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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지나도 또렷한 기억이 있다. 아니 갈수록 또렷해지며 가슴에 새겨지는 기억이 있다. 어릴 적 온 동네가 제삿날이던 1월초, 어른들은 수군수군 올레 밖에 인기척이 있는지를 살피며 작년에 했던 이야기를 이어갔다. 매해 듣는 이야기지만, 다른 데 가서 이런 얘기하지 말라는 다짐은 역시 매번 똑같았다.

이야기 속에는 죽창에 잔혹하게 목숨을 잃은 강씨, 송씨, 오씨, 김씨, 홍씨, 고씨 집안의 스무 명이 넘는 누구누구의 이름이 거론됐다. 그들은 왜정 때 일본군이 쓰던 폭약인 던지기약으로 고기를 잡았다는 이유로 서북청년단에 질질 끌려갔다가 일출봉 아래 '우뭇개'에서 학살된 후 가마니에 둘둘 말려 지게에 뉘여 돌아온 이도 있었고, 바닷가에 둥둥 떠 있다가 형체를 알 수 없을 지경으로 흐물흐물해진 상태로 마을 사람들에 의해 건져진 이도 있었다.

그 잔혹한 학살터였던 성산일출봉이 지금은 유네스코 지정 세계자연유산이 되었고, 누구나 아는 관광지가 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백발 어르신들의 기억이 흐물흐물 해질 무렵이면, 일출봉 아래에서의 그 잔혹한 학살의 기억은 잊혀지고, 유명 관광지로만 남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어릴 적부터 들어왔던 4.3에 대한 기억은 아름다운 땅 제주의 또 다른 모습인데, 해마다 4월이 가까워 오면 가슴앓이를 하게 된다. 그러한 기억 속에서 제주의 오늘과 내일을 이어주는 돌담을 보며 치열한 삶을 살았던, 또한 여전히 살고 있는 이들의 모습을 시로 그리고 싶어졌다.

제주에선 돌담을 바람그물이라 부른다. 그물에 고기가 걸리듯, 바람그물에도 오랜 세월 질곡의 역사를 살아왔던 이들의 기쁨과 슬픔이 걸려 있을 것이다. 숱한 세월을 같은 자리를 지켜왔던 돌담은 피비린내 나는 역사의 현장을 목격했고, 그 자리에서 울음을 삭이던 이들의 통곡도 들었을 거라는 생각을 해 본다. 반백년 전 그 돌담 뒤에 서서 벌벌 떨며 죽창과 총에 피를 흘리며 끌려가는 동네 어른들을 보았던 소년은 지금 하르방이 되었다.

바람.돌의 섬, 제주
▲ 제주 바람.돌의 섬, 제주
ⓒ 고기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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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돌담 옆에서 지금은 물질도 그만 둔 할망이 신혼여행인지 어떤 목적으로 왔는지 모르지만, 생긋거리며 유채밭에 들어가는 관광객들을 상대로 커피를 팔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역사는 기억하는 자에게 의미가 있는 법이다. 아픈 기억을 기억함으로 상처에 생채기를 더하고자 함이 아니라, 상처를 아물게 할 힘을 찾기 위해서라도 기억해야 한다.

세월 - 돌담의 기억

일출봉 앞 양어장 건너
하르방 집 돌담은 골다공증을 세월따라 앓았다
가는 귀 먹은 하르방 귀 기울여 듣는다
돌담 아래에 숨죽인 소리를
돌담은
피바람에도 강단있게 버텨 무너지지 않더니
몸뚱아리 숭숭 바람그물되어
곰삵은 소리를 붙잡아 놨다
세월 꼭꼭 눌러
키 낮은 담쟁이로 요망지게 엮은
돌담에선
그렁그렁 눈물 소리되어 흐르고
칼바람이 들어서던
돌담 트멍에 세상이 담긴다
도튼 에엄에 궁상맞은 커피포트가 놓였다
사진에 담긴다 육지 것들의 발칙함이
달라진 거라곤 도튼 자리가 조금 넓어졌다는 것 뿐
현무암 돌담 아래 바람 피한 할망은
그래도 '이어도 사나~'
백발 하르방 반 백년 넘은 기억마저
바람그물에 퍼덕이는 사월

1) 요망지게: 아주 야무지게
2) 트멍: 틈새, 구멍
3) 도트다: (진출입을 위해) 돌담을 헐다
4) 에엄: 옆
5) 할망: 할머니


태그:#4.3, #일출봉, #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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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편견 없는 세상, 상식과 논리적인 대화가 가능한 세상, 함께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사) '모두를 위한 이주인권문화센터'(부설 용인이주노동자쉼터) 이사장, 이주인권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 『내 생애 단 한 번, 가슴 뛰는 삶을 살아도 좋다』, 공저 『다르지만 평등한 이주민 인권 길라잡이, 다문화인권교육 기본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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