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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다니던 시절, 두세 번 같은 코스로 다녀와 이제 물린다며 금강산을 마다하던 사람들 틈에서 난 한번도 금강산조차 못가봤다며 어거지로 다녀왔던 단 한번의 금강산 기행. 그것이 이북에 발을 내딛었던 처음이자 마지막의 기억이었다.

 

그런 내가 단번에 개성행을 할 수 있게 됐다. 졸업 후 일을 시작한 겨레하나에서 돼지농장 관련 실무회담 참석을 한다는 명목이었다. 2007년 6월 21일, 잊을 수 없는 그 날이었다.

 

설레며 기다리다가 기다림에 지쳐 막상 가기 전날, 떨리냐는 사람들에게 뭐 그냥 덤덤하다는 대답으로 억울하게도 원성(?)을 사기도 했다. 카메라, 펜, 종이, 뭐 하나 챙겨간 게 없었으니 좀 문제가 있긴 했다.

 

내가 본 개성

 

 스스로 의아스러울만치 감정의 요동이 없던 내가 비로소 떨리기 시작한 건, 이남 출국심사대를 거쳐 이북 입국심사장으로 향하는 그 길에서부터..

 

출국심사와 입국심사를 거치며 까먹은 한시간은 서울에서 개성까지 가는데 걸린 시간과 맞먹는 시간이었다. 이제 녹슬어가는 분단이란 남과 북의 경계,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그 낡고 위태로운 선 위를 걷는 기분이라고 할까. 조금은 아쉬운 감정이 뒤섞인 떨림이었다.

 

이북입국심사장을 나오니 이미 민화협 북측 본부 분들이 마중을 나와계셨다.

 

사무총장님을 비롯해 오랫동안 활동해온 분들을 너무나 친숙하게 맞이하는 그 분들. 떨렸던 내 마음은 마치 위안을 받는 듯 그 편안하고 낯가림없는 분위기 속에서 조금은 차분해질 수 있었다. 차 검사를 마치고 봉고차에 오른 우리는 마중나온 선생님들 차를 따라 개성 시내를 가로질러 실무회담을 할 호텔로 향했다.

 

 입국심사장을 벗어난 지 2~3분, 개성 시내를 지나며 난 처음보는 개성시내와 이북 동포들 모습에서 그들의 삶을 직면할 수 있었다. 유리창을 통해 바라보는 그들은 너무도 자주 봐왔던 익숙함으로 다가와 익숙하단 내 감정이 낯설 정도였다. 그 낯선 감정 덕에 난 비로소 내가 있는 이 곳이 개성이라는 느낌을 조금, 아주 조금 받을 수 있었다.

 

이남에서 이북으로 오며 느꼈던 건, "워매- 뭐 이렇게 사람이 많다야-" 요런 느낌. 정말 많은 사람들이 개성으로 넘어가기 위해 절차를 밟고 있었고, 그렇기에 이제 개성시민들은 이남사람들 차량이나 이런 것들이 그닥 낯설지 않다고 했다. 그럼에도 지나는 우리 차를 다들 힐끔힐끔 바라보며 이따금씩 손흔들어주는 이들이 있었다.

 

모래로 덮인 인도 사이사이에선 아이들이 삽으로 모래성을 쌓으며 옹기종기 모여 놀고 있었고, 물통을 이고 가는 아주머니, 새침하게 분을 바르고선 친구와 팔짱을 끼고 수다를 떨며 지나가는 학생들, 어디서든 만날 수 있는 모습, 그러나 내 평생 처음으로 바라보는 이북동포의 삶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정겨운 그 모습들이 하나하나 놓치기 아쉬워 빠르게 달리는 차를 원망하며 차창 밖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첫 실무회담과 개성에서의 만찬

 

 

그렇게 5분쯤을 달렸나. 우리는 첫날 실무회담을 진행할 '자남산려관'(호텔) 에 도착할 수 있었다. 4층이었나, 5층이었나, 회의장에 도착한 우리는 네가지의 회의 안건을 1시간 반만에 해야했기에 두 팀으로 나눠 실무협의를 시작했다.

 

한현우 선생님, 박영희 선생님과 인천본부가 먼저 '치과병동'사업 관련 실무협의를 했다. 옆에서 회의 모습을 지켜보며 조금 긴장도 되고 이렇게 하나하나 만들어가는구나 싶은 손에 잡히는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이어서 서울본부의 '돼지농장'사업 실무협의를 했다. 하면서 아, 진짜 잘해야지..돼지농장 사업은 이북 동포들과의 소중한 약속이야..이런 생각들을 새삼 할 수 있었다. 실무협의는 현재 진척 상황을 이야기나누고, 설계도를 드리고, 앞으로의 계획들을 간단히 공유하고선 7월말 실무자들의 실무협상을 기약하며 마무리했다.

 

그리고 시간은 12시... 아침에 딸랑 토마토쥬스 하나 해먹고 나온 내가 학수고대했던, 점심식사시간이 아니겠는가!!

