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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업급여를 받으려면 2-3주에 한 번씩 정해진 실업인정일에 출석해서, 재취업활동 한 내용을 신고해야 한다. 그 실업인정을 받기 위해 오늘 고용센터에 다녀왔다. 벌써 다섯 번째 가는 길. 이젠 많이 익숙해진 공간이지만, 맨 처음 고용센터에 갈 때만해도 얼마나 주눅이 들던지.

실업급여 받아본 사람들이 한 번씩 들려준 이야기들은 나를 한층 더 움츠러들게 만들었으니.

"너도 한 번 가봐라, 기분 엄청 씁쓸해. 꼬박꼬박 취업활동 신고할 때는 어떻고. 마땅한 자리도 없는데 할 수 없이 몇 군데 신청해서 가져가긴 하지만, 꼭 그래야 하는 건지…."

실업급여를 받으려면 2-3주에 한 번씩 정해진 실업인정일에 출석해서, 재취업활동 한 사실을 신고해야 한다. 취업희망카드에 그 내용이 차근차근 기록된다.
▲ 백수의 임시 희망카드, 실업급여 실업급여를 받으려면 2-3주에 한 번씩 정해진 실업인정일에 출석해서, 재취업활동 한 사실을 신고해야 한다. 취업희망카드에 그 내용이 차근차근 기록된다.
ⓒ 조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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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주눅 든 상태로 지난해 10월 말, 실업급여 설명회 장소에 처음으로 갔을 때 깜짝 놀랐다. 강당을 꽉 채운 사람들을 보고 한 번 놀라고, 나이 많은 어르신들이 너무 많아서 두 번 놀랐다. 생각지도 못했던 걱정마저 밀려올 정도였다.

"날마다 하는 설명회이니 오늘따라 사람이 많은 건 아닐 테지? 나랑 가까운 곳에 사는 사람들 중에도 실업자가 이렇게 많다는 거잖아. 저 나이 많은 분들은 과연 재취업 하실 수 있을까? 취업 안 되면 당장 먹고 살 일이 버거운 분들이면 어떡하지?" 

내 코가 석자 인 줄 알았더니, 석자는커녕 한 자도 안 되는 것만 같았다. 아직 젊고, 회사 다닌 경력도 좀 되고, 부양가족마저 없는 내 처지는 너무 태평스러워 보이기까지 했으니. 더구나 실업급여는 고용보험에 가입한 사업장에서 일한 사람만 받을 수 있다고 하니, 이마저도 받을 수 없는 곳에 다니는 분들은 또 어찌해야 하는지…. 설명회를 듣고 나오는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내 처지와 다른 사람들 처지가 겹쳐지니 서러운 마음마저 들었다.

"사람들 말 딱 맞네. 기분 진짜 별로군. 에고 여길 계속 와야 하다니 이를 어째…."

센터 안 곳곳에는 취업 희망자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알리는 홍보지가 놓여 있다. 가져가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듯 하지만.
▲ 고용센터 안 풍경 센터 안 곳곳에는 취업 희망자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알리는 홍보지가 놓여 있다. 가져가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듯 하지만.
ⓒ 조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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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앞에서, 그것도 혼자 있을 땐 아직까진 '감히' 담배 필 용기를 못 내는 나였지만(펴보면 안다, 그런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아니 째려보는 사람들 여전히 많다는 걸.) 그날만큼은 고용센터 건물 앞에서 담배 한 대를 물었다. 누구든 건들기만 하면, "저 실업자라고요! 건들지 마요!"하고 받아쳐줄 마음에. 다행히 아무도 안 건드리더라. 그 뒤론 실업상담 받고 나올 때마다 꼭 한 대씩 피워준다.

실업인정 상담은 동네  별로 한 분이 맡아서 죽 해주신다. 처음 상담을 받으러 가던 날도 주눅 들긴 마찬가지였다. 일대 일로 이야기를 나눠야 하기에 부담도 한 가득이었고. 특히 나는 공무원에 대해 편견 비슷한 생각도 갖고 있거든. 바로 '공무원은 친절하지 않다'는, 실제로 겪으면서 갖게 된 생각. 그런데 오늘부터 조금 바뀔 것도 같다. 고용센터에서 만난 한 사람 덕분에.

나한테 상담을 해주시는 남자 분, 뜻밖에도 많이 친절했다. 내 편견이 오죽 강했으면, 그 친절함이 처음엔 어찌나 어색하던지. 하지만 어색함은 잠시, 곧바로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그 편안함 덕에 그 뒤로 고용센터 가는 발걸음은 많이 가벼워졌다.

오늘은 사람이 많아서 내 차례가 오기까지 40분 정도를 기다리면서 잡지를 봤다. 용산 사건을 집중 분석한 기사를 보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던 것 까지는 좋았는데, 안 그래도 고용센터에만 오면 작아지는 내 마음, 분노와 안타까움까지 더해져 많이 우울해졌다.

