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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 구찌터널

굿모닝 베트남! 호치민에서 맞는 두 번째 아침. 그러나 우리는 정신이 없었다. 어제 예약한 대로 구찌터널에 가기 위해서는 8시까지 여행자 거리에 집합해야 했는데 이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우리는 부랴부랴 짐을 쌌고, 아침도 시간이 모자라 먹는 둥 마는 둥 일어나야만 했다.

호텔을 나와 택시를 잡아타고 여행자거리로 향했다. 그곳에는 이미 많은 버스들이 줄서서 관광객들을 기다리고 있었고 우리는 예약한 버스를 찾아 몸을 실었다. 우리를 제외한 모든 관광객들이 서양인이었다.

호치민의 주요 관광자원
▲ 구찌터널 호치민의 주요 관광자원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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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향한 구찌터널은 베트남전 당시 미군을 가장 괴롭혔다는 바로 그 베트콩 땅굴 중 하나로서 호치민에서 가장 가까운, 그래서 미국에 가장 위협적인 땅굴이었다고 한다. 총 길이는 250km에 이르고 깊이는 지하 30m 이상 된다는 구찌터널.

안 그래도 적과 아군, 민간인과 군인이 분명하지 않았던 남베트남에서 베트콩들은 이와 같은 땅굴을 이용하여 신출귀몰했을 것이며, 낯선 환경 속에서 적응하기 힘들었을 미군들은 그와 같은 베트콩의 움직임에 당황했을 것이다. 그러니 배후에다 적을 남겨놓지 않으려고 양민인건 군인이건 죄다 학살하지.

구찌터널에 대한 설명을 처음 접하면서 떠올렸던 건 우리나라의 빨치산이었다. 프랑스의 식민통치를 반대하던 베트남 사람들이 게릴라 활동을 하기 위해 처음 땅굴을 만들었고, 이후 베트남전이 발발하자 기존의 땅굴을 이용하여 미국에 저항했다는 이야기가 우리네 빨치산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베트콩은 승리를 거둔 반면 우리의 빨치산은 실패했을까? 어쩌면 이는 단순히 땅굴과 빨치산만의 문제가 아니라 베트남전쟁과 한국전쟁의 차이일지도 모른다. 계속해서 머릿속에 맴도는 두 전쟁의 차이점. 무엇 때문에 그들은 통일되었고 우리는 아직까지 휴전 상태일까?

호치민 VS 사이공

이윽고 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나이 들어 보이는 가이드가 앞으로 나가 이것저것 설명해주기 시작한다. 베트남전 당시 남베트남의 군인이었다가 부상을 입어 제대할 수밖에 없었다던 그는 그의 인생역정을 통해 베트남 특히 호치민시의 현대사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전쟁 전만 하더라도 북부 하노이를 뛰어넘는 베트남 최고 도시였지만, 통일 이후 공산당 치하에서 썩어빠진 자본주의의 온상으로 낙인찍혀 터부시 되던 구 사이공. 그런 호치민에서 시클로를 끌며 하루살이로 연명하던 그가 지금의 여행사 사장이 된 것은 결국 베트남의 도이모이 정책이 시작된 이후 호치민이 옛 영광을 되찾기 시작하면서부터라고 했다. 개혁개방 이후 베트남의 경제가 호치민을 기점으로 부흥할 수 있었던 것은 과거 호치민이 자본주의의 경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호치민시를 사이공이라 불렀다. 나이 든 그에게 호치민보다 사이공이 익숙한 것도 사실이겠지만, 그보다는 그의 의지 때문인 듯 했다. 사이공에서 태어나 사이공에서 자란 사이공 사람으로서 과거 적국이었던 북베트남의 일방적인 도시 개명을 어찌 쉽게 받아들이겠는가. 공산국가 베트남의 호불호를 떠나, 호치민에 대한 존경 여부를 떠나 그것은 분명 쉽지 않은 일일 게다. 특히 그동안 사이공 사람이기 때문에 베트남에서 보이지 않은 차별과 핍박을 받았다면 이는 더더욱 어려울 수밖에. 괜히 사이공 사람들이 사이공 맥주를 찾고, 하노이 사람들이 하노이 맥주를 찾겠는가.

개인적으로 더욱 궁금한 것은 호치민시라는 지명의 존속여부였다. 과연 호치민시가 아직까지도 끈질기게 남아 있는 사이공의 그림자를 털고 영원히 호치민으로 남을 수 있을까? 물론 지금의 젊은이들이야 이 도시의 공식명칭으로 호치민을 사용하고 있지만, 소련의 레닌그라드가 다시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가듯이 인위적이고 정치적인 도시명이 오래가기는 매우 어렵다. 정치는 항상 변하기 때문이다. 아마 한반도가 통일된다면 북쪽의 김책시나 김정숙시 등도 같은 운명에 처하지 않을까?

