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대학 1학년 때 처음으로 농활을 떠났다. 내가 한 일은 담배 잎 따기. 뙤약볕 밑에서 숨이 막힐 듯 뜨거운 열기를 참으며 했던 그 일, 농촌 근처에도 살아본 적 없는 내겐 너무 힘겹기만 했다. 그 때 커다란 담배 잎 사이에서 눈물 한 자락 흘리면서 다짐했다. "난 다시는 농활 가지 않을 거야." 대학 졸업할 때까지 결국 그 어리석은 다짐을 지켜냈다.

 

"농사는 너무 힘든 일이다. 농사짓는 사람들이 불쌍하다. 농사짓는 사람들은 바보다." 스무 살 때부터 갖게 된 이 생각들은 늘 나를 짓눌렀다. 조금씩 철이 들면서 '농사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겠기에, 그 짓눌림에서 벗어나고 싶기만 했다. 하지만 방법을 찾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찾을 생각도 없었는지 모르겠다.

 

헌데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던가. 농사에 대해 그토록 천박한 의식을 갖고 있던 내가 그 때보다 십년 좀 넘은 지금, 생각이 많이 바뀐 것 같다. 바로 이 책, <나는 늙은 농부에 미치지 못하네>를 가슴으로 읽고 있는 나를 보면서 절로 그런 생각이 들고 있다.

 

얼마 전, 귀농한 지인들을 만나러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로 질러 며칠 여행을 다녀온 뒤에 책상에 꽂혀 있는 이 책이 눈에 들어왔다. 책상에 모셔둔 지는 좀 되지만, 읽고 싶은 마음이 든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바로 꺼내들어 죽 읽어 가는데, 어쩌면 글 하나하나가 마음에 쏙쏙 들어와 박힌다. 그것도 아주 깊숙이. 

 

"흙을 살리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떤 마음으로 짓는가 하는 그 마음 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농사의 핵심이란 농사를 짓는 그 사람의 의식, 곧 그 마음에 달려 있다는 것이지요. (…) 진정한 풍요란 제 삶을 제가 꾸리는 데서 실현되는 것이라면 그 길은 땅에 뿌리내리는 삶뿐이라 하겠지요."

 

"우리 스스로를 치유해 가는 길, 왜곡된 심신을 치유하는 길은 삶의 뿌리를 다시 생명의 모태인 대지에, 흙을 튼튼히 뿌리박는 일뿐입니다. 그것이 뿌리 뽑혀 시들어 가던 생기를 되찾고 자연을 거스르는 대지와 분리된 문명의 위기와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기 때문입니다. (…) 당신이 땅에 뿌리박으면 온 세계가 함께 뿌리내리는 것입니다."

 

철없던 때 농사짓는 이들을 가엽다 여기던 내가, 어느새 농사야말로 문명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는 말에 동감하는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제대로 된 농사꾼은 '도에 가까운 사람'이라고 하는 글쓴이 생각도 물론이고. '단순한 삶'에 대한 열망이야 스무 살 그 때도 충분히 가졌을 법한데, 그런 삶의 모습조차 '땅'과 '농사'에 연결 지어 바라보는 지금이 어느 때보다 훨씬 또렷해 보인다.  

 

"우리의 필요를 진정한 쓸모에 바탕을 둔다면 그렇게 많이 소유할 필요가 없고 물질적 궁핍 때문에 고통 받지 않아도 됩니다. (…) 단순 소박한 삶, 곧 삶을 단순하게 꾸리는 것이야말로 존재의 풍요를 실현할 수 있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 우리가 쓰고 버리는 삶에 중독되고 왜곡된 삶을 얼마만큼 비우는가에 따라 자연이 주는, 어머니 대지가 주는 선물인 건강과 활력과 풍요를 얼마나 즐길 수 있는가가 결정된다는 것이지요."

 

농사꾼을 안쓰럽게 느끼던 내가 '귀농'을 택한 사람들을 고운 눈으로 바라봤을 리 없다. 편한 도시 생활을 버리고 그저 땅으로 떠난 그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던 시간도 많았으니. 몇 년 전 미국의 생태 귀농자 스코트 니어링이 쓴 <조화로운 삶의 지속>을 읽고 남긴 글을 다시 들춰 보니, 귀농을 바라보는 내 눈이 어떠했는지 훤히 보인다. 

 

"그들이 글로 보여준, 땅에 뿌리박고 사는 모습은 읽는 것만으로도 힘이 들었다. 재미가 없어서? 아니다. 왠지 옥죄임을 당하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 맞는데,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살 수가 있다는 것이지? 도시 문명을 거부하고 어떤 식으로 살아갈 수 있지? 지금, 우리들이…."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귀농이라는 화두를 세상에 처음으로 던졌다는 글쓴이가 실천과 마음으로 풀어낸 '귀농' 이야기들이 마음에 철썩 와 닿은 것은 물론이요, 그렇게 사는 것도 충분히 해볼 만하겠다는, 아니 언젠간 나도 꼭 그렇게 살고 싶다는 강한 욕구마저 불쑥 솟구치니 이게 웬일이란 말인가.