전에는 일일이 사람 이름을 불렀는데, 은행처럼 번호표 뽑는 시스템을 최근에 갖췄나보다. 지난번 방문 때만 해도 못 본 장면이다. 나는 저 6번 창구에서 무척 친절한 남자 상담원과 죽 만나고 있다.
▲ 너무 친절해서 오히려 놀란 고용센터 상담원 전에는 일일이 사람 이름을 불렀는데, 은행처럼 번호표 뽑는 시스템을 최근에 갖췄나보다. 지난번 방문 때만 해도 못 본 장면이다. 나는 저 6번 창구에서 무척 친절한 남자 상담원과 죽 만나고 있다.
ⓒ 조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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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내 차례는 왔고, '실업'보다는 '용산' 기사 때문에 기운이 빠져서 힘없는 목소리로 인사를 드렸건만 돌아온 건 웃음 띤 물음. "설 명절은 잘 지내셨어요?" 상냥한 목소리만으로도 우울한 마음이 많이 풀어졌다.

"2월에 구직신청 열심히 해보세요. 설 앞뒤로 회사를 옮긴 사람이 많아서 다른 때보다는 자리가 좀 있을 거에요. 이번엔 시간 넉넉히 드릴 테니까요, 여기저기 두루 알아보세요."

"그래요? 그런데 제가 원하는 직종도 자리가 있을까요? 시간이 벌써 많이 흘러서 조만간 타협을 해야 할 지도 모르겠어요. 제가 원하는 직종에 대해서요." 

내 말이 끝나자마자 돌아온 대답은, 감동스러울 만큼 내 마음을 울렸다.  

"타협하더라도 버릴 수 있는 거랑 절대 버릴 수 없는 거 사이에 균형은 꼭 지키세요. 아무리 급하셔도 포기할 수 없는 것까지 놓으시면 안돼요. 하고 싶은 일을 하셔야죠."

부드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해주는 저 말을 듣는 순간, 상담하시는 분이 내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착각마저 들었다. 진심이 느껴지는 따뜻한 그 말이 정말 소중하게 다가왔다. 지금 나한테 꼭 필요한 말이었으니까.

"좋은 말씀 정말 고맙습니다. 그렇게 해볼 게요." 두 번이나 고마운 마음을 전해드렸다. 그리고 형식이 아닌, 진심을 담은 새해 인사도 마저 드렸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렇게 상담을 마치고 돌아서는 마음이 참 행복했다. 다른 때 같으면 상담 끝나자마자 급히 고용센터를 빠져나가곤 했는데 오늘은 배시시 웃으며 센터 안 여기저기를 둘러 볼 여유도 생겼다. 

직업 종류와 종사자 수가 죽 적혀 있는 직업 지도를 보니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는 그 말이 딱 실감난다.
▲ 세상은 넓고 할 일은 정말 많을까? 직업 종류와 종사자 수가 죽 적혀 있는 직업 지도를 보니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는 그 말이 딱 실감난다.
ⓒ 조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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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벽에 붙은 '직업 지도' 포스터를 보았다. 직업 종류와 종사자 수가 죽 적혀 있다. 10년 가까이 회사는 달라도 '한 직종'이랄 수 있는 곳에서 일해 온 나, 다른 직종에 관심 가져본 적 별로 없는데 직업지도를 보니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는 그 말이 딱 실감난다. 내가 일했던 직종과 다른 직종들을 물끄러미 보는 중에 아까 들은 말이 떠오른다.
"이 많은 직업 가운데 내가 버릴 수 있는 것과 절대 버릴 수 없는 것 사이에 놓인 일은 과연 무엇일까?" 

실업자 되고나서 딱 한 번,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 회사가 있기는 했다. 바로 '홈플러스'다. 이랜드 파업 투쟁이 끝나갈 무렵, 누구보다 정이 많이 들었던 홈플러스 노래패 '비상' 언니들이랑 술 먹는 자리에서 한 언니가 아쉬워하는 나를 위로한답시고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혜원이 백수잖아, 우리 회사 들어와. 같이 일하자. 그럼 계속 얼굴 볼 수 있잖아." 그랬더니 다른 언니들도 맞장구 쳐가며, "그럼 되겠네. 그런데 회사가 받아줄라나? 혜원이 쟤 엄청 덜렁대서 말이야.^^"

그 이야기를 듣고 나서, 진지하게 고민을 좀 했다. 정든 언니들이랑 계속 만나고 싶은 마음 하나에다가,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그 말을 나부터 몸으로 실천해 보고 싶다는 다듬어지지 않은 욕심까지 더해진 고민이었다. 하지만 내 결론은 아직은 아니다, 였다.

부끄러워도 솔직히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4년재 대학을 나와서 주로 책상 앞에 앉아 일을 했던 나는 판매원이나 계산원을 내 직업으로 생각해 본 적, 한 번도 없었다. 적어도 이랜드 언니들을 만나기 전까지는. 생각은커녕, 상상조차 해보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말은, 여전히 머리에서만 맴돌 뿐이었다. 나한테 '노동자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는 게' 무언지 알려준, 내겐 누구보다 아름답고 멋지게만 보였던 이랜드 조합원 언니들. 그 언니들이 500일 넘게 싸워서라도 꼭 지켜내고 싶었던  그 일은, 나한테 여전히 피하고 싶은 대상이었던 거다.

