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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과의 만남

 

1978년생인 내가 정치인 노무현을 처음 접한 것은 1997년 대학교에 입학하고 나서였다. 인문사회과학을 전공하고자 했던 난 그해 가장 큰 이슈를 몰고 왔던 강준만의 <인물과 사상>에 푹 빠져 있었는데, 이를 통해 처음으로 지역주의가 우리 사회의 심각한 병폐임을 깨닫게 되었다. '전라도 빨갱이', '김대중 빨갱이' 등 내가 20년 동안 암암리에 배워왔던 것들을 전복시킬 때의 그 쾌감이란.

 

선배들은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 이분법에 기대어 우리 사회를 계급론적으로 설명하려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득력이 부족했다. 결정적으로 그들은 왜 가난한 이들이 자신의 계급을 배신하고 오히려 극우 지도층에게 표를 몰아주는지 설명하지 못했으며, 그들의 대책 역시 항상 엘리트주의에 기반을 둔 계몽주의에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강준만이 끊임없이 이야기하던 지역주의는 한국사회를 분석하는 데 있어 분명 매력적인 분석도구였다. 지역주의는 우리 사회가 걸어온 궤적과 지금의 상황을 가장 적절하게 설명해냈다. 그것은 해방 이후 급격한 산업화를 거치면서 우리 사회에서 지역에 대한 편견이 어떻게 생성되었는지 보여주었으며, 그 편견을 이용하여 기득권들이 어떻게 권력을 유지하는지 가르쳐주었다.

 

지역주의는 대중의 패배주의와 정치에 대한 냉소에 기생하고 있었고, 기득권들은 그 지역주의에 기반하여 자신의 권력을 재생산하고 있었다. 전라도 죽이기로 대표되는 지역주의가 결코 오래된 진실이 아니라 기득권의 권력유지를 위한, 얼마 되지 않은 독재의 유산이란 깨달음.

 

내가 노무현을 알게 된 것은 바로 그때였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걸고 지역주의와 싸우는 이였다. 썩어빠진 우리 정치 바닥에서 유일하게 원칙을 이야기하는 이였으며, 자신의 이익과 상관없이 그 신념을 따르던 이였다. 5공 청문회 당시 권력을 향해 명패를 던지고, 3당 합당이 야합이라고 당당히 손을 드는 노무현.

 

노무현은 단순히 지역주의 타파만을 외친 것이 아니었다. 결국 진보가 이야기하는 상식적인 좌/우파의 대립, 아니 더 나아가 정상적인 사회발전의 전제 조건이 지역주의 극복인 이상 노무현은 가장 근본적이지만 가장 어려운 정치적 테마에 도전하고 있던 돈키호테와 같은 정치인이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치인 노무현을 훌륭한 정치가라고 평가했지만, 그가 더 이상 클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우리 정치 바닥에서 큰 인물이 되기에 그는 너무 원칙적이었고 고집불통이었다. 가만히 있으면 국회의원이 될 걸, 지역주의를 깨겠다고 굳이 부산에 가 떨어지는 바보가 어찌 이 썩은 대한민국의 정치 바닥에서 클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정치에 관해서 모두 패배주의에 빠져 있었고, 기득권들은 그 패배주의에 기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노무현의 재발견

 

많은 이들이 그랬듯 내가 노무현을 다시 바라보게 된 것은 2002년 민주당의 대선 후보 경선을 통해서였다. 도저히 대통령이 될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그가 사람들에게 '희망'이란 메시지를 던져주며 강력한 대선후보로 부각되었던 것이다. 원칙이 통하고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회, 온갖 차별 없이 살 수 있는 사회.

 

사람들은 그에게 열광하였으며, 그를 통해 미래를 설계하기 시작했다. 정치에 냉소적이었던 사람들이 노무현을 통해 다시금 열정을 갖기 시작했으며, 나 역시 그를 통해 현실정치의 가능성을 보기 시작했다. 어쩌면 내가 꿈꾸던 세상이 그를 통해 좀 더 빨리 다가올 수도 있다는 막연한 기대와 함께.

 

비록 나의 정치적 지향은 민주당의 노무현 후보보다 민주노동당의 권영길 후보에 가까웠지만, 이미 나의 표심은 노무현 후보에 기울어 있었다. 극우화된 우리 사회가 정상화되려면 그와 같은 대중정치인이 대통령이 되어 사회를 좀 더 민주적이고 탈권위적이며 투명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들의 막연한 이상을 현실 정치에 접목시킬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그것을 자신의 삶으로써 증명했고, 또 현실에 안주하지 않은 채 끊임없이 증명하고 있었다. 보라. 과연 그가 아니면 그 누가 장인어른의 빨치산 경력에 대해 시원하게 받아쳐 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난 내 손으로 직접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뽑지 못했다. 그해 여름 캐나다로 어학연수를 떠난 까닭에 이역만리에서 인터넷을 통해서나마 그를 지지할 수 있었다. 당시 많은 유학생들이 그랬듯이 난 부모님께 이회창이 대통령으로 당선되면 귀국하지 않을 것이라 으름장을 놓았고 매일 메일을 통해 부모님들을 설득했다. 노사모에 후원금을 보냈으며, 정치에 관심 없는 친구들에게는 뜬금없이 연락하여 나 대신 노무현 후보에게 투표해주길 종용했다.

