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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에 대한 울분과 슬픔이 가시지 않은 지난 6월 1일 아침, 평소 존경하던 (故) 이은주(영화배우)양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았다. 몇 차례 문병을 다녀오며 예상은 했지만, 막상 소식을 접하니까 "아~!"하는 탄식소리가 절로 나왔다.  

 

작년 8월 고향으로 이사해서 아내와 첫 문병을 갔을 때였다. 커피 물을 끓이러 간 간병인을 부르더니 "이 친구는 지금 세상에서는 보기 어려운 젊은이에요. 앞으로 길에서 만나면 나하고 똑같이 대해주세요"라고 극찬하면서 말끝마다 "고맙네!"를 붙이셔서 얼마나 송구스러웠는지 모른다.   

 

휠체어에 몸을 의지하고 있었는데, 간병인이 나에게 어디에 사셨느냐고 물었다. 째보선창에서 가까운 공설운동장 근처 골목에 살았다고 하니까, 웃으면서 "옛날이는 그 근처가 전부 깨꼬랑이고 변두리였어요"라며 대화에 끼어들 정도로 정신이 맑았는데 돌아가시다니 충격이었다.

 

노 대통령 서거 다음날인 지난달 24일, 선수 시절부터 형님 동생 사이로 가깝게 지내던 전 축구국가대표 최재모(1970-1974년 국가대표 수비수)씨가 위암으로 투병하다 6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는 연락을 받고 마음 아파하다 전화를 받았으니 탄식이 나올 수밖에. 

 

노 전 대통령 서거 후 열흘 가까이는 궂은 소식이 겹쳐 푸른 하늘을 바라보기도 어려울 정도로 침울하고 고통스러운 나날이었다. 고인들을 애도하는 마음도 마음이지만, 내가 그만큼 저승 문턱에 가까이 가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더욱 심란했는지도 모른다.

 

지난 1일 새벽에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고, 그날 밤 아내 퇴근 시간에 맞춰 문상을 다녀왔다. 투병 생활은 했지만 87세에 작고하셨으니 천수를 다했다 해도 과언이 아닐 터이다. 그런데 장례식장에 들어서는 순간, '무척 검소하고 성실했던 분이, 말년에 고통을 감내하다 생을 마감하다니' 하는 생각에 허무감이 밀려왔다.

 

밤이 너무 늦어 상주들이 피곤함에 지쳐 긴 얘기를 나누지 못했다. 결혼을 적극 찬성했고, 바쁜 와중에도 웨딩앨범을 제작해 주었던 고 이은주 양 아버지(둘째아들)는 "형님, 고향으로 이사하셨으니까 앞으로는 연락을 끊지 말고 지내시지요"라며 명함을 건네주었다.

 

발인하는 날(3일) 아침 일찍 둘째아들에게 전화했더니 받지 않았고, 막내아들도 연결되지 않아 답답했다. 그런데 조금 있으니까 연락이 왔다. 발인예배를 보느라 받지 못했다며 장례 정차가 모두 끝났다고 조문해줘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빠뜨리지 않았다. 

 

지난 2월 26일에도 '고(故) 이은주양 할아버지 문병을 다녀오다'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쓴 적이 있다. 옛날에는 '사장님!'이었는데 손녀가 TV드라마에 출연하고 스타가 되니까 호칭이 '이은주 할아버지'로 바뀌었다. 그런데 나는 처음부터 '아저씨'라고 불렀고, 지금도 '아저씨'가 더 정겹고 편하다.    

 

아저씨는 젊었을 때 군산어업조합 이사를 지냈기 때문에 째보선창에서 쌀가게를 했던 어머니와는 진즉부터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그래서 어머니를 통해 어떤 분인지 조금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1972년 4월 아주머니(고 이은주양 할머니)가 운영하는 보석상 일부를 인수하면서 인연이 하나씩 쌓여갔다.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이런저런 추억들

 

평소 존경하던 분으로 젊었을 때는 생활의 지표가 되기도 했던 아저씨가 돌아가시니까, 옛날에 있었던 일들이 하나씩 떠오르며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데 얼른 생각나는 세 가지만 소개한다.

 

# 전두환 사진

 

아주머니 권유로 가게 모두를 인수해서 운영을 잘하고 있는데, 2년쯤 지난 어느 날 갑자기 다시 원위치로 돌아가자고 했다. 나이도 먹고 했으니 그만 둔다며 자꾸 인수하라고 해놓고는 이제 와서 처음으로 돌아가자니 말이 되느냐며 따지다 어쩔 수 없이 번화가에 가게를 얻어 갈라져 나왔다. 속이 무척 상해 한동안 연락을 끊고 지냈는데 친형처럼 따르던 아들들이 결혼하면서 왕래를 하게 되었다.