직업을 두고 나와 우리들이 갖고 있는 천박한 의식은, 아마 많은 부분 '학벌사회'가 키워주었을 거다. '대학까지나 나와서 어쩌고~.' 실업자가 넘쳐나는 지금 세상에도 여전히 먹히는 말이니까.
▲ 직업에 귀천을 만드는 데 큰 몫을 하는 학벌사회 직업을 두고 나와 우리들이 갖고 있는 천박한 의식은, 아마 많은 부분 '학벌사회'가 키워주었을 거다. '대학까지나 나와서 어쩌고~.' 실업자가 넘쳐나는 지금 세상에도 여전히 먹히는 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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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상담하면서 들었던 그 말을 다시 한 번 떠올려 본다.

"버릴 수 있는 것과 절대 버릴 수 없는 것."

'머리보다 몸을 많이 쓰는 일은 천하다는 천박한 노동 의식.' 이건 내가 버릴 수 있는, 아니 꼭 버려야만 하는 생각일 것이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 직업에 따라 노동의 가치가 달라질 수는 없다. 모든 노동은 아름답고 소중하다.' 이건 내가 절대 버릴 수 없는, 아니 버려서는 안 되는 생각일 것이다.

집에 돌아와 몇 달 전에 사 놓고 아직 열어보지 못한 책, <학벌사회>를 꺼냈다. 전에 김상봉 교수님 강연을 듣고 마음에 와 닿는 말씀이 많아서 산 책이다. 교수님은 그 때 이런 말씀을 하셨다.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모든 문제들은 학벌을 중시하는 사회 풍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직업을 두고 나와 우리들이 갖고 있는 천박한 의식은, 아마 많은 부분 '학벌사회'가 키워주었을 거다. '대학까지나 나와서 어쩌고~.' 실업자가 넘쳐나는 지금 세상에도 여전히 먹히는 말이니까. 목수건 변호사건 그 노동에 대하여 같은 돈을 받고, 같이 존중받는 세상이 되는 길에 학벌사회가 심각한 장애물이라는 걸 강연을 들으며 깨달을 수 있었다.

'사회적 주체성에 대한 철학적 탐구'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적당히 두꺼워 읽을 엄두가 안 났던 이 책, 오늘은 꼭 읽고야 말겠다는 생각이 제대로 들고 있다. 저 책을 읽고나면, '버릴 수 있는 것과 절대 버릴 수 없는 것' 사이에 놓인 직업들이 좀 더 많아지려나? 만약 그렇게 된다면 저 책 부제를 내 맘대로 살짝만 바꿔 보고 싶다. '노동자의 주체성에 대한 철학적 탐구'라고.

일수도장 같아서 보기 싫던 취업희망카드, 오늘 만큼은 싫지 않다. 취업희망카드 빈 칸이 하나하나 채워질수록 내 마음도 무엇으로든 하나하나 채워지고 있는 것만 같아서.
▲ 취업희망카드에 진짜 희망을 담아 일수도장 같아서 보기 싫던 취업희망카드, 오늘 만큼은 싫지 않다. 취업희망카드 빈 칸이 하나하나 채워질수록 내 마음도 무엇으로든 하나하나 채워지고 있는 것만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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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초에 여섯 번째로 실업인정 상담을 받으러 가야 한다. 처음엔 일수도장 같아서 보기 싫던 취업희망카드, 오늘 만큼은 싫지 않다. 취업희망카드 빈 칸이 하나하나 채워질수록 내 마음도 무엇으로든 하나하나 채워지고 있는 것만 같아서. 

빈 칸을 꼬박꼬박 손 글씨로 채워주고 있는 고용센터에서 만난 상담원. 공무원에 대한 내 편견도 없애주고, 나아가 '용산의 아픔'마저 잠시 잊게 할 만큼 큰 행복을 안겨 준 보답으로 다음에 갈 땐 음료수라도 하나 사들고 가보련다. 목에 좋다는 홀스도 추가해 볼까나?

지난번 갈 때만 해도 없던, 번호표 뽑는 기계가 생긴 걸 보고는 "시스템 새로 만들었나 봐요. 그 동안 일일이 목소리로 사람 이름 부르는 거 보면서, 안 그래도 힘들겠단 생각 했어요. 이제라도 만들어서 다행이에요" 하고 한 말씀 드렸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돌아온 하소연이 생각나서다. 

"그 동안 정말 힘들었죠. 그래도 목은 계속 아파요. 하루 종일 말해야 되니까요."


태그:#실업급여, #취업, #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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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기타 치며 노래하기를 좋아해요. 자연, 문화, 예술, 여성, 노동에 관심이 있습니다. 산골살이 작은 행복을 담은 책 <이렇게 웃고 살아도 되나>를 펴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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