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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란 무엇일까. 대학 다닐 때 '정치외교학'을 부전공했지만 뚜렷한 답이 생각나지 않는다. 공자가 말한 바른 사람의 정치를 말한 공자의 '정자정야'(政者正也)나 권모술수의 정치를 말한 마키아벨리즘도 떠오르지만 공감이 가는 것은 없다. 하지만 마흔을 살아가면서 정치에 관해 느낀 한 가지가 있다. 바로 정치를 얼마나 잘하느냐에 따라 백성들의 삶에 큰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반면에 백성들은 정치에 상대적으로 무지했는데, 근현대 들어서 그 의식이 확대되고 있다는 정도다.

잘못된 정치는 백성들을 불안하게 한다. 더욱이 미래에 대한 확신이 부재한 정치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 점에서 이 정부의 정치는 불안하기 그지 없다. 다가올 중미 헤게모니 쟁탈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미국만을 추종하는 맹목적 시각, 통일은 고사하고 전쟁이라도 막았으면 하는 남북관계에 대한 무원칙, 빈부격차 확대 등으로 다가올 국민 분열에 대한 무대책으로 일관하고 있기 때문이다.

'징비록'의 핵심 스토리와 배경 등을 쉽게 풀어줬다
▲ 박준호가 풀어쓴 징비록 '징비록'의 핵심 스토리와 배경 등을 쉽게 풀어줬다
ⓒ 조창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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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점에서 임진왜란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겪은 반성의 기록인 서애 류성룡의 '징비록'은 큰 교훈이 되는 책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것은 1592년(선조 25년)으로 조선이 건국된지 꼭 200년만이다. 이미 조선이라는 나라가 완전히 자리를 잡은 시기다. 그때 전란을 대비하는 조선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박준호 연구원이 '징비록'을 해석한 '풀어쓴 징비록 류성룡의 재구성'은 그 모습을 잘 살피게 해주는 저작이다. 

이 책을 통해 본 당시 상황은 감히 무대책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우선 1592년 4월 13일 일본 병선은 부산 앞에 끝이 보이지 않는 대형 함대로 조선을 침공한다. 물론 이 침공의 앞인 1590년에 황윤길과 김성일을 통신사로 파견해 일본의 동태를 살핀다. 일본을 다녀온 두사람의 입장은 너무 달랐다. 황윤길은 전쟁의 징조가 있다고 보고하고, 김성일은 없다고 보고한다.

이 책에서 류성룡은 김성일도 전쟁의 징후가 있으나 국내의 혼란을 대비해서 그렇게 말했다고 하지만 정말 편협적인 사고다. 물리적인 힘이 승패의 절대적인 요인인 당시라면 통신사들은 현실을 그대로 보고해 하루라도 빨리 대비해야 했다. 하지만 통신사의 의견이 분열되면서 전쟁 대비는 상대적으로 약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어떠할까. 과거와 달리 국제정보가 만연한 시대이기 때문에 누구나가 국제관계를 예측할 수 있다. 지금 동아시아를 보면 너무나 뻔한 권력구도가 있다. 그저 조용해지기를 바라는 미국과 중국이 있는 반면에 궁지에 몰려서 무어라도 할 수밖에 없는 북한, 군사적 자위력을 확보하려는 일본이 마주하고 있다. 중국은 위기의 상황에는 언제라도 북한에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어하고, 미국은 정치산업적인 측면에서 남한에 대한 지배력을 버릴 수 없다.

지난 10년 동안 남북은 화해의 제스처와 공동성명 등으로 화해 분위기를 끌어갔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 들어서면서 과거 10년의 공은 날라갔고, 위기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문제는 이 사태의 최악이 전쟁과 같은 상황이고, 최선은 시간을 두고 남북이 가까워지는 것이라는 점이다. 최선의 상황을 기대하지는 않아도 최악은 막아야 하는데 지금으로써는 미래를 장담할 수 없다.

