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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항공기 폭파범 김현희씨가 11일 오전 부산 벡스코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대한항공기 폭파범 김현희씨가 11일 오전 부산 벡스코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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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오전, KAL 858기 희생자 유가족회 차옥정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일흔 살이 넘었는데도 차 회장의 목소리는 나이보다 훨씬 젊었다. 그의 남편 박명규(공사6기·사고 당시 53살)씨는 대체 승무원 기장으로 KAL 858기에 탔다가 사망했다.

"어제 김현희씨가 기자회견을 했는데 어떤 생각이 드셨는지요?"

기자 생활하면서 제일 싫은 게 이런 일이다. 20년 넘은 상처마저 취재 대상으로 삼아 또 다시 후벼파야 하다니….

"죽을 맛"이라는 짧은 답변이 돌아왔다.

김씨가 기자회견을 마친 어제 오후 내내 차씨의 휴대폰은 꺼져 있었다.

"어제는 휴대폰이 꺼져 있던데요."
"정말 아무 말 하고 싶지 않았어요. 수십 년 똑같은 말을 해야 하니…. 정부에서 쇼를 하는데 우리가 막을 힘도 없고…."

대화를 나누던 중 차 회장은 이런 말을 했다.

"어제 김현희가 이북 억양을 썼다고 하던데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와요. 1990년대 초반 김현희가 서울 한 교회에서 영웅 대접 받으며 간증을 했어요. 당시 유가족들이 교회 신도인 것처럼 참석했다가 간증 끝나자마자 김현희를 덮쳐 따진 적이 있습니다. 김현희의 간증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들었는데 이북 억양 전혀 없었어요. 표준말 썼습니다. 그런데 한국에 온 지 22년이 넘었는데 이제 와서 이북 말이라니요?"

전화를 끊으면서 한마디 했다.

"그런데 일흔 살이 넘으셨는데(74살) 목소리는 너무나 젊으시네요."
"진상 규명을 해야 늙죠."

"20년 전 표준말 쓰던 김현희, 이제 와서 북한 억양이라니"

11일 김씨는 북한에 납치되어 그에게 일본어를 가르친 것으로 알려진 다구치 야에코씨의 가족을 만났다. 그는 가족들에게 허리를 90도 굽혀 연신 인사를 했고, 다구치씨의 아들 이즈카 고이치로씨를 포옹하며 울먹였다.

그 장면을 보면서 의문이 들었다.

'김씨가 진짜 폭파범이 맞다면 진작에 유가족들을 만나 눈물 흘리며 사죄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12일 <동아일보>에는 사고 당시 사망한 김상만(당시 40살)씨의 아들인 김재영 기자의 글이 실렸다. 김 기자는 현재 <동아일보> 국제부 소속이다. 그는 자신이 초등학교 5학년 때 한 줌의 재도 남기지 못하고 하늘로 떠난 아버지를 그리워하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

오늘 TV로 김현희를 보았습니다. 북한에 납치된 일본인 다구치 야에코씨 가족을 만났네요. 출근 전이던 저와 함께 TV를 지켜보던 어머니의 눈가가 붉어졌습니다. 새까맣게 타 버려 재만 남은 줄 알았는데 아직도 눈물이 남았나 봅니다.

저는 직접 김현희를 본 적은 없지만 어머니는 20년 전 법정에서 딱 한 번 봤다고 하시네요. 가슴에 피멍이 들게 한 장본인을, 어머니는 20년 만에 어이없게도 TV를 통해 다시 봤습니다.

착잡했습니다. 납북 일본인 문제만 부각되면서 이 비극이 국민들의 기억에서 사라지는 것은 아닌가 걱정도 됐습니다. '12년 만에 공개석상에 나온 그가 처음으로 만나야 할 사람은 희생자 가족이 아니었을까. 비록 유가족들을 위해 조용히 살려고 했다고 말했지만, 첫마디는 나는 가짜가 아니다가 아니라 희생자에 대한 애도였어야 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해 봅니다.

11일 기자회견 때 "숱한 의혹이 계속 제기되고 있는데 과거사정리를위한진실화해위원회의 재조사에 임할 생각이 있는지, 유가족 면담 의향은?"이라는 질문이 나왔다. 이에 대해 김씨는 이렇게 답했다.

"분명히 말하고 싶은 것은 KAL기 사건은 북이 한 테러이고 저는 가짜가 아니다. 저는 유가족이 KAL기 사건이 북한이 한 테러사건으로 인정하고 어떤 다른 목적이 없다면 그들의 요구에 응할 수 있다."

