 '테러리즘'이라고 불리지 않고 있다." (본문 인용 102쪽)

 

이슬람의 이름으로 행하지는 온갖 폭탄테러가 비판받아야 마땅한 일이라면 이스라엘이 범하는 행위 역시 비판받아야 한다. 세계는 이스라엘의 반평화적인 행위 반인륜적 행위를 비판하지 않고 있다. 이슬람의 테러집단이 인류의 평화를 위협하는 자들이라면 이스라엘 역시 평화를 위협하는 국가이다.

 

전쟁은 평화, 평화는 전쟁. 이 명제가 평화라는 이름으로만 남기를 우리는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이성을 상실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이성을 다시 되찾기 위하여 미국과 나, 그리고 이슬람을 바로 보는 눈을 가져야 한다. 이제 이성을 찾을 때가 되었다. 힘으로 평화를 이룰 수 없다.

 

<팔레스타인> 조 사코 저/함규진 역 | 글논그림밭(글숲그림나무) | 2002년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 점령지구의 문제들을 공평한 시각에서 그려 무섭고도 감동적인 르포르타주를 보여주고 있다. <팔레스타인>의 사실적 스타일은 어떤 면에서 카메라가 등장하기 전인 빅토리아 시대의 뉴스 매거진에 사용된 목격자 일러스트와 매우 유사하여 보도사진보다 더 강렬하다.(출판사 리뷰)

 

출파사 자화자찬이 아니라 <팔레스타인>에 실린 아홉편 만화를 읽어가다면 웃음 이면 숨겨진 팔레스타인의 고통이 얼마나 깊고, 큰지 알 수 있다. <팔레스타인>을 읽고 이름은 알지만 얼굴을 모르는 이들에게 편지를 썼다.

 

자발리아 난민촌’의 팔레스타인 노인을 만났습니다. 나흘 동안 임신한 아내와 걸었다고 했습니다. 조상들이 살아온 땅과 집은 이제 이스라엘 사람들의 것이 되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만을 생각하다가 팔레스타인을 접하면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와 그들의 사고 자체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그들은 남의 집을 그냥 들어오고, 나가라고 했을까요? 시온주의,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신앙이 남의 것을 빼앗는 것을 정당화시킬 수 없는 것 아닙니까? 저의 사고가 얼마나 왜곡되었고, 경직되었는지 알게 되었지요.

 

‘라말라’ 많이 보았고, 들었던 난민촌입니다. 저는 난민촌의 실상을 잘 모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저의 직접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르마씨. 난민촌의 실상은 어떤지요. 알려줄 수 없는지요. 사람이, 사람이 되는 가장 원초적인 환경은 먹고 자고 마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신을 ‘나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방법은 먹고 자는 것을 방해하는 일입니다. 난민촌이 이런 곳이지요. 더욱 내 나라, 내 조상의 땅, 내 조상의 집에서 이런 경험을 한다면 비참함은 배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올리브 나무가 자녀들의 교육과 먹을거리 문제를 해결해주었는데 그들은 베어 버렸습니다. 생존의 근거와 조국의 미래까지 빼앗는 완악한 행동이었지요.

 

땅을 잃어버린 민족, 나라, 가족은 살아갈 공간이 없기에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특히 자기 것을 빼앗은 강자 앞에 선 자신을 볼 때 얼마나 절망하겠습니까? 자발리아의 사메씨. 당신이 사코씨에게 보여준 난민촌의 실상은 저를 고통스럽게 하였습니다. 사메씨와 사코씨는 한 노인을 만났지요. 그 노인은 한 명의 유대인이 죽었을 때, 팔레스타인 사람은 15명이 죽었다고 했습니다. “내 땅을 떠나던 날은 모든 게 캄캄하기만 했소.” 노인의 말에 저는 절망과 고통이 엄습하였습니다.

