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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발레단에서 연습중인 이동훈 발레리노
 국립발레단에서 연습중인 이동훈 발레리노
ⓒ 곽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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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페름 아라베스크 국제 발레 콩쿠르 갈라쇼. 당시 러시아의 교양 높던 발레 관객들은 동양에서 온 젊은 청년에 매료되어 뜨거운 기립 박수를 보냈다. 발레에 힙합 동작을 섞은 한국의 발레리노에게 보내는 열렬한 찬사였다. 사람들은 발레리노가 어떻게 비보이 춤을 할 수 있냐고 의아해 했다. 그 물음에 박수 세례의 주인공인 청년은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의 미소에는 어린 시절의 추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어린 시절 청년은 비보이를 꿈꿨다.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춤 대결을 다니며 행복했었다. 하지만 그의 삶에 발레라는 낯선 예술이 침범했다. 처음에는 그저 발레가 미래를 위한 도구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주위의 편견에 발레를 그만둔 적도, 후회한 적도 있다. 하지만 결국 청년에게 발레는 운명이 되었다. 부유하지 못했던 가정 환경도, 발레의 어울리지 않는 신체 조건도 그의 발레에 관한 뜨거운 사랑을 막지 못했다.

비보이에서 발레리노가 된 청년의 이름은 이동훈(23). 그는 페름 국제발레콩쿠르 동상, 동아 무용 콩쿠르 금상, 그리고 <호두까기인형> 주역 무용수라는 수식어가 빛나는 국립 발레단의 젊은 발레리노다.

#1. 비보이 소년

이동훈 발레리노, 그는 비보이였다. 하지만 발레는 그에게 운명처럼 다가왔다.
 이동훈 발레리노, 그는 비보이였다. 하지만 발레는 그에게 운명처럼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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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훈은 중학교 1학년때 학급의 반장이었다. 하지만 말수가 적고 조용한 그와 달리 반 아이들은 시끌벅적했다.

쉬는 시간이면 춤추는 아이들로 학급 뒷편은 놀이터가 되곤 했다. 당시 학생들 사이에서는 힙합 만화가 큰 인기를 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장이었던 그의 눈에 춤을 추며 반을 시끌벅적하게 만드는 아이들이 좋게 보일 리 없었다.

결국 그는 "조용히 좀 해"라며 아이들과 한바탕 옥신각신을 했다. 하지만 춤추는 아이들은 그 말을 들은 체도 안했고, 오히려 넌 '춤도 못추잖아'라고 그를 비웃었다.

"그 말을 들으니 괜히 자극이 되더라고요. 그때부터 저도 춤을 잘추고 싶다는 생각으로 6개월 동안 만화책을 보고 독학을 했어요(웃음)."

만화책을 통해 스스로 춤을 배운 그는 비보이의 매력에 푹 빠져들게 된다. 이동훈는 춤이 좋았고 춤을 추고 있으면 마냥 행복했다고 고백한다. 스스로 독학해서 연마하는 비보이 기술은 시간이 갈수록 꽃을 피워서 6개월 후, 그는 학교에서 제일 춤을 잘추는 아이로 변신한다.

처음에 옥신각신한, 춤추는 아이들과도 친구가 되어 틈이 날때마다 춤 대결을 하러 여러 학교를 배회하고 다녔다. 그는 비보이 소년 시절의 추억을 떠올린다.

"학교를 돌아다니면서 춤 대결을 펼쳤는데 대부분 이겼어요. 제가 살던 곳이 분당이었는데 그곳에서 토마스 기술을 제일 잘하는 아이로 소문이 났었죠.(웃음) 전 춤이 좋았어요. 당시에는 멋부리려고 힙합 옷을 입고 그런 사람들도 있었지만 전 춤이 마냥 좋아서 츄리닝에 런닝 차림으로 춤을 추러 다녔었죠."

그런데 중학교 3학년때, 이동훈의 삶에 발레라는 낯선 예술이 침범한다. 발레를 전공했던 체육 교사가 이동훈을 보고 "너, 한번 발레 해볼래?"라며 권유한 것이 결정적인 이유였다. 평소 좋아하던 선생님의 권유 때문이었을까? 비보이밖에 몰랐던 이동훈은 호기심 어린 마음에 발레 학원에 첫 발을 들여놓게 된다.

"발레를 처음 접했을때 무척 편했어요. 보통 남자들은 타이즈를 입고 그런 것 때문에 쑥스러워하고 그러는데, 저는 그런 것 없이 발레를 오래한 사람처럼 자연스러웠죠."

