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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치민의 아침

 

창밖으로부터 쏟아지는 눈부신 햇살에 게슴츠레 눈을 뜬다. 그리고 혼자 읊조려 보는 "굿모닝 베트남"

 

영화 <굿모닝 베트남>은 <플래툰>과 함께 베트남전과 관련된 나의 생각에 큰 영향을 주었던 작품이다. 아주 어렸을 때 보았던 영화지만 로빈 윌리엄스의 힘찬 아침 인사와, 루이 암스트롱의 'What A Wonderful World'를 배경음악으로 했던 전쟁의 잔인한 장면을 나는 아직 기억한다. 아름다운 선율과 가사에 어울리지 않는 참혹한 전쟁의 역설이 충격적이었던 바로 그 영화.

 

어쨌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창밖을 내다본다. 호텔 저 너머로는 사이공 강이 흘렀고 바로 밑의 길에는 어젯밤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오토바이들과 차들이 뒤섞여 바쁜 풍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그 어떤 신호도 전혀 없는 그들의 교통체계. 도대체 이와 같은 환경 속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살고 얼마나 많은 사고가 일어나고 있는지.

 

 

사이공 강에는 많은 배들이 떠다니고 있었는데, 한국에서의 업무가 업무인지라 주로 벌크선이 눈에 띄었다. 목재와 석탄을 실은 많은 선박들. 그러나 정작 가장 나의 눈길을 끈 건 그 수많은 벌크선 사이로 끊임없이 저쪽 강변과 이쪽 강변을 왔다 갔다 하며 많은 수의 사람들을 쏟아내는 여객선이었다. 무엇 때문에 저리도 많은 사람들이 배를 이용하는 거지?

 

그러고 보니 교각이 보이지 않았다. 물론 현재 내가 보고 있는 사이공 강이 전체의 일부분인 이상 다리가 어딘가에는 있겠지만, 우리가 묵은 호텔이 호치민 중심가임을 감안할 때 다리 없는 호치민의 도심 풍경은 조금 낯선 것이 사실이었다. 강변에 도착하여 몇 미터만 가도 교각이 계속해서 나오는 것이 우리네 한강의 풍경 아니었던가.

 

설마 기술의 문제는 아닐 터, 이 지역의 수량이 워낙 풍부하여 수운이 발달한 까닭에 다리를 만들지 않은 것일까? 어쨌든 사람들은 다리 대신 배를 타고 강을 건너고 있었고 그 당연한 풍경에도 교각에 길들여진 난 신기해하고 있었다.

 

샤워를 하고 난 뒤 아내와 함께 호텔 꼭대기에 있는 레스토랑에 올라가서 아침을 먹기 시작했다. 그녀는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호치민의 풍경에 감탄을 거듭했지만, 내가 반한 것은 베트남 본토에서 처음 접하는 정통 베트남 쌀국수의 깊은 맛이었다. 'Pho Bo'라 불리는 그들의 아침 주식. 조미료 맛만 그득한 한국과 달리 진하고 시원한 맛의 베트남 쌀국수는 진짜 일품이었다. 매일 베트남 쌀국수를 먹겠다는 어설픈 결심.

 

 

호치민 시내 돌아다니기

 

아침을 끝내고 호텔 프런트에서 베트남 돈을 환전했다. 1달러 당 17000동. 우리가 한국에서 1달러 당 1600원에 환전했으니 원화와 동화는 거의 10배 차이였다. 과연 베트남의 물가는 어찌 될는지. 

 

호텔을 나서자 어젯밤과 마찬가지로 여기저기서 우리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택시기사들이 아니라 시클로(Cyclo) 기사들이었다. 어디 가느냐, 어디서 왔느냐, 얼마에 타길 원하느냐 등 끝도 없이 이어지는 그들의 짧은 영어. 어제처럼 그냥 무시한 채 앞으로 걸어갈 뿐이었다. 그러면 자연스레 떨어지려니.