 

"귀농이란 단순한 직업의 전환이 아니라 삶의 전환이라는 것이지요. 뿌리 뽑힌 삶에서 뿌리내리는 삶으로, 자연을 거스르는 삶에서 자연과 조화로운 상생 순환의 삶으로, 소모적이고 파괴적인 삶에서 생산적이고 살리는 삶으로, 의존적인 삶에서 자립적인 삶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귀농은 귀본(歸本)이요, 귀일(歸一)입니다."

 

"삶의 가치관과 생활양식을 바꾸는 그 자체가 이미 하나의 중요한 수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흙에 발을 딛고 자신을 돌아보며 깨어 있는 노력', 이것을 귀농을 통한 수행의 핵심이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 제가 이 시대에 귀농이란 하나의 수행이 아니면 안 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 것은 결국 '노동의 삶과 영적인 삶'을 결합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특히 기억에 남는 건 '생태맹'이라는 표현. 자연 생태계를 떠나서는 사람이 생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현상이 바로 생태맹이며, 그를 극복하기 위해선 농심(農心)을 회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우리 자신이 자연의 요소로 이루어진 존재인 까닭에 자연 없이는 인간이라는 종 자체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인간은 사회적 존재 이전에 자연 생태적 존재임이 분명합니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 대다수가 마치 열탕 속의 개구리같이 자신이 죽어 가고 있다는 위기감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쓰고 버리는 삶의 편리와 풍요라는 환상과 미망에서 아직 깨어나지 못했거나 아니면 위기 상황이 일상화되어 오히려 역설적으로 위기의식이 마비되어 버렸는지도 모릅니다."

 

인간이 생태적 존재라는 말에는 백 번 동감하면서도, 쓰고 버리는 삶의 편리와 풍요가 주는 환상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나이기에 여전히 생태맹 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겠다. 그나마 생태주의 시대의 중심은 깨달음, 곧 정신 가치의 풍요로움에 있다는 글쓴이 말을 듣자면 십몇 년 전보다는 많이 달라진 지금 내 마음 상태가 생태맹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만큼은 갖게 한다.

 

"늙은 농부란 씨를 뿌릴 때와 거둘 때를 알며 하늘과 땅을 섬기고 삼가며 생명을 가꾸는 사람이라고 풀어 볼 수도 있겠습니다. 늙은 농부의 의미가 곧 천지 대자연의 도, 그 이치를 따라 사는 사람인 도인이란 의미로 새롭게 다가옵니다."

 

처음엔 조금 아리송했던 책 제목 <나는 늙은 농부에 미치지 못하네>, 책 끝에 나오는 ‘늙은 농부’의 정의를 읽을 때 즈음엔 그 뜻을 알 것도 같다. '도인'이라는 말에 혹해서 일까, 문득 여러 늙은 농부님들께 간절한 물음을 드려보고 싶다.

 

"저 멀리 팔레스타인에서는 어린 생명들마저 무차별 죽임을 당하고 있습니다. 내가 발 딛고 선 이 땅은 어떻습니까? 현대 공화국 울산에서는 노동자 두 명이 높은 굴뚝 위에서 30일 가까이 먹을거리도 받지 못한 채 죽어가고 있습니다. 바로 최근에는 부당한 철거에 항거하던 죄 없는 철거민 6명이 경찰의 살인 진압으로 ‘정말’ 죽었습니다.

 

천지 대자연의 이치는커녕, 어린 아이라도 비웃을 법한 이 모습을 지켜보는 우리들은 과연 어찌 해야 합니까?  미친 이 세상, 미친 이 정부에 그래도 아직 구원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기는 한 겁니까? 저부터, 아니 우리 모두가 땅에 뿌리내리면 이 미친 풍경을 더는 보지 않을 수 있는 겁니까? 존경하옵는 늙은 농부님, 목불인견으로 치닫는 이 현실을 두고 제발 한 마디만 해 주세요!"


나는 늙은 농부에 미치지 못하네 - 귀농 전도사 이병철의 녹색 에세이

이병철 지음, 이후(2007)


태그:#귀농, #농사, #자연, #땅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글쓰기, 기타 치며 노래하기를 좋아해요. 자연, 문화, 예술, 여성, 노동에 관심이 있습니다. 산골살이 작은 행복을 담은 책 <이렇게 웃고 살아도 되나>를 펴냈어요.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