 

‘가산씨!’ 사람이 가장 공포를 느끼는 것은 눈을 가리거나, 눈을 감게 하는 것이지요. 얼마나 무서웠습니까? 그들은 무조건 당신이 불법 조직에 가입했다고 우겼습니다. 군인들을 당신을 테러분자로 무조건 낙인 찍어야 했습니다. 우리나라도 그런 때가 있었습니다. ‘빨갱이’ 한 마디면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가산씨 당신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나흘이 지나자 저를 감방에 데려가서 네다섯 시간쯤 자게 해주던군요,…그들은 전에 없이 꽁꽁 묶었죠.” 이스라엘 군인들은 말했습니다. “이제 자고 싶지 않나? 조금 얘기만 하면 돼. 협력을 좀 하라구.”

 

이스라엘은 오늘도 폭격하고 있다. 어린아이를 엄마 주검 옆에서 움츠리게 하는 냉혈인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1991년 말부터 1992년 초까지 이스라엘의 점령지구 팔레스타인에서 한치도 나아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스라엘은 더 잔혹한 모습으로 변했다.

 

이스라엘의 잔혹함을 보면서 문득 떠오른 사람이 있다. 마하트마 간디다. 마하트마 간디가 살았던 시대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침공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차이는 있다. 하지만 어린이를 무참히 죽이는 냉혈인으로 변질되어버린 이스라엘에게 '폭격'은 결코 문제 해결이 될 수 없으며 오직 '비폭력'만이 평화를 가져다준다는 사실을 간디를 통해서 알려주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마하트마 간디> 요게시 차다 지음 | 정영목 옮김 ㅣ한길사

 

"우리는 폭력도, 유혈도, 사람들이 요즘 이해하고 있는 방식의 외교도 채택하지 않습니다. 순수하고 단순하게 진리와 비폭력만 채택했습니다. 무혈 혁명을 이루려는 이러한 시도에 세계의 관심이 쏠리는 것은 당연합니다. 세계는 유혈로 인해 죽을 병이 들었습니다. 세계는 탈출구를 찾고 있습니다. 나는 탈출구를 열망하는 세상에 탈출구를 보여주는 것이 오랜 역사를 가진 인도의 특권일 것이라는 믿음에 자부심을 자기고 있습니다." (본문 538쪽 인용)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팔레스타인, 레바논에서 오늘도 많은 이들이 '정의'와 '평화'의 이름으로 수많은 이들이 죽어가고 있다. 폭력을 휘두르는 자들의 입에서 정의와 평화는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 간디의 이 말이 그들에게는 어떤 뜻일까? 의미일까? 이스라엘은 오늘도 팔레스타인을 폭격하고 있다.

 

비폭력이나는 신념은 자신을 학대하는 것이 될지라도 다른 이를 향한 사랑이었고, 원수라는 인간 본성이 만들어낸 결과물을 용납할 수 없게 한다. 인도로 돌아와서 그가 보여준 사타그라하 운동과 자치운동, 인도 독립을 향한 열정을 무엇으로 담을 수 없는 그릇으로 우뚝 서게 만들었다.

 

비폭력 삶을 치열하게 살아온 그도 결국은 '폭력'의 이름으로 죽었다. 중심에는 종교가 있었다. 종교만큼 평화를 외치는 것도 없지만 종교만큼 폭력적인 것도 없음을 비폭력주의자 간디를 통하여 알 수 있다. 또 지구상에 벌어지는 모든 전쟁의 중심에는 '종교'가 있다. 인류의 비극이 종교에서 싹트고, 잉태되고, 만들어지고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마하트마 간디가 간 길을 우리는 왜 가지 못할까? 그러니 그를 쉽게 말해서는 안 된다. '비폭력주의자'라고, 치열한 비폭력의 삶의 자신의 삶에 적용하지 못한다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서 간디를 입에 담는 것은 간디의 삶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팔레스인에 평화가 빨리 오기를 바란다. 이스라엘은 더 이상 사람을 죽이는 일을 자행해서는 안 된다. 이스라엘은 이미 정당성을 잃었다. 국제사회도 성명서만 발표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전쟁을 포기할 수밖에 없도록 강력한 제재를 가해야 한다. 이 정도는 악의 축은 다른 나라가 아니라 이스라엘이다.

 

 


폭격의 역사 - 끝나지 않는 대량 학살

아라이 신이치 지음, 윤현명.이승혁 옮김, 어문학사(2015)


태그:#팔레스타인, #이스라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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