 

우리가 향한 곳은 호치민 중심부에 있는 소위 여행자의 거리라고 불리는 데탐거리였다. 그곳에 가면 현지의 많은 여행사들이 배낭여행객들을 대상으로 온갖 종류의 여행상품들을 제공한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부터 가이드관광을 예약하고 올 수도 있지만, 현지에서 이렇게 예약하고 움직이는 것이 금액 절약은 물론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으려니.

 

호텔에서 데탐거리까지 가는 길. 그러나 그것은 지난한 여정이었다. 우리는 여러 번 길을 건너야 했는데, 신호등도 없고, 있어도 지키지 않고, 사람과 자동차, 오토바이, 자전거가 뒤섞여 질주하는 도로를 건너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사람이 오거나 말거나 지나가는 무리들. 결국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 무리들을 같이 무시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지나갈 테니 너희들이 알아서 비켜 가거라.

 

 

인터넷에서 찾아본 대로 여행자 거리에는 크고 작은 여행사들이 몰려 있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다음 날 반나절 동안 가능한 구찌터널 관광 프로그램을 찾고자 했는데 그 가격은 5~6달러로 모두 비슷했다. 반나절 가이드 관광이 원화 만 원이라면 결코 나쁘지 않은 가격이었다. 역시 현지에서 계약하길 잘 했구먼.

 

우리는 6달러를 부르는 유명 여행사 대신, 그 옆의 작은 여행사에서 구찌터널 여행을 5달러에 계약한 뒤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어디든지 브랜드 값은 존재하기 마련일 터, 구찌터널에서의 프로그램은 모두 비슷할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여행사를 나와 우리가 향했던 곳은 전쟁박물관이었다. 호치민에는 이 말고도 호치민 시립박물관이 있었는데 어차피 우리가 베트남 역사에 대해서 띄엄띄엄 아는 바, 내가 보고 싶은 것은 결국 베트남전이었고, 또 베트남 역시 그 전쟁에 대한 기록을 더욱 강조하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현재 베트남의 정체성은 그 전쟁을 통해서 확립되었기 때문이다.

 

박물관으로 가는 도중 시내 한 가운데 있는 공원에 들러 시원한 맥주 한 잔을 들이킨다. 그곳에는 평일인데도 많은 이들이 나와 소일을 즐기고 있었고, 또 그들을 대상으로 노점상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코코넛을 파는 사람들, 과일을 파는 사람 등등.

 

 

그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이는 복권 비슷한 것을 파는 이들이었다. 공원에서뿐만 아니라 호치민 시내 곳곳에서도 종이 뭉치를 들고 다니며 구매를 종용하는 이들. 낯선 풍경이었다. 복권을 사라고 개개인적으로 접근하는 것도 이상했지만 사회주의 국가에서 복권을 발행한다는 사실 자체가 믿기지 않았다.

 

결국 이는 베트남이 개혁, 개방을 통해 자본주의 시스템을 받아들이면서 초기 자본을 늘리기 위해 벌인 궁여지책이었을까? 사회주의 국가가 개인의 사적소유권을 이용하여 국가 재정을 늘리는 풍경. 왠지 이건 아니다 싶은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결국 복권이 횡행한다는 사실은 그만큼 계급 간의 이동이 힘들어 대박을 꿈꾸는 이들이 많아진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전쟁박물관

 

이윽고 도착한 전쟁박물관. 모든 전쟁박물관이 으레 그렇듯이 박물관 외부에는 탱크와 자주포, 비행기 등 수많은 전쟁무기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그 무기들 대부분이 미군의 것이었다. 결국 그것들은 전쟁에서 승리한 베트남의 전리품이었던 것이다. 무기들 앞에서 간간히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 그러고 보니 관광객들 중 미국인보다는 유럽인의 비율이 높아 보였다. 그냥 내 편견일까?

 

이어지는 전시관. 비록 모든 자료들이 베트남어와 영어로 게시되어 있었지만 짧은 영어실력과 사진만으로도 그들이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끔찍했던 전쟁의 참상과 적군의 무자비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리를 거둔 베트남의 저력.