하지만 이동훈의 어머니는 아들이 발레를 하는 것에 대해 걱정을 많이 했다.

"어머니가 남자 발레리노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편견을 알고난 후 걱정이 많으셨어요. 그래서 처음 발레학원에 등록한 지 3주 만에 그만두게 되었죠."

이동훈과 발레의 첫 만남은 짧았다. 하지만 발레와의 인연은 이대로 끝이 아니었다. 그에게 발레를 하고 싶다는 욕망이 솟구쳤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금 발레를 하고자 발레 학원을 찾았고 이동훈의 어머니도 결국 그의 열정을 보고 발레 하는 것을 승낙했다.

#2. 연습벌레
이동훈 발레리노, 충실한 연습이 오늘의 그를 있게 만들었다
 이동훈 발레리노, 충실한 연습이 오늘의 그를 있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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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미래는 불투명했다. 유명한 발레리노, 발레리나들은 대부분 예중, 예고 입학과 함께 개인 레슨을 받지만 이동훈은 어느 것 하나도 이에 충족하는 것이 없었다. 뒤늦은 중학교 3학년때부터 발레 학원에 다닌 것이 고작이었다.

게다가 신체조건도 발레에 어울리지 않았다. 발레리노로서는 최악인 평발에다가 발레의 기본 동작인 턴아웃(골반부터 발끝에 이르기까지 두 다리가 이루는 각이 180도가 되도록 하는 발레의 기본 동작)도 안 되었기 때문이다. 발레리노를 꿈꾸는 비보이 소년의 미래는 그리 희망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동훈에게는 남다른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끈기였다. 그는 발레에 관해 지독한 연습벌레가 되었다. 학교가 방학하고 난 후, 발레 학원에서 아침 9시부터 밤 11시까지, 그는 온종일 연습에만 온 열정을 쏟았다. 지독한 연습에 지칠만도 하건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지금은 계속 연습을 시키면 힘들어서 못할 거예요.(웃음) 하지만 어릴 적에는 아무리 연습을 해도 힘들지 않았어요. 제일 먼저 학원의 문을 여는 것도, 제일 늦게 학원의 문을 닫는 것도 제 몫이었죠."

하지만 학원 연습만으로 쉽게 메워지지 않는 것이 있었다. 바로 배워야 하는 '기술적인' 부분에 대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부족한 부분을 메꿀 수 있는 해외 연수는 필수적이었다.

이동훈이 중학교 3학년 때, 그가 다녔던 학원에서는 2달간의 짧은 중국 발레 연수를 준비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연수 갈 생각은 엄두를 내지 못했다. 적잖은 경비가 소요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상황을 변화시킨 것은 부모님의 헌신이었다.

"부모님께 중국 연수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냈는데, 어머니께서 미안하다는 말을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한국에서 열심히 하면 되지.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잊어버렸죠. 그런데 어느날 학원 원장님이 동훈아 너도 중국 연수 가게 되었다는 거예요. 알고보니 어머니가 일하시는 곳을 그만두고 퇴직금을 받아서 연수비를 마련하셨더라고요."

국립발레단에서 연습중인 이동훈 발레리노, 김리회 발레리나
 국립발레단에서 연습중인 이동훈 발레리노, 김리회 발레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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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퇴직금으로 가게 된 중국 발레 연수, 이동훈의 마음가짐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연수 기간 동안 보고 배운 발레 기술들을 스펀지처럼 받아들였다.

그런 열정이 빛을 발해 그는 고등학교 시절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고등학교때 출전한 콩쿠르 11개 대회에서 전부 1등을 차지한 것이다. 인문계에 다니는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학생이, 예고 학생들을 제치고 계속해서 굵직한 대회의 1등을 차지한 것이다.

"처음에는 제가 발레 쪽에는 아는 친구들이 없으니까, 많이들 누구지?하고 궁금해했었나 봐요. 그래도 나중에는 예고쪽 아이들과 친구가 되었는데 콩쿠르 그만 좀 나오라는 말도 많이 들었어요(웃음). 콩쿠르에서 좋은 성적을 내자 어머니도 정말 행복해 하셨어요. 사람들한테 자랑을 하고 그러셨나봐요. 그 말을 들으니 뿌듯하더라고요."

콩쿠르에서의 좋은 결과를 바탕으로 이동훈은 세종대 무용과에 합격한다. 재학중 국제 콩쿠르 수상으로 4년 전액 장학금을 받은 그가 부모님의 자랑이 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3 러시아를 감동시키다

이동훈은 대학 시절, 러시아 페름 아라베스크 국제발레콩쿠르(이하 페름 국제 발레 콩쿠르) 모던 부분에 출전하게 된다. 페름 국제 발레 콩쿠르는 발레의 나라 러시아에서도 권위있는 대회로 손꼽혔다.