당시 정세에 대한 무지를 보면 분통이 치밀 정도다. 육군 상륙 루트인 부산은 물론이고, 전략적 요충인 조령, 배수진을 친 무너진 충주 싸움에서 볼 수 있듯이 조선 육군은 무대책으로 일관했다. 때문에 일본군은 말을 달리는 속도로 진격해 한양을 유린한다. 일본군이 조총이라는 신무기를 가지고 있었다지만 군대라는 조직을 가졌다고 하지 못할 만큼 엉터리 방어체계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당시에 조선군의 입장은 어떠했을까. 아마도 나름대로 체계를 갖추었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전쟁이 터지자 이 체계는 아무런 작동도 하지 못한다. 서애 역시 상주와 충주 싸움을 보고 자신이 전체를 관할하는 도제찰사로 내려가지 않았음을 후회한다.

이후에도 이런 전쟁에 대한 무지는 다양하게 나온다. 초반기 승세를 잡았던 전라, 충청의 5만명이 용인에서 2천명의 일본군에게 무너진 것(106페이지)이나 대동강에서 승기를 잡았다고 착각해 강을 건너 적을 공격하다가 쉽게 물을 건널 수 있는 왕성탄을 노출해 결국은 대패하는 평양전투(160페이지)도 마찬가지다.

결국 선조는 의주까지 피난가고, 기댈 수 있는 것은 명나라의 원군 뿐이었다. 하지만 명나라 원군은 전쟁의 승리보다는 자신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전장을 조선으로 유지시키는 게 목적이었다. 더욱이 명나라 부총병 조승훈이 2차 평양성 전투에서 대패하고, 이여송군이 여석령에서 패배함으로써 더 소극적이었다.

하지만 조선의 운명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순신이 이끄는 전라 수군은 한산대첩 등으로 일본의 예봉을 꺾는다. 또 함안과 의령을 거쳐 남원과 전주로 진격하는 일본군을 곽재우가 막고, 전주 웅치에서 이복남이 결사항전해 예봉을 꺾었다. 이후에는 고경명을 비롯한 김천일, 정인홍, 조헌 등이 막아낸다.

이 과정에서 류성룡은 치질로 인해 움직이는 것조차 불편한 몸을 이끌고 평양성 작전을 수행하는 한편 명나라 보급 등 중책을 해낸다. 전쟁이 끝나자 서애는 고향 하회의 옥연정사로 돌아가 이 책을 집필한다. 징비록(懲毖錄)은 말 그대로 "내 지난 잘못을 반성하여, 후환이 없도록 삼가네"라는 뜻이다. 그는 이후에도 고향에 은거하며 중앙정치와 무연하게 살았다고 한다.

사실 좌의정으로 임란을 맞은 그에게 실책이 없을 리 없다. 더욱이 전쟁이 나지 않는다고 한 김성일도 그와 같은 남인(南人)이어서 옹호해주려 한 측면이 있다. 물론 그가 권율이나 이순신을 천거해 전쟁에 대비했다고 하지만 실제 전쟁에서 보여준 것처럼 부산, 상주, 충주라인의 붕괴에는 책임이 있을 것이다.

또 전쟁의 후반에 이순신을 비롯해 의병장들의 대부분이 큰 고초를 겪음에도 당시 정치는 그들을 지키지 못했다. 류성룡이 징비록 안에서 백성을 대변해 썼듯이 "나라님이 우리를 버리고 가시면 우리는 누구를 믿고 살아야 합니까?"라는 탄식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임란이후 정치는 과거의 구태를 재현한 측면이 많은데, 류성룡 역시 여기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역사 콘텐츠에 관심이 많은 저자의 이 책은 '징비록'의 중요한 요소를 뽑아주는 한편 나름대로의 관점을 잘 투영해 편하게 썼다.


풀어쓴 징비록 류성룡의 재구성 - 난세에 진정한 영웅을 다시 만나다

박준호 지음, 동아시아(2009)


태그:#징비록, #류성룡, #징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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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케이아이테크놀로지 상무. 저서 <삶이 고달프면 헤세를 만나라>, <신중년이 온다>, <노마드 라이프>, <달콤한 중국> 등 17권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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