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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옷 입은 소나무들
 흰옷 입은 소나무들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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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여보! 저 눈발 좀 봐? 눈이 펑펑 쏟아지네,”

설 연휴가 시작된 지난 24일 아침 아내의 호들갑에 이끌려 창가에 나가보니 정말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세차게 흩날리며 쏟아지는 눈발이 세상을 온통 희부연 빛으로 가리고 있었습니다.

“우리 가까운 남한산성으로 눈꽃 산행 어때?”

친구들 몇 명에게 전화를 하고 아침밥 몇 숟갈을 뜨는 둥 마는 둥 배낭을 짊어지고 나섰습니다. 눈발은 여전히 세찼습니다. 그런데 지하철 5호선 마천역에서 내려 밖으로 나서자 상황은 이미 끝나 있었습니다. 길바닥을 약간 덮은 눈에 햇볕이 쨍했기 때문입니다.

눈꽃을 기대하며 혹한 속에 오른 청량산

약수터에 가지런하게 걸려 있는 플라스틱 물바가지들
 약수터에 가지런하게 걸려 있는 플라스틱 물바가지들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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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이 자리 잡고 있는 청량산으로 가는 길에는 등산객들이 많았습니다. 그들도 우리들처럼 눈꽃산행을 기대하며 집을 나섰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눈이 내리지 않는다고 돌아설 수는 없는 일이지요. 산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오늘은 어느 코스로 오를 거야?“
“일장천 샘터길 능선으로 올라 연주봉을 돌아서 내려오도록 하지”

청량산은 등산코스가 매우 많은 산입니다. 산이 그리 높지 않고 주변이 서울의 송파구와 하남시, 광주시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오르는 길도, 내려가는 길도 많을 수밖에 없는 산이지요. 이날은 산성 안 코스는 피하기로 하고 산성 밖을 약간 돌아 내려오기로 한 것입니다.

산길을 오른편으로 돌아가자 각종 운동시설과 맑은 물이 졸졸 흘러내리는 쉼터가 나타납니다. 일장천 샘터인데 먹는 물로 적합하다는 검사 결과가 붙어있는 좋은 샘터입니다. 샘터 옆에는 누군가 물을 받아 마실 수 있도록 가지런하게 걸어 놓은 푸른색 플라스틱 바가지들이 앙증스런 모습입니다. 그 옆에는 온도계도 붙여 놓았는데 살펴보니 섭씨 영하 8도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어, 저기 좋은 운동기구가 있네.”
일행이 반기며 다가간 곳은 철봉대였습니다. 철봉대에는 보기 드문 운동기구 두 개가 걸려 있었지요. 거꾸로 매달리기 기구였습니다. 그런데 일행은 철봉대로 다가가 거꾸로 매달리기 손잡이를 붙잡고 다리를 위로 올려 거꾸로 매달기 기구에 두 발을 끼우려고 했지만 두 번이나 실패하고 돌아섰습니다.

운동기구가 좋다고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철봉대에 걸린 두 개의 거꾸로 매달리기 운동기구
 철봉대에 걸린 두 개의 거꾸로 매달리기 운동기구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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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 힘보다 몸무게가 더 무거웠기 때문입니다. 양팔의 힘으로 몸을 들어 올려 발을 기구에 걸어야 하는데 팔 힘이 몸무게를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그는 빙긋 웃으며 자리로 돌아왔지만 조금은 허탈한 표정입니다.

“거꾸로 매달리는 운동이 몸에 매우 좋다는데 몸이 영 따라주지 않는구먼”
“나이가 들어 그만큼 몸이 무거워졌다는 증거야. 체중 좀 줄이라고”
좋은 운동기구라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운동이 아닙니다. 체력과 자신의 상태에 맞아야 좋은 운동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 춥다, 추워! 빨리 올라가야지"

잠깐 앉아 쉬는 사이 온몸에 추위가 엄습했습니다. 약수터에서 차가운 물 한 모금씩을 마시고 다시 산행을 시작했습니다. 조금 올라가면 능선으로 오르는 산줄기입니다.

산줄기를 따라 왼편으로 오르는 산길 전망이 시원합니다. 서울의 남쪽 지역이 새하얀 모습으로 펼쳐져 있었습니다. 길가와 골짜기에 서있는 앙상한 나무줄기에 하얀 눈이 덮여 있는 모습도 아름답습니다. 마치 하얀 물감을 칠한 것 같은 모습입니다.

능선길은 가팔랐지만 그리 미끄러운 길은 아니었습니다. 아직 눈이 녹지 않아 빙판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맞은편 산위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은 여간 조심스런 모습이 아닙니다. 오르막길보다는 내려가는 길이 위험하기 때문이지요.

30여분 만에 남한산성 성벽 아래 이르렀습니다. 성벽도 하얀 눈으로 칠해져 있었습니다. 그 성벽 아래 길가에 서있는 메마른 갈대꽃에도 하얀 눈이 덮여 목화처럼 포근한 모습입니다. 더구나 성벽 위에서 펄럭이고 있는 수많은 깃발들과 어우러진 모습은 가히 환상적입니다.

능선길가의 흰옷을 입은 나목들
 능선길가의 흰옷을 입은 나목들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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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쿠! 우당탕!”

그때였습니다. 앞서 걷고 있던 거구의 일행이 미끄러지면서 넘어진 것입니다. 깜짝 놀라 다가가보니 다행히 다치지는 않았습니다. 경사가 그리 급하지 않았고 눈 덮인 흙길이었기 때문입니다.