 

 

그 중에서도 나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역시 한국에 관한 내용이었다. 베트남전과 대비하여 제시되어 있는 한국전쟁의 피해 수치도 수치였지만 그보다는 역시 참전국으로서 한국이 가지고 있는 기록에 눈이 갔다. 미국 다음으로 가장 많은 군인을 파병한 나라 대한민국. 베트남 지도의 중부에는 아주 익숙한 맹호부대와 백마부대 마크가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다. 1964년부터 1973년까지 총 32만 8천 명이 참전하고 5천명이 전사하고 1만 1천명이 부상을 입은 South Korea.

 

부끄러웠다. 전쟁의 옳고 그름을 떠나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땅의 민중들이 나와 같은 국적을 지닌 사람들을 침략군으로 기록해 놓았다는 사실 자체가 부끄러울 따름이었다. 물론 삼엄한 냉전 체제 하에서 미군의 요구를 거절할 수도 없고, 용병으로서 돈을 벌기 위해 참여했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베트남전은 'Dirty War'이었고 우리는 바로 그 한가운데 서 있었다.

 

학부 시절 베트남 사를 공부하면서 들었던 교수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원래 베트남의 국립 박물관에는 한국군 병사가 베트남 양민의 자른 목을 양손에 들고 웃는 사진이 걸려 있었는데 한국과의 수교 후 철거됐다는 바로 그 이야기.

 

현재 많은 한국 사람들이 한류나 베트남 신부, 자본투자 등을 운운하며 베트남에서 거들먹거리지만 모두 한가지만은 꼭 기억해야 한다. 어쨌든 우리는 그들에게 침략군이었으며 따라서 사죄해야 한다는 것. 우리가 일제의 침략을 운운하기 위해서는 그와 같은 자신에 대한 성찰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전시관을 나와 화살표를 따라 걸으니 이번에는 베트남전에서 희생된 민간인의 사진 등이 걸려 있었다. 퓰리처상을 받았던 그 유명한 <소녀의 절규> 사진을 비롯해서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처참한 시체들의 사진이 그곳에 있었다. 도대체 그 의미 없는 전쟁에서 얼마나 많은 무고한 이들이 저렇게 죽어갔던가.

 

전시장을 나오니 그 옆에는 미군들이 '베트콩'을 수용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꼰손 섬 감옥 모형이 서 있었다. 그곳에는 프랑스 식민시대 공산당을 처형하기 위해 사용되었다는 단두대 등이 전시되어 있었고, 수용소의 독방이며 수용 모습들이 마네킹을 통해 친절하게 재현되고 있었다.

 

외국인들은 그와 같은 모습들이 끔찍한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돌아다녔지만, 정작 난 그 전시물들을 그냥 담담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당장 우리의 서대문형무소와 비교하더라도 베트남의 수용소가 오히려 덜 처참했기 때문이다.

 

서대문형무소를 가보라. 일제 혹은 군사독재정부의 잔인한 고문이 얼마나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재현되고 있으며, 또한 그 형무소를 최근까지 사용했던지라 그 전체 분위기가 얼마나 음침하고 흉흉한지. 특히 서대문형무소의 사형대 자리는 내가 지금까지 다녀본 곳 중에 가장 음침하고 음산한 공간이다.

 

결국 수용소를 바라보는 외국인들과 나의 태도의 차이는 각 개인이 자라온 사회 역사의 차이에서 연유하고 있었다. 전쟁과 고문 등이 일상화되어있던 20세기 한국. 결코 정상이라 할 수 없는 시공간에서 자라온 우리들은 저들에 비해 무엇을 결여하고 있을까? 이와 같은 맥락으로 외국 여행은 다른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이 아닌, 자신을 성찰하기 위한 행위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우리는 박물관에서 나와 식당에서 숨을 골랐다. 호치민은 워낙 더운 곳이기에 정오 즈음하여 거의 모든 관공서가 쉬며 많은 사람들이 낮잠을 잔다고 했다. 맥주와 함께 먹는 베트남 쌀국수. 자 이제는 시내 중앙의 성당이며 우체국을 둘러본 뒤 통일궁을 갈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유포터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베트남, #호치민, #전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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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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