구찌터널 가는 길

비극의 현대사를 간직한 옛 미군의 거리
 비극의 현대사를 간직한 옛 미군의 거리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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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드의 설명이 끝나고 얼마나 갔을까? 창밖의 풍경은 어제 하루 종일 돌아다닌 호치민 시내의 그것과 사뭇 달라보였다. 조금 더 낙후되고 투박한 모습의 도심. 가이드는 이곳이 예전 미군 주둔 지역이라며 창밖을 잘 보라고, 예쁜 여자들이 많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무슨 소리인가 했더니 이 주변에 몸을 파는 여자들이 많다는 것이었다.

씁쓸했다. 순간 떠오르는 동두천, 의정부의 그 수많은 술집들과 소위 양공주들. 과연 이것이 미군만의 일일까? 한때 우리 사회에서 문제가 되었던 베트남 라이 따이한들의 애환은 결국 우리 국군 역시 이곳에서 미군과 다를 바 없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혹자는 이 모든 것이 전쟁터에서 흔히 존재할 수 있는 경우이며, 전쟁이기에 도덕적 잣대를 들이밀기 어렵다고 강변할 테지만 어쨌든 오랜 시간 침탈의 역사를 되새기며 역사적 정당성을 강조하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이는 분명 씻을 수 없는 과오임이 분명하다.

그러고 보니 유독 그 거리에는 한국 상점들이 많이 들어서 있었다. 우연일까? 혹여 이곳에 라이 따이한 출신들이 많아서 그런 건 아닐까? 타지에서 한글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분명 반가운 일이었지만 장소가 장소다 보니 조금 꺼림칙한 것이 사실이었다. 역사적 부채의식이 있는 나의 자격지심이려니.

갑자기 버스가 서더니 가이드가 관광객들에게 내리라고 손짓을 했다. 뭐지? 구찌터널이 도심 속에 있나? 그곳은 공예품 공장이었다. 자개 대신 계란껍질로 만드는, 나전칠기 비슷한 수공예품. 특이한 것은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모두 장애인인 듯, 공장 정면에 국가공인인증으로 보이는 장애인 마크가 붙어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심을 지울 수 없는
▲ HANDICAPPED HANDICRAFTS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심을 지울 수 없는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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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들의 솜씨
▲ 수공예품 장인들의 솜씨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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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드는 우리를 공장 안으로 안내했다. 우리네 여행사들이 해외여행 안내를 할 때 현지에서 일정부분 커미션을 받고 관광객들을 데리고 가는 바로 그 시스템이었다. 어쩐지 여행비가 너무 싸더라. 제품이 아무리 좋기로서니 그 형태가 강매 비슷하므로 언짢은 기분에 대충 돌아볼 뿐이었다.

무표정한 모습으로 묵묵히 일하는 장애인들. 그들을 보고 있자니 문득 사회주의 베트남에서의 장애인들에 대한 대우가 궁금해졌다. 과연 사회주의의 이상대로 이곳에는 차별이 존재하지 않을까? 그러나 무표정한 노동자들을 보고 있자니 의심을 거둘 수 없었다. 결국 현실 사회주의가 실패한 것은 자본주의와의 경쟁에 이길 때까지만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던 그 파시즘적 요소 때문이 아니었던가.

다시 버스에 오른다. 국가의 장애인에 대한 또 다른 착취를 본 것 같아 씁쓸했다. 물론 그들은 그 노동을 통해 생활비를 버는 것일 테지만 국가에 의해 그들의 장애가 상품이 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구찌터널

30분쯤 달렸을까? 버스는 도심을 벗어났고 창밖으로는 캄보디아 앙코르 와트를 갈 때 보았던 예의 그 풍경이 펼쳐졌다. 너른 논밭과 그곳에서 여유롭게 풀을 뜯는 소. 그리고 길가에 휘뚜루마뚜루 지어진 가옥들과 투박한 모습으로 우리를 쳐다보는 사람들. 아마도 베트남전의 미군들 역시 이와 같은 목가적인 풍경을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기습을 당했을 것이다.

너른 논밭
▲ 베트남의 창밖 풍경 너른 논밭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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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구찌터널. 입구는 많은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모두들 그 유명한 베트콩 땅굴을 본다는 생각에 들떠 있는 것 같았지만 비교적 난 무덤덤한 편이었다. 분단의 현실 속에서 DMZ를 왔다 갔다 하고 땅굴을 가더라도 당장 적이 나타날 수도 있는 곳을 다녀왔던 내가 어찌 긴장하겠는가. 다만 그 역사적 의미로서 베트콩 땅굴을 구경하고 싶을 따름이었다.