 

그리고 투표일. 전날 정몽준의 배반 소식과 함께 조선일보의 그 유명한 사설 '정몽준, 노무현을 버렸다'를 읽은 이후 난 모니터에서 잠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난 새벽부터 무가지 신문을 수거하느라고 애를 쓰는 이들과 함께 했으며, 아침부터 정몽준 소식을 고장 난 축음기마냥 보도해대는 SBS를 보고 분노했다. 과연 그가 이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 대통령이 될 수 있을까?

 

캐나다 시간 아침 7시. 엄기영 앵커가 그의 당선 소식을 활짝 웃으며 전했다. 만세! 드디어 새로운 대한민국이 열리는가. 선거개표방송이 이렇게 스릴 넘치고 재미있는지는 그때 처음 알았다.

 

대통령 노무현에 대한 기대와 배신

 

역시 개혁이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를 통해 실현되리라 생각했던 개혁은 더디기만 했고 기득권의 공격은 악랄해져갔다.

 

나의 일과는 조간신문을 앞에 두시고 혀를 끌끌 차는 아버지를 설득시키는 일로 시작되었다. 그것은 아들 말 믿고 노무현 뽑은 죄로 친구들에게 왕따 당하시는 아버지께 내가 해야 하는 최선의 도리였다. 아버지는 그때마다 당신의 친구가 되었고, 나는 아버지가 되어 노무현의 시대적 정당성을 설명해 드려야 했다.

 

대통령이 가볍고 경망하다면 그것이 바로 탈권위라고 항변하였으며, 대통령의 그런 사진만 골라 올리는 보수신문들의 불순한 목적을 지적하였다. 대통령이 북한에게 퍼주고 반미를 선동하는 것 같다고 한다면 그것이 곧 평화를 위한 일이며, 자주국가의 당연한 의무라 대응하였다.

 

노 대통령을 믿었기에, 난 그가 아프가니스탄 파병을 결정한 후 몸은 비록 국회 앞에서 전경과 부딪힐지언정 대통령으로서 어쩔 수 없었던 결정을 이해하려 하였다. 탄핵 기간에는 촛불로 광화문을 밝혔음은 물론이었다.

 

그러나 나 역시 차츰 지쳐가기 시작했다. 우여곡절 끝에 과반수가 넘는 정당을 만들어 주었음에도 지지부진한 개혁과 노무현 대통령의 계속되는 '좌회전 깜빡이 후 우회전'은 그야말로 실망이었다. 물론 내가 권했던 터라 부모님과 친구들 앞에서는 의연함을 가장했지만, 어쨌든 재임 중기부터 나는 다시 정치에 냉소를 머금기 시작했다. 대학원 졸업 후 취업을 위해, 먹고살기 위해 바쁜 점도 있었지만 그것은 분명 패배주의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비록 다음 대선 당시 이명박을 뽑은 건 아니었지만 난 또다시 정치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꿈을 버렸다. 언제부터인지 무능력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노무현을 바라보면서 역시 그 바닥이 다 그렇고 그렇다며 자괴감에 빠지곤 했다. 역시 우리 사회에서 개혁을 바란다는 것은 먼 일이던가. 그도 힘들었는데 하물며 내가 꿈꾸는 사회민주주의는 역시 얼토당토않은 꿈일 뿐인가.

 

그리고 또 다시 노무현

 

학창 시절 품었던 꿈을 채 버리지 못한 터라 아직까지도 글을 읽고 쓰고, 촛불도 드는 나이지만 어느새 결혼하여 대충 현실과 타협하더라도 부끄러움을 모를 만큼 탁해진 나.

 

그런 나에게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은 큰 충격이었다. 단순히 그를 지지했던 이로서 느끼는 슬픔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미 많은 이들이 지적했듯이 나 자신에 대한 책망과 부끄러움이 포함되어 있는 슬픔이요, 눈물이었다. 그를 지켜주지 못한 것도 그랬지만, 어느새 패배주의에, 그리고 타성에 젖어있는 나에 대한 채찍질이었다. 내가 7년 전 무엇 때문에 노무현을 지지했었던가.

 

아마도 많은 이들이 흘린 눈물에는 나와 같은 회한과 부채의식이 섞여 있었을 것이다. 현실이란 무게에 모든 가치를 은근슬쩍 도외시하던 소시민들이 자신의 죽음을 통해 그 가치의 소중함을 일깨워준 노무현을 위해 흘린 눈물일 것이다. 그분이 돌아가신 자리, 유독 많은 이들이 아이들을 앞세운 것은 결국 그 가치를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그분에게 분향하기 위해 수고를 마다 않고 줄을 서 있는 사람들. 나는 그들에게서 또다시 희망을 찾아본다. 결국 그들이 몸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모든 이들이 돈만 쫓는 천박한 현세에 대한 거부가 아닐까? 물론 그 마음이 사회적 현상으로, 현실로 드러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리겠지만 말이다.

 

이제 노무현 대통령이 돌아가신지 일주일이 지났다. 세상은 여전히 혼탁하고 혼란스럽기 짝이 없다. 경찰은 그 추모 분위기를 지우기 위해 원천봉쇄에 나섰으며, 통합만을 강조하며 악어의 눈물을 흘리던 보수신문들은 '북한핵'으로 사람들을 겁주고 위협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어찌 살아남은 자의 몫을 피할 수 있겠는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소처럼 뚜벅뚜벅 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걸어갈 뿐이다.

 

그동안 혼자 무척 수고 많으셨습니다. 당신의 뜻대로 '희망'을 가슴 속 깊이 품은 채 열심히 살아가겠습니다. 부디 편히 쉬십시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유포터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노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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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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