“괜찮아? 어디 아픈 데 없어?”

그래도 걱정이 되어 물어보니 빙긋 웃으며 일어납니다. 양손에 지팡이를 짚고 있었는데도 주변 경치를 살피느라 순간적으로 방심하며 한눈을 팔다가 미끄러져 넘어진 것입니다.

“안되겠어? 아이젠을 신어야지.”

모두들 아이젠을 꺼내 착용했습니다. 걷기가 한결 편안합니다. 미끄럽지 않고 발걸음에 안정감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미리 아이젠을 착용했더라면 넘어지지 않았을 텐데, 태백산 등산 때에 이어 또 한 번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친 셈입니다.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긴 했지만 말입니다.

솜같은 눈옷을 입은 갈대꽃과 성벽 위의 깃발들
 솜같은 눈옷을 입은 갈대꽃과 성벽 위의 깃발들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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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을 끼고 걷는 능선길은 바람이 싸늘했습니다. 금방 귀가 시려 모두들 모자의 귀덮개를 내리고 걸었습니다. 내려다보이는 송파구 일대와 눈 덮인 골프장의 모습도 새하얀 풍경입니다. 잠깐 걷자 북문입니다.

“북문 안으로 들어가 간식도 먹고 정상주도 마셔야지?”

술을 좋아하는 일행은 내가 산행할 때마다 준비해 가지고 가는 복분자 술이 생각났나봅니다. 북문 안으로 들어서자 무언가 달라진 모습입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전에 입장료를 받기 위해 세워져 있던 간이 매표소가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2007년부터 입장료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매표소를 철거한 것입니다.

도립공원 입장료를 받지 않는 남한산성

눈곷 피운 덤불과 성벽
 눈곷 피운 덤불과 성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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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잘한 일이구먼, 이런 대중적인 산에서 입장료를 받는 것도 썩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었거든”
“그건 그려. 매우 잘한 일이지” 

일행들은 입장료를 받지 않는 것이 아주 흡족한 듯 했습니다. 근처 벤치에 앉아 간단한 간식과 정상주를 나눠 마셨습니다. 평상시엔 아주 작은 컵으로 한 모금씩 돌아가는 술이었지만 이날은 두 사람이 줄어 애주가인 한 친구가 대신 석 잔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그래도 한잔한 기분이 드는구먼, 아무래도 석 잔은 마셔야지, 허허허”
모처럼 산 위에서 복분자 술 석 잔을 마신 일행은 기분이 매우 좋아보였습니다. 그러나 낮고 평탄한 산이어서 그렇지 높고 험한 산이었다면 안 될 말입니다.

산 위에서의 음주는 안전에 아주 치명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험한 산에서는 일행들의 숫자가 적을 때에도 주변의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한 잔 이상씩은 마시지 못하게 했었습니다.

북문 안쪽에서 잠깐 쉬고 다시 길을 나섰습니다. 이곳을 찾을 때면 항상 들르던 수어장대도 이날은 들르지 않기로 하고 성 밖으로 나가 연주봉 쪽으로 향했습니다. 성 밖 길은 눈이 제법 쌓인 데다 많은 등산객들이 밟아 미끄러웠지만 아이젠을 착용하고 있어서 문제가 없었지요.

누가 겨울 산봉우리에 산행 안내판을 갖다놓았을까?

능선길에 놓여 있는 재미있는 산행 안내판
 능선길에 놓여 있는 재미있는 산행 안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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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봉에서 바라보는 동쪽 저 멀리 검단산과 예봉산에 떠있는 구름 덩어리가 아련합니다. 연주봉을 내려오는 길은 양지인데다 등산객들이 너무 많아 눈이 거의 녹아버린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능선길 작은 봉우리 위에 여러 사람들이 쉬고 있는 옆에 행선지 안내판이라고 쓰인 아크릴 보드판이 놓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보드판에 써놓은 글들이 지나가는 사람들을 웃기고 있었습니다. “기축년 1월23일 등반‘ 이라고 쓴 글은 평범한 문장이었습니다. 그런데 ’말장 황, 남한산성 등반기념‘ 이건 좀 웃기는 글입니다, 황은 아마 황씨를 가리키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말장 황‘이라니 웃기는 말이지 않습니까?

그 다음 글은 ‘주씨 3형제 등정’ 또 ‘등산 4인방 등산 환영’ 그리고 ‘09,1.28일 예정‘ 이라니 작은 산봉우리에 누가 이런 산행 일정표를 만들어 놓았을까요? 누군가 산 위에 만들어 놓은 산행 일정표가 지나는 등산객들의 웃음을 자아내고 있었습니다.

“어때? 점심 먹고 한 잔 하고 갈거야?”

“아니, 안 돼! 눈꽃산행이 기대돼서 뛰쳐나오긴 했지만 오늘이 어떤 날인데, 빨리 집으로 돌아가 마누라 설빔 준비하는 걸 도와줘야지.”

설을 이틀 앞둔 청량산 등산 후에 술 한 잔 하지 않고 집으로 총총히 돌아가는 일행들의 뒷모습에서 아내와 가족을 사랑하는 소박한 마음이 잔잔히 배어나고 있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유포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청량산, #눈꽃산행, #일장천 약수터, #이승철, #남한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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