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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나 서울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한겨레신문사에서 기자로 재직한 남자가 있다. 그는 1991년에 등단했고 제4회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을 받았으며 화제가 되는 소설들을 연이어 발표했다. 그에 대한 세상의 기대는 컸다. 하지만 1997년 34세라는 짧은 나이에 생을 마쳤다. 그는 누구인가? <열린 사회와 그 적들> <장석조네 사람들> <자전거 도둑> 등을 선보였던 김소진이다.

 

김소진이 살다간 시간은 짧았지만, 그에 대한 이야기는 계속해서 들려온다. 후배 소설가들과 문단에서 그를 잊지 못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고, 독자들이 그의 소설을 벌써부터 고전으로 취급하기에 그런지도 모른다. 그에 대한 이야기가 이번에는 대학로에서 들려오고 있다. 장편소설 <장석조네 사람들>이 연극으로 만들어져 상연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연극을 보러 가기 전에 <장석조네 사람들>을 다시 한 번 살펴봤다. 이 소설을 처음 본 것은 대학생 시절이었다. 소설은 1970년대 미아리의 어느 '산동네'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그때 느낀 것은 '잘 쓴 소설'이라는 정도였다. 전국 팔도에서 모인 사연 많은 사람들의 사투리가 생생하게 담긴 것이 장점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창피하게도, 겨우 그 정도였다. 아직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그 무서움이 만들어내는 '애환'이라는 것도 모르던 때라 그랬던가 보다.

 

첫 직장에 들어가 2년하고도 반년을 일한 지금, 돈 번다는 것이 꽤 어렵다는 것을 알아가는 요즘, 아직도 취업 못한 친구들이 많은 오늘, 취업을 해도 제대로 돈 못 받는 친구들도 꽤 되어 슬픈 나날에 이 소설을 다시 보니 가슴이 아리다. 그도 그럴 것이 <장석조네 사람들>에 모인 사람들은 장석조네 집에 세 들어 사는 가난뱅이이며 세상 풍파에 이리 저리 흔들리는 약자들의 표본이다.

 

그들 하나하나가 세상으로부터 받은 멸시와 수모를 하나씩 말하자면 그 분량은 대하 장편소설감이고 그 사연들 하나하나는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인생극장이다. 이 소설을 두고 그저 '잘 쓴 소설'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부끄러워 땅이 쩍 하고 갈라져 내 몸을 삼켰으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 소설에 스며들어 있는 것은 한국에서 약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비애와 슬픔에 관한 것이었다.

 

대학로에 갔다. 연극은 소설을 어떻게 만들었는가, 를 유심히 살펴보려 했는데 나는 이내 그런 생각을 버렸다. 연극은 소설을 '연극화'한 것이기 때문이다. 대사도 소설의 언어를 그대로 갖고 왔다고 해도 무방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소설의 분위기를, 연극이 제대로 살리고 있는가 하는 문제로 바뀐다. 연극은 그렇게 하고 있던가? 그랬다. 무대와 배우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김소진을 위한 것이었다.

 

무대에서는 '비운의 육손이 형', '두 장의 사진으로 남은 아버지', '돼지꿈', '함경도 욕쟁이 아즈망' 등의 작품이 연극화했다. 그 내용은 어떤가. '비운의 육손이 형'은 독재정권과 부유층에 이용당했다가 내팽개친 기골 큰 남자의 이야기로 그 시절 대한민국의 슬픔을 이야기하고 있다.

 

'두 장의 사진으로 남은 아버지'는 평생 무기력하게 살던 아버지가 돈 많은 장석조의 꾐에 넘어가 대선에 출마한다는 내용이다. 평생 막노동꾼으로 살던 아버지는 대선후보가 되어서도 무시당한다. 그를 응원하는 것은 고작해야 주변 사람들뿐이다. 슬프다. 언제나 무시당했던 아버지가 겨우 연설연단에 올라가서야 제 목소리 한번 내본다는 사실이. 돈 없고 못 배운 사람은 그렇게 한번 소리 지를 수 있는 것이 그때의 현실이었다.

 

'함경도 욕쟁이 아즈망'은 양공주 딸을 둔 어머니의 슬픈 이야기다. 어머니는 딸이 매번 미군을 데려올 때마다 속이 상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흑인을 데려온다고 하니 죽고 싶은 심정이다. 어머니는 어찌 해야 하는가? 어머니의 슬픈 얼굴과 속상함이 묻어난 말들 하나하나가 그 시절의 어려움을 느끼게 해준다. 애환이나 슬픔 같은 것, 그래서 눈물 나게 하는 그런 것이다.

 

연극은 소설을 그대로 만들었으되, 몇 가지를 바꾸기는 했다. 예컨대 '두 장의 사진으로 남은 아버지'는 소설의 경우 아버지가 대선 후보로 연설할 때 응원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연극에서는 장석조네 같이 사는 사람들이 있다. 조금씩 줄거리를 바꿔 '웃음'을 주려 한다. 또한 통쾌함을 주려고 한다. 소진의 추억을 좀 더 빛나게 그리려는 시도로 보인다.

 

하지만 그 이면에 담긴 애환은 어찌할 수가 없다. 소설을 볼 때처럼 연극도 코끝을 찡하게 만든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연극의 마지막 순간에 배우가 나눠주던 막걸리를 받아마셨다. 술을 좋아하지 않지만, 목이 타기에 그랬던 게다. 막걸리가 그렇게 달콤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것은 마치 이 슬픔들을 위로하는 것 같았다.

 

나오면서 새삼 살펴보니 관객석은 만원이 아니었다. 웃음을 주는 연극이나 유쾌한 사랑스토리로 꾸며진 연극에 많이들 가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경기가 어려워서 그런 것인지 모르겠다. 아쉽다. 우리의 역사에 묻혀 있던, 아니 어쩌면 지금도 만들어지고 있는 이 애환을 사람들이 모르고 지나간다는 것이 마음을 씁쓸하게 한다. 사람들이 알아줬으면 좋겠는데, 나는 그것이 못내 서운했다. 김소진이 그리 빨리 떠나갔던 것처럼 속상했다.


태그:#김소진, #장석조네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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