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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무가 자욱한 땅끝마을의 포구
▲ 땅끝마을의 포구 해무가 자욱한 땅끝마을의 포구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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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친구들과 땅끝마을을 찾은 이후 2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곳은 여전히 안녕할까 궁금했지만, 캄캄한 어둠 속에서 해남길을 더듬어가는 길은 오직 목적지만을 향해 내달리게 하고 있었다. 내비게이션은 내가 지나고 있는 도로의 좌측이 바다임을 푸른색으로 알려주고 있었다.

2차선 도로를 얼마나 달려갔을까. 어둡기만 하던 길 저편 아래 불야성이 보인다. 땅끝마을이다. 참으로 먼 길을 달려왔다.

25년 만에 방문한 그 곳, 그때는 이 표지석이 없었던 것도 같다.
▲ 땅끝 표지석 25년 만에 방문한 그 곳, 그때는 이 표지석이 없었던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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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해남 어디쯤이었을 것이다. 산길을 굽이굽이 돌아 내리막길에 들어서자 토속음식점들이 즐비했고, 강진이 고향인 친구가 소개해 준 음식점에서 '애저'라는 것을 처음으로 먹어보았다. 나중에야 그것이 어떤 음식인지 알았지만 애저의 맛보다는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한 상 가득한 반찬들이 생각난다.

그리고 다음날인가 닭찜을 한다는 허름한 집을 찾았다. 친구말로는 뱀을 먹여서 키워 몸에 좋다했다. 그날 난생 처음으로 닭발을 회로 먹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닭발을 어떻게 생으로 먹냐?"는 서울 촌놈을 향해 씩 웃으며 "한 번 먹어봐, 잊지 못할걸?"했다. 그 이후 먹어본 적은 없었지만 그 말은 사실이었다.

일출광경을 담진 못했지만
▲ 포구 앞의 작은 섬 일출광경을 담진 못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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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 일출을 볼 생각에 그곳에서는 제일 싸다는 모텔을 숙소로 정했다. 2만 5천원, 조금 더 깨끗한 곳을 숙소로 잡을걸 후회는 했지만 대여섯 시간 쉴 곳인데 이 정도면 족하다 생각하고 5시 30분에 알람을 맞춰놓고는 따뜻한 온돌에 몸을 맡겼다.

먼 곳을 달려왔기 때문인지, 눈을 떠보니 6시가 넘었다. 6시에 해가 뜨는데 늦었구나 싶어 서둘러 고양이 세수를 하고 땅끝마을의 포구로 나섰다.

해무가 자욱한 땅끝마을. 그래, 바다가 그랬지. 제주에 있을 때도 새벽마다 바다에 나가도 한 달에 한 번 정도 오메가를 그리는 해를 만날 수 있었다. 그것도 운이 좋을 때. 그래서 단 한 번의 여행에 단 한 번 나간 새벽바다에서 오메가를 만나면 "당신 조상 3대가 덕을 쌓은 모양이야"라며 농담을 하기도 했다.

해무와 어우러진 소나무
▲ 소나무 해무와 어우러진 소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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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아직 붉은 기운이 남아 있다. 해무에 희미하게 가려진 땅끝마을, 지금 나는 땅끝마을이 태동된 후 여태까지 보여주지 않았던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위안이 된다.

해무사이로 소나무가 수묵화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소나무의 백미는 희미한 안개숲에서 보는 것이라는 개인적인 생각이 그리 틀리지 않았음이 증명되는 순간이다.

아직 새순이 돋아나지는 않았지만 이제 곧 돋아날 것이다
▲ 팽나무 아직 새순이 돋아나지는 않았지만 이제 곧 돋아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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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선이 아름다운 팽나무, 구불구불 옹이마다 팽나무의 향기를 가득 품고 있을 것이다. 바람, 오랜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옹이마다 남아있고, 구부러진 가지마다 남아있다. 자연이 만든 분재다.

25년 전 이곳에 왔을 때도 팽나무는 이곳에 있었을 터다. 그런데 그땐 그가 보이질 않았다. 한창 청춘인 대학시절이었으니 함께 온 친구들과 이야기하는 것이 더 재미있었나 보다. 그때 해남이 고향인 친구가 말했다.

"참, 좋지? 그런데 우린 이곳을 떠나기 위해 얼마나 발버둥쳤는지 아니?"

군부독재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때, 민중들의 삶에 대해 눈을 떠갈 때였기에 그 말은 비수처럼 내 마음에 꽂혔다. 그 말을 한 그녀는 참으로 슬픈 눈을 가진 소녀였다.