115명을 죽인 테러범이라면 유가족들에게 먼저 눈물로 사죄하는 것이 도리일 텐데, 지난 20여 년 동안 사죄는커녕 단 한 번도 만나주지 않았던 김씨가 이제는 조건까지 내건다. 거꾸로 김씨가 진작 유가족들을 만나서 사죄하고 해명했다면 되레 논란은 일찌감치 정리됐을 수도 있다. 가해자가 피해자와 그 가족들에게 적반하장격 태도를 보이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화성 연쇄살인범이 자수한들 사면 받을 수 있을까?

김현희씨가 11일 부산 벡스코에서 일본인 납북 피해자 다구치 야에코의 아들 이즈카 고이치로의 팔짱을 끼고 기자회견장에 들어서고 있다.
 김현희씨가 11일 부산 벡스코에서 일본인 납북 피해자 다구치 야에코의 아들 이즈카 고이치로의 팔짱을 끼고 기자회견장에 들어서고 있다.
ⓒ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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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는 그와 직접적 연관이 없던 일본인 납치 피해자의 가족을 만나 눈물까지 보였고 자리를 의식해서인지 위아래를 모두 검은색 옷으로 입었다. 제3국인의 불행한 운명에 이리도 가슴 아파하는 김씨가 자신의 손에 아무 죄도 없이 죽어간 115명과 그 유가족들에게는 왜 이리 냉정한지 모르겠다.

유가족들의 김현희 면담 요구는 깔아뭉개는 정부가 일본인 납치 피해자들의 요구에는 순순히 응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차 회장은 이날 아침 전화통화에서 "우리가 일본 식민지냐? 일본 말은 이렇게 잘 들으면서… 정말 스트레스 받는다"고 비판했다.

솔로몬 왕의 재판 얘기는 누구나 안다. 두 여인이 한 아기를 들고 찾아와 서로 자기 자식이라고 우기자 왕은 칼로 두 동강을 내 나눠주라고 했다. 한 여인은 그렇게 하자고 했고 다른 여인은 눈물을 흘리며 저 여인에게 아기를 주라고 했다. 후자가 진짜 엄마다.

KAL 858기 사건 실체는 아직도 논란이 많다. 그러나 개인적인 큰 의문 가운데 하나는 김씨가 사형 판결을 받은 지 불과 16일 만에 사면받은 것이다. 김씨는 1990년 3월 27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됐는데, 불과 16일 만인 4월 12일 특별 사면 조치를 받았다.

당시 한국은 한 해 수십 명의 사형수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던 때였다. 이른바 '자생적 좌익 사범'들은 실질적 행동이 아닌 국가 전복을 모의했다는 혐의만으로도 사형이 선고됐다. 그런데 115명을 죽인 테러범이 죄를 뉘우쳤고 북한 정권의 도구로 이용됐다는 이유만으로 그토록 쉽게 감형도 아닌 사면까지 받았던 이유를 납득할 수 없다.

21명을 살해한 희대의 연쇄 살인범 유영철이 죄를 뉘우치고 경찰이 몰랐던 사건을 자백했다고, 그리고 혹시 그 누군가의 사주를 받아 그런 흉악 범죄를 저질렀다고 한들 사형수에서 무기수가 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아직도 잡히지 않고 있는 화성 연쇄살인범이 자수하고 죄를 뉘우친들 그에게 사면이 내려질까? 그런 흉악범의 희생자들은 유골이라도 발견됐지만 KAL 858기 희생자들은 한 줌 재도 찾지 못했다.

11일 김씨의 기자회견은 대단했다. 취재진이 최소 200명 정도는 몰려왔는데 120~130명 정도는 일본 기자들이었다고 한다. 숫자를 파악할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보안 요원들이 동원되어 엄격한 검색을 했다.

장소는 부산벡스코 202호실. 취재진을 위한 고정 좌석만 60~70석이 마련됐다. 김씨는 47살인 나이에 비해 훨씬 젊어 보이는 짧은 커트 머리를 했다.

일본의 한국 관련 뉴스 가운데 첫 번째로 취급되는 게 일본인 납치 문제와 북한 소식이다. 형식으로 보나 소재로 보나, 그리고 일본인 피랍 가족을 만나 포옹하며 눈물까지 흘리는 연기력(?)으로 보나 김씨의 이날 회견은 '거물급 (정치) 한류 스타'의 일본 진출 선언 기자회견 같았다.


태그:#김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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