 

80년대 초로 기억하는데 하루는 아저씨 댁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니까 거실 문갑 위에 조그만 사진액자 2-3개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 가서 보니까 이름만 들어도 소름이 끼치던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큰사위가 근무하는 부대를 시찰하면서 악수하는 모습이었다.

 

액자를 보니까 피가 끓어오르고, 기분이 상했다. 그러나 속마음 그대로를 표출하지 못하고 "왜 저 사진을 사람들이 많이 보는 곳에 진열했데요?"라고 물었다. 그때야 아저씨는 액자를 하나하나 확인하더니 "이따위 사진을 왜 여기에다 놔두고 그래, 당장 치워!"라면서 호통을 쳤고, 사진은 바로 사라졌다. 그 일로 해서 더 존경하게 됐는지도 모르겠다. 

 

# 전화 받는 요령을 터득하다

 

전화예절과 받는 요령을 배우기도 했는데, 생각하면 할수록 쓴웃음이 지어진다. 전화를 한 사람이 먼저 자신의 신분을 밝혀야 한다는 것은 일반적인 상식이다. 그런데 사업을 하는 아저씨에게는 경찰서나 세무서 등에서 협조(?)를 구하는 전화가 심심찮게 걸려왔다.

 

가게와 안집, 창고를 합하면 200여 평 가까이 되었는데, 아저씨를 찾는 전화를 종업원들이 받으면 항상 수화기를 나에게 넘겨주었다. 그러면 나는 "어디신가요?"라고 묻고 신원을 확인하면 "글쎄요, 계시는지 확인해보겠으니 끊지 마시고 잠깐 기다리세요"라고 말하고 안으로 들어가 전했다. 그래서 만나지 못할 사람에게는 "죄송합니다. 조금 전까지 계셨는데 언제 나가셨는지 안 계시네요"라며 적당히 둘러댔다. 전화를 아무나 바꿔주거나 사실대로 전하면 아저씨가 곤란한 처지에 놓일 수 있기 때문에 거짓말을 안 할 수가 없었다.

 

다행히 전화 음성 기억력이 좋아 상대방 목소리를 잘 기억했다. 그래서 아저씨가 받을 전화인지 받지 말아야 할 전화인지를 금방 파악했고, 손 사장, 송 사장, 최 사장 등 자주 어울리는 분들이나 은행에서 걸려오는 전화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연결 해 드렸다. 박정희가 국부였던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가방끈이 길든 짧든, 무식하든 유식하든 완장만 하나 걸쳤다 하면 먹자판으로 알고 똥파리처럼 달려들던 시절이었으니까.

 

# 절약정신

 

고인이 되신 아저씨 흉을 하나 봐야겠다. 절약정신이 강했고, 생활에 빈틈이 없던 아저씨는 뒷문 창고 옆에 있는 화장실을 퍼낼 때도 가게에서 심부름 하는 꼬마 '일환이'를 불러 보초를 서게 했다. "요즘에는 똥 푸는 사람들도 지게 수를 늘려 돈을 받아가니까 지켜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20대 중반이었던 나는 그들이 속이면 얼마나 속이고, 또 몇 지게쯤은 눈감고 속아줘도 재산이 줄어들거나 피해를 보는 것도 아닐 터인데, 너무 야박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저씨, 냄새도 나고 하니까 '일환이'보고 그냥 들어오라고 하지요"라며 건의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건 '지켜야 한다'는 메아리뿐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해서 직접 가서 똥 푸는 아저씨에게 수고하신다며 말을 걸었다. 그러나 기분이 무척 상했는지 이마에는 갈매기 무늬를 긋고, 입을 뾰로통하게 내밀고는 자기 할 일만 했다. 그래도 자꾸 말을 걸었더니 겨우 한다는 소리가 "다시는 여기치 똥은 안 풀랍니다"라고 해서 더 말을 못하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당시에는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구두쇠 같은 양반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고, 재벌들의 절약정신과 생활철학을 간접적으로나마 느껴보니까, 아저씨가 1원도 헛되이 않도록 지키는 자세로 살지 않았으면 그만한 재산을 모으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고인이 되신 아저씨는 대기업을 여러 개 거느렸던 당시 '한국 합판' 고판남 회장이나 '백화 양조' 강정준 사장과도 잘 어울렸는데 그들도 '이 사장님!'이라 부르며 깍듯하게 대했고, 훗날에는 "영화배우 이은주네 할아버지"로 불렸다. 그러나 나에게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아저씨'일 뿐이다. 앞으로도 젊은 시절 삶의 지표가 되었던 '아저씨'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아저씨! 이승에서의 모든 번뇌와 고통을 모두 잊으시고 하늘나라 좋은 세상에서 영생하시기 바랍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신문고뉴스(http://www.shinmoongo.net/)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이은주할아버지, #아저씨, #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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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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