 

 

식사는 호텔 옆 평양냉면집에서 했다. 2층으로 올라가니 한복을 예쁘게 차려입은 언니들이 우리를 맞아줬다.

 

세상에, 웬일이니~ 맛내기(조미료의 이북말)의 그 텁텁함이 느껴지지 않는 담백한 맛!! 맙소사!! 아주그냥 입에 착착 감겼다.

 

나는 함께 실무회담을 했던 한현우 선생님과 같은 테이블에서 함께 식사를 하게 됐다. 한현우선생님은 이남사람들이 이북음식을 담백하다 많이들 그러는데 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알쏭달쏭해 하셨다 ㅋ  식사를 하면서는 한현우 선생님과 많은 대화를 할 수 있었다.

 

한현우 선생님과 리동혁 선생님

 

 

 

당시 33살이라는 한현우 선생님(완전 핸섬가이^^)은 그 때 당시엔 민화협에서 일하신 지 4개월정도 되신 신참이셨다. 2월달 겨레하나 회담이 금강산에서 있었을 때가 처음 이남 사람들과 마주해본 경험이라 하셨다. 나도 그러고보니 처음으로 이북 사람과 마주하며 오란도란 얘기를 나눠본 경험은 바로 지금, 한현우 선생님이 처음이었다. 그 처음이란 감정이 전혀 다가오지 않았지만...너무 닮았다는 말조차도 머쓱한 남과 북이기에 난 굳이 내가 이남 사람, 한현우 선생님이 이북 사람이란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신참끼리여서 그랬는지 선생님과는 뭔가 각별했다. (잘생기셔서 그랬었는지도? ㅋㅋ) 이런 저런 얘기가 오가며 우린 참으로 오래 만난 사람들 같았다. 속된 말이 아니라 정말 그랬다. 

 

28일에 평양·백두산 참관을 가시는 선배들은 선생님께 그 때도 오시냐며 물었고, 선생님은 일정이 있긴 한데 꼭 가려고 한다면서 그 때 일정들을 이야기하며 다시 만날 기약을 하고 있었다. 가고싶단 생각을 아예 안한 바 아니지만, 전혀 욕심내지 않았던 나는 선생님을 다시 뵐 수 있다는 것에 순간 선배들이 초 부럽부럽 ㅠ

 

"전 사무실을 열심히 지키고 있을게요"

 

아쉬움에 툭 나온 내 한마디에 선생님이 눈을 휘둥그레 뜨시며 '안오십니까?' 물으셨다.그러더니 같이 있던 선배들에게 '이이진아 선생님도 오게 해주십시오~' 하시는데, 이놈의 눈물샘이 민망하게 때와 장소를 가리지 못하고 눈물을 고이게 만들었다.

 

다시 만날 수 있는 사람. 이북과 이남, 아주 가까이 한편 아주 멀리 살고 있지만 우린 다시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 사실이 정말 기뻐 그렇게 눈물이 고였었다.(근데 결국 이것이 선생님과 만나뵌 마지막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휴식을 취할겸, 이것저것 엄마 선물도 살겸, 호텔 주변을 서성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호텔 로비 중앙에 걸린 김일성 주석과 외국인들이 만나고 있는 모습을 그린 유화작품(대따시 크다)을 보고 있는데 넌지시 한현우 선생님께서 '뭘 그리 보십니까~' 하며 옆으로 오셔서 그 사진 설명을 해주셨다.

 

고려역사박물관 예약시간까지 아직 시간이 좀 남은 덕에^^ 우린 쇼파에 앉아 담소를 나눌 수 있었다. 선생님은 너무 서운해 말라며 다시 한 번 위로를 하며,

 

"아마 빨리 다시 보겠죠. 최대한 그 기간을 좁혔으면 좋겠습니다."

 

하며 웃어보이셨다-

 

"이이진아 선생님 맞죠?"

 

실무회담 시작 전, 서로 쭉 소개하던 자리에서 한명씩 통성명한 게 전부였지만 선생님은 이름을 기억해주고 계셨다. 뭐 나역시 그랬지만^^

 

"기억하겠습니다"

 

그 말이 너무 짠해 아까 선생님의 '안오시냐'는 질문에 눈물날뻔 했다고 이야기했다. 약올라서 그랬냐길래 그런게 아니라며 선생님들을 다시 뵐 수 있구나 생각하니 너무 좋았다고 하니 선생님도 그렇죠~ 하시며 씽긋 웃으셨다.

 

 

 

운이 좋게 이 날 고려박물관 예약을 해두신 민화협 선생님들 덕에 우린 고려박물관을 관람할 수 있었다. 오는 둥 마는 둥 했던 빗줄기가 조금씩 굵어지길래 난 우산을 피고선 같이 우산을 쓸 분을 찾았다. 옆에 계셨던 리동혁 선생님께 우산을 받치며 같이 쓰자 했더니 괜찮다 마다하시던 선생님께서 우산을 받아 들어주셨다. 학교는 어딜 나왔냐 하시길래 경희대학교를 나왔다 했더니 05년 평화의 전당 청년학생 상봉모임때 가봤다 하셨다.

