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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라면 와야죠. 우리가 무슨 힘이 있나."

"4대강 정비한다니까 왔지! 묻지 마세요! 할 말 없습니다."

 

23일 오후 3시 40분. 경기도 과천 한국수자원공사 수도권지역본부 건물 앞. 검은색 세단이 줄줄이 밀려든다. 딱 봐도 '급' 좀 돼 보이는 인물들이 내린다. '안내' 목걸이를 목에 건 수자원공사 직원들이 머리 숙여 인사한다.

 

세단을 타고 등장한 이들은 정부 공공기관 기관장으로서 모두 사장, 이사장, 원장, 은행장 등이다. 한 마디로 해당 기관 '넘버 원'들이다. '넘버 원'들의 목적지는 수자원공사 대강당. 이곳에서는 기획재정부 주최 '4대강 살리기 공공기관 기관장 워크숍'이 예정돼 있다. 하지만 목적지로 직행하는 '넘버 원'은 단 한 명도 없다.

 

전국 공공 기관장 '총 집합'... 출석 체크 후 4대강 사업 홍보 교육

 

공항 검색대를 통과하듯 출입구에 마련된 책상에 고개 숙여 뭔가를 적고 들어간다.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넘버 원'들은 스스로 펜을 들었다. 이들이 기록한 건 자신의 이름과 직책. 일종의 '자진 출석체크'였다.

 

예외는 없었다. 정형근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도, 민유성 한국산업은행장도, 전 한나라당 의원인 안택수 현 신용보증기금 이사장도 이름과 직책을 빠짐없이 적고 입장했다. 그래야만 출석을 했다는 확실한 물증이 된다. 이들이 꼼꼼히 출석을 체크한 이유는 있다.

 

 

이번 행사를 주최한 기획재정부는 지난주 해당 공공기관에 이런 내용이 적시된 공문을 보냈다.

 

'불참자와 참석자 명단을 총리실에 통보함.'

 

정부의 4대강 홍보 교육에 불참하면 정부에 이름을 알린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이번 교육은 '넘버 원'들을 대상으로 한 반강제 교육인 셈이다. 그래서였을까? '넘버 원'들의 출석률은 대단히 높아 90%를 훌쩍 뛰어넘었다. 전체 기관장 285명 중 280여 명이 참석했다.

 

당연히 이 중에는 4대강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기관장도 포함돼 있다. 한국조폐공사 사장, 대한장애인체육회 회장, 국민연금공단 이사장, 강원대학병원장, 경북대학병원장, 한국소프트웨어진흥원장, 심지어는 한국영상자료원 원장까지.

 

보통 국회의원들은 동료 의원들이 주최하는 행사에 참석하면 '출석 체크'만 하고 대개 금방 자리를 뜬다. 하지만 이날 공공기관장들은 그런 '땡땡이' 마저 칠 수 없었다. 기획재정부가 홍보 교육을 마친 뒤 사전에 배포된 설문지를 따로 받았기 때문이다.

 

"불참자 명단 총리실에 보고"... 반강제 참여

 

설문지에도 역시 기관명과 이름, 그리고 서명을 하도록 돼 있다. 설문지에는 해당 기관에서 '4대강 살리기 사업' 홍보를 위한 자체 교육을 수립했는지, 계획이 있다면 언제 몇 시간 동안 할 예정인지 적시하도록 돼 있다. 형식은 설문지이지만, 내용은 홍보 교육을 안 하면 안 될 것처럼 돼 있다.

 

기관장들이 홍보 교육을 받는 동안 수행비서들은 대부분 따로 마련된 휴게실에 모여 있었다. 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한 팀은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우리 '어르신'이 민방위 교육 받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출입구에서 이름을 적게 하나."

"그러게 딱 민방위 교육하고 비슷하네."

"뭐가 비슷해! 민방위 교육은 출석만 체크하고 집에 가도 되잖아. 그런데 이건 집에도 못 가게 하니···."

 

2시간 넘게 교육을 마치고 나온 기관장들은 다소 피곤해 보였다. 기관장들은 대부분 기자의 물음에 "할 말 없습니다"며 급하게 자리를 떴다.

 

하지만 지방에서 왔다는 기관장은 "내가 아무리 국가가 주는 월급을 받는다지만, 4대강 하고 아무 관련이 없는데 꼭 이렇게 서울까지 불러 올려야 하느냐"며 불만을 나타냈다. 이 기관장은 "교육 받은 시간보다 고속도로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길다"고 말했다.

 

또 한 기관장은 "(기획재정부에서) 출석을 못하면 사유서를 제출하라고 했다"며 쓰게 웃었다. 이어 그는 이 말을 남기고 껄껄 웃으며 현