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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에선 가르치지 않더라도 스스로 배움이 되지요. 더군다나 문화 유적지에선 더할 나위 없겠지요.

 

백제 도성이었던 부여 여행 필수 코스인 낙화암은 부소산 내에 위치해 있던 터라 자연히 부소산성을 둘러보게 되었습니다. 이곳에서 백제의 숨결을 느끼기에 충분했습니다.

 

 

백제 도읍 사비 방어의 중심을 이뤘던 '부소산성'

 

'부소산성'(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5호)은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구아리, 구교리 윌원에 걸쳐 있는 백제 토성(土城)입니다. 부소산성은 백제 도읍 사비의 중심을 이룬 산성으로 도성을 방어하는 핵심시설이었지요. 이 성은 백제가 웅진(지금의 공주)에서 사비(부여)로 도읍을 옮긴 서기 538년 이전에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답니다.

 

산성 내에는 군량미를 보관했던 군창터. 백마강에 잠기는 달을 보며 국정을 정리했던 송월대에 세운 '사자루'. 백제시대 군인 움막인 '수혈병영제', 망루로 추정되는 '반월루', 백제 말 3충신인 성충, 흥수, 계백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삼충사' 등이 있습니다.

 

'삼충사'(문화재자료 제115호)는 백제의 충신이었던 성충ㆍ흥수ㆍ계백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입니다. 성충은 백제 의자왕(재위 641∼660) 때 충신으로, 좌평으로 있으면서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기 위해 애쓰다 옥중에서 단식을 하다 죽었다 합니다.

 

알다시피 흥수는 의자왕 20년(660) 나당연합군이 공격해 오자 탄현을 지키다가 대신들의 반대로 지키지 못하였고, 계백은 결사대 5000여명을 뽑아 지금의 연산인 황산에서 싸우다 전사하였던 충신이었지요. 이곳에선 매해 10월 백제문화재 때 삼충제를 지낸다 하니 세월이 흐른 뒤에도 충신은 언제나 대접받나 봅니다.

 

 

서민적 소탈함과 차분함을 간직한 부여 

 

부소산성에서 뺄 수 없는 게 백제 왕과 귀족들이 해를 맞으며, 국정을 논했던 '영일루'(문화재자료 제101호)지요. 이곳은 원래 부소산 동쪽 산봉우리에 있는 영일대가 있어 계룡산 연천봉에서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던 곳이라 전합니다. 그러다 1064년 홍산에 있는 조선시대 관아문을 옮겨 세우면서 영일루라 칭했다 합니다.

 

백제 도성이었던 부여를 다니면서 신라 도성 경주와는 또 다른 느낌입니다. 경주가 귀족적인 화려함과 역동성을 자랑한다면, 부여는 서민적인 소탈함과 차분함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어쩌면 '패자는 말이 없다'고, 주류로 올라서지 못한 백제의 흥망(興亡)과 관련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역으로 이게 부여의 장점일 것입니다. 꾸밈없는 소탈함이 곳곳에 묻어 있어 나름 좋았습니다.

 

물론 무성한 나무도 좋았지요. 단지, 아쉬움을 하나 들자면 너무 자연스러운 나머지 외과수술이 필요한 고목까지 군데군데 그대로 방치되고 있어 안타까웠을 따름입니다. 이에 대한 조치가 필요하겠지요?  

 

덧붙이는 글 | 다음 블로거뉴스와 SBS U포터에도 송고합니다.


태그:#부여, #부소산성, #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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