어두운 입구를 지나자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땅굴이 아니라 호치민의 초상화 밑에 조그만 TV가 놓여 있는 막사였다. 이야기인 즉 이곳에서 교육용 VTR을 보고난 뒤 견학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그것은 우리의 반공교육과 다를 바 없었다. 친공교육이라고 해야 하나? 반미교육? 반전교육은 아닌 것 같고. 위대한 베트남 인민들이 미제국주의를 물리친 아름다운 이야기.

어쨌든 그 유치함에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서양 관광객들은 무슨 대단한 구경인 냥 TV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지만 나와 아내는 그 낯익은 풍경에 마냥 하품만 지을 뿐이었다. 친공이든 반공이든 내용이 어떻든 간에 지겨운 사상교육. 그것도 영어로 쏼라쏼라 거리는. 비디오가 끝나자 강사 한 명이 나와 땅굴 모형을 가리키며 구찌터널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했는데, 그 역시 내용은 뻔했다. 땅굴을 판 베트남인들의 총명함과 그 기지에 당한 우둔한 미군들.

지겨운 反 반공교육
▲ 사상교육 지겨운 反 반공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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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했던 전쟁의 증거
▲ 다양한 부비트랩 잔인했던 전쟁의 증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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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이 끝나자 가이드는 우리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구찌터널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말로만 듣던 죽창 부비트랩부터 시작해서 베트콩들의 전투식량, 베트콩들의 기습으로 노획된 미군들의 무기 등 그곳에는 초강대국 미국을 이긴 베트남전의 신화가 구석구석 배여 있었다. 지금의 베트남을 존재 가능케 한 신화.

소설이나 영화를 통해서 봤던 장면들을 직접 보고 있자니 마냥 신기한 생각뿐이었다. 이 무더운 기후 속에서 그들은 어찌 그리도 끈질기게 싸울 생각을 했는지. 자신이 옳다는 확신이 없고서는 불가능한 승리였을 것이다.

덩치 큰 미군은 통행불가
▲ 좁디좁은 터널의 내부 덩치 큰 미군은 통행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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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직접 들어가 본 베트콩 땅굴은 그야말로 상상 이상이었다. 허리도 펼 수 없을 만큼의 좁은 통로. 이러니 덩치 큰 미군들이 어찌할 수 없지.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이와 같은 땅굴이 지하로 몇 겹이나 나 있다고 하니 땅굴의 규모와 그것을 만든 베트남 인민들의 인내심에 혀를 내두를 뿐이었다. 이 정도 땅굴이면 지금 당장 전쟁이 난다고 하더라도 충분히 사용할 수 있을 듯.

땅굴 체험까지 끝내자 가이드가 우리를 데리고 간 곳은 매점이 붙어 있는 사격장이었는데 관광객들은 그곳에서 돈을 주고 M16 등 총을 쏠 수 있었다. 커다란 총소리와 그에 깜짝깜짝 놀라는 관광객들.

그러나 아까운 돈을 주고 총을 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실탄인지, 공포탄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미 군대에서, 그리고 예비군 훈련을 받으면서 매번 쏴봤던 총 아닌가. 무어가 그리 대수라고. 총 한 번 쏘겠다고 줄을 서고 있는 외국인들을 보고 있자니 가소롭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그 생각 자체가 이미 군대와 전쟁을 체화시킨 한국인이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깨달음에 섬뜩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총이 자연스러운 대한민국 육군 예비역 병장. 그것은 분단의 비극일 뿐이었다.

분단이 일상인 우리와 다른 그들
▲ 심각한 외국인들 분단이 일상인 우리와 다른 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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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비옷을 꺼내 입는 베트남 사람들
▲ 열대성 폭우 스콜 어디선가 비옷을 꺼내 입는 베트남 사람들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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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구찌터널을 모두 구경하고 우리는 다시 버스에 올랐다. 다시 호치민으로 향하는 버스. 얼마쯤 가자 열대성 폭우인 스콜이 쏟아졌다. 신나게 달리던 오토바이들이 갑자기 멈춰 서서 비옷을 입고 다시 움직이는 그 장관이란. 다행히 우리가 내릴 때는 다시 햇빛이 쏟아졌고 우리는 그 길로 호텔로 가서 맡겨둔 짐을 챙긴 뒤 다음 목적지인 나짱으로 향했다.

자! 이젠 베트남 최고의 휴양 도시 나짱이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유포터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베트남, #호치민, #구찌터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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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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