그들의 몸짓, 그들의 빈 손
▲ 빈나뭇가지 그들의 몸짓, 그들의 빈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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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들 무엇을 잡으려고 떠난 것일까? 떠나서 행복할까? 태어난 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고 싶어도 살 수 없어 떠난 사람들, 그 사람들은 지금도 이곳을 그리워할 것이다. 고향도 아닌 이곳을 내가 그리워하는 것 이상으로.

25년 전 그날, 땅끝마을의 어느 바다에서 친구들과 거의 새벽까지 술을 마시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역사와 민족, 그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사람다운 삶인지, 개인만을 위해 살아가려는 것은 기회주의자일 뿐이라는 등 논의 끝에 내린 결론은 '군부독재타도'였다. 군부독재를 타도하고 민중세상을 만드는 그날까지 우리는 동지라고 했다.

땅끝마을 포구에서
▲ 땅끝5호 땅끝마을 포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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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모두 그 당시 비판의 대상으로 혹은 무능한 기회주의자로 몰아붙이던 기성세대가 되어 살아가고 있다. 세상이 좋아지긴 했으되 그 뜨거운 피를 가지고 있었던 이들이 기성세대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이 땅은 별로 변한 것 같지가 않다.

변한 친구도 있고, 여전히 그때의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는 친구도 있고, 중년의 나이가 되어 멋들어지게 늙어가는 친구가 있는 반면에 이미 세상의 모든 고생이란 고생은 다해서 얼굴에 그 흔적이 남아있는 친구도 있다. 가끔 장례식장에서 만나면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들을 하다가 이내 학창시절 이야기를 한다.

인생에서 가장 뜨거웠던 시간들이 20대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어느 바닷가에서
▲ 해남의 바닷가 그 어느 바닷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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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만든 최고의 발명품은 자전거와 손수레가 아닐까 싶다. 나는 자연과 가장 잘 어울리는 발명품을 꼽으라면 바다 위를 유영하는 배를 꼽는다. 바다에서의 배는 자유다. 미지의 세계로 우리를 데려다 준다. 이 섬과 저 섬을 이어주는 끈, 아주 작은 섬에서도 여전히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이 배다.

바닷사람들에게 배는 생명선이요, 생명줄이다. 육지사람에게 그 옛날 황소가 살림 밑천이요, 자식들 학자금이었다면 배는 그보다 조금 더 큰 살림 밑천이요, 자식들의 학자금이었다.

땅끝 조각공원에서
▲ 솟대 땅끝 조각공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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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든 소망들을 담아 솟대를 세운 것일까? 지역마다 솟대가 있지만 이곳 땅끝 혹은 바닷가 근처에 세워진 솟대는 더 많은 소망을 담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짜하다.

해무로 인해 땅끝마을을 한 눈에 보지는 못했다. 한 눈에 다 보여주지 않은 것은 이곳을 다시 오라는 것이리라. 다시 오면 그때는 다 보여줄 수도 있지만 괘씸하게도 25년 만에 찾아왔으니 서운해서 아주 조금만 보여주겠다고 그들이 말하는듯 하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 해남 어딘가에서
▲ 마늘밭 서울로 돌아오는 길, 해남 어딘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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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과 강진 그곳은 지금 보리밭과 마늘밭이 푸른 물결이요, 자운영 꽃밭은 보랏빛 물결, 유채꽃밭은 노란 물결이 한창이다. 보리는 이제 막 이삭을 틔우고 있고, 마늘은 이제 곧 쫑을 낼듯이 자라있다. 농부들의 손길이 점점 분주해진다.

저 사람들이 잘 살아갈 수 있어야 하는데, 젊은이들도 이 곳에 와서 농사짓고 바다를 벗삼아 살아도 살아갈 수 있어야 하는데, 큰 욕심을 부리지 않고 땀흘리는 노동을 즐거워하는 사람이라면, 소박한 삶을 살아가기로 작정한 사람이라면 그리 어렵지 않게 살아갈 수 있는 곳이 농어촌이어야 하는데...

서울로 돌아오는 길, 속이 아프다. 생각해 보니 이틀동안 라면 한 그릇, 두유 하나에 삼각김밥 하나가 전부였다. 배고픈 줄도 모르고 다녔던 것이다.

'안 드시고 가면 후회할 것'이라는 경고성 광고판이 붙은 한정식 집에 들어가니 6천 원짜리 한정식에 반찬이 무려 20가지가 넘게 나온다.

"이렇게 장사해서 뭐가 남아요? 몇 가지는 좀 가지고 가셔도 되는데..."
"그라믄, 상이 멋이 없어져 부리니까 그냥 드시소 잉."

너무 짧은 여행길이었다. 한 달 정도 천천히 해남길을 걸으며 그들의 속살을 볼 수 있는 날이 내 인생에 오길 바란다.


태그:#땅끝마을, #해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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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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