하지만 콩쿠르에 임하는 이동훈의 상태는 좋지 못했다. 출국 전, 한국에서 당한 근육 파열 부상으로 인해 제대로 된 연기를 펼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보자는 심정으로 콩쿠르에 임했어요. 한번 즐겨보자는 식으로 말이죠. 모던 부분에 출전해서 비보이 동작을 응용한 손 안 짚고 발로 한 바퀴 돌기 등을 선보였는데 다행히 큰 실수가 없었고 만족할 만한 연기를 했던 것 같아요."

국립발레단 이동훈 발레리노
 국립발레단 이동훈 발레리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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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보이 동작을 응용한 그의 연기는 심사위원을 비롯한 콩쿠르 대회장에 모인 모든 사람에게 파격으로 다가왔다. 연기의 끝, 끊임없이 이어진 박수소리가 이를 증명했다. 박수는 끊이지 않았고 이동훈은 그 덕에 세 차례나 무대로 나가 인사를 하고 내려와야 했다. 결국 그는 당시 페름 국제 발레 콩쿠르 모던 부분에서 동양인 중에서는 유일하게 3라운드에 진출했다. 그리고 동상이라는 명예로운 수상 결과를 획득했다. 그리고 이어진 갈라쇼에서 단연 최고의 스타는 이동훈이었다.

이동훈은 2006년 페름 아라베스크 발레 콩쿠르 동상에 이어 2007년 동아무용콩쿠르에서 금상을 받으며 명성을 이어갔다. 그는 대학 졸업을 앞두고 해외로 나가 무용 공부를 하고 싶다는 꿈이 있었다. 그런데 그때 국립발레단에서 제의가 들어왔다. 특채로 이동훈을 입단시키고 싶다는 것이었다.

"고민을 좀 했지만 해외에서 방향 없이 정체하는 것보다는 우리나라의 국립 발레단에 들어가 맘껏 춤을 출 수 있는 게 훨씬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이)원철형, (장)운규형 등, 제가 존경하는 발레리노들에게 배우면서 춤 출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 같아요."

그는 고민 끝에 제의를 받아들였다. 마음껏 춤출 수 있는 무대를 원했기 때문이다.

#4. 꿈꾸는 발레리노, 세상을 향해 전진하다

국립발레단 연습실. 이동훈 발레리노
 국립발레단 연습실. 이동훈 발레리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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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9월 국립발레단에 입단한 이동훈은 입단 3개월만에 2008년 전막 발레 <호두까기인형>의 주역으로 화려하게 데뷔를 했다. 그는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 들려준다.

"(주역)으로 선정이 돼서 그때는 많이 놀라기도 했지만, 담담하게 발리 준비를 해야겠다 이런 생각이었어요. 제가 파트너십 부분이 연습이 부족했는데 당시에 제 파트너(김리회)가 많이 고생을 했죠. 밤 10시까지 남아서 같이 연습을 해서 결국 공연에 섰죠. 매우 만족한 것은 아니지만 큰 실수는 없었고 잘해냈다는 사실에 마음이 뿌듯했어요."

공연에서 선보인 이동훈의 멋진 피루엣(발레에서, 한 발을 축으로 팽이처럼 도는 춤 동작)과 높은 점프는 발레 팬들을 매료시켰다. 결국 공연은 성황리에 끝이 났고 언론과 발레팬들은 '비보이에서 발레리노'가 된 젊은 발레리노에게 주목했다.

주위의 편견에 발레를 그만둔 적도, 후회한 적도 있었던 이동훈, 하지만 결국 그에게 발레는 운명이 되었다. 발레의 어울리지 않는 신체 조건도 그의 발레에 관한 뜨거운 사랑을 막지 못했다. 이제 이동훈은 '비보이에서 발레리노'가 된 특이한 이력을 넘어 더 높은 꿈을 꾼다. 바로 감동을 주는 발레리노이다. 스물세 살 이동훈 발레리노는 그 꿈을 위해 전진하고 있다. 그의 당찬 꿈이 빛나 보였다.

"주역을 할 때나 들러리를 할 때나 제 역할을 보고 감동을 받게 하는 발레리노가 되고 싶어요. 관객들이 감동을 받고, 또 어느 역할을 하든 감동을 줄 수 있게 하고 싶어요. 그러려면 앞으로도 더욱 열심히 준비해야 하겠죠?"


태그:#이동훈 발레리노, #국립발레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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