 

"아, 저 그 때 열심히 환호하고 있었어요!!" 했더니

 

"아 그랬습니까?" 하시며 신기해하셨다.

 

그러더니 눈매가 참 이쁜데 아나운서 하지 그랬냐고ㅋㅋ 너무 감동받아 하자 남측에선 인정못받냐 하셔서 마치 억울하다는 듯(ㅋㅋ) 네~!!! 했더니 다들 눈이 삐었다며- ㅋㅋ

 

오랜만에 비행 좀 할 수 있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누며 예쁘게 도담도담(나만의 의태어) 꾸며진 박물관을 거닐다 보니 맘이 참 순해지는 느낌이었다. 첫인상은 참 무서웠지만 차분한 목소리로 자상하게 대해주시는 리동혁 선생님의 마음이 전해져 그랬던 걸까^^ 

 

아쉬운 이별

 

그렇게 박물관을 쭉 둘러보고서는 서둘러 다들 차에 탑승했다. 탑승하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가 지금 다시 이북 출국심사장으로 가고있다는 걸 알았다. 고작 반나절을 만날 것이었기에 뭐 정 들겠어~ 했던 게 솔직한 내 아침의 마음이었다. 근데, 정말 고작 반나절 만났는데, 엄습해오는 헤어짐의 아쉬움은 거의 두려움 혹은 무서움과 흡사한 그것이었다.

 

다시 만날건데, 다시 만날거니까.

 

바보같이 어린티 내며 울지 말자고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히며 거리의 이북 동포들에게도 몰래 아쉬움의 작별인사를 전했다. 들어올 때보다 너무 짧게 느껴지는 거리.

 

그렇게 순식간에 도착한 이북 출국심사장. 한현우 선생님과 사진을 찍지 못한 아쉬움에 사진촬영이 되나 확인해봤는데 안된단다. 허탈..ㅠ

 

선생님들과 '다시 만납시다' 악수를 하는데, 참 손이 따뜻했다. 마음의 온도를 충분히 높여줄만큼의 따뜻함이었다. 한현우 선생님과는 아쉬움에 악수치고는 꽤나 오래 손을 위아래로 흔들며 쉽사리 놓지 못했다. 눈도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다들 거래처 들렀다 가는 분위기 틈에서 혼자 눈물을 보이는 창피를 당할 수는 없다는 오기였다랄까?

 

선생님은 다시금 '다음 번 만날 날을 최대한 땡겨봅시다' 하셨다.

 

몇 번이나 다시 뒤를 돌아보며 안녕히 계세요. 안녕히 계세요. 인사를 하는데 발이 참 떨어지지가 않았다. 

 

심사절차를 밟던 중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이남 동포들을 보낼 때 뒷모습 보는게 너무 싫다시던 한현우 선생님은(그래서 배웅을 안하기도 했었단다) 이미 등을 돌리고 계셨다. 그 뒷모습을 보며 선생님이 싫다 했던 그 감정이 이런 거였겠구나 생각했다.

 

좀 전까지 함께 식사하고, 눈마주치며 얘기하고, 부담없이 웃어제꼈던 사람들과 갑자기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막혀 있었다.

 

그렇게 서울에 와서도 한참 난 선생님들이 생각나 그리움에 애타야 했다. 전혀 낯선 이들같지 않고 뭔가 따듯함을 주고 받았던, 사상과 자라온 환경과 그 무엇이 다르다 할지라도 그게 같은 사람은 이 세상에 누구도 없듯이 그정도의 다름이었다. 핸드폰을 열 때마다 난 왜 선생님들과 연락할 수 없는 거지... 이런 엉뚱한 생각에 눈물이 났었다. 세상 반대편에 있는 이들과도 통화할 수 있는 요즘 세상에 말이다.

 

다시금 2년 전 기억을 자주 떠올리는 요즘...

 

이 기억으로 난 더이상 북 소식이 남얘기일 수 없고, 남북관계가 무관심한 문제로 치부할 수 없게 되었다. 물난리가 났을 때에도 선생님들 괜찮으실까 걱정이 됐었다. 요즘도 선생님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계실까. 궁금했다.

 

구체적 관계는 그래서 참 중요하다. 단순히 한민족이란 단어속에 묶여있던 북이 더이상 그 정도가 아닌거라. 그런거라. 한현우 선생님은 대남교류사업을 얼마 안해보신 분이라서 이남 사정을 정말 잘 모르셨다. 그랬던 선생님이 정말 의아스럽게 물었었다.

 

"아직도 남쪽 사람들은 우리가 무섭고 못된 사람들이란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까? 6.15 공동선언도 함께 했는데도 아직도 그렇습니까?"

 

그 질문에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요즘 남북관계를 보면 그저 웃지만 말고 얘기할 걸 그랬다.

 

"저랑 선생님이 만난 것처럼, 이렇게 자주 만나면, 그렇게 생각 안하게 될 거예요."

 

하고 말이다.

덧붙이는 글 | http://our-dream.tistory.com/63 중복게재


태그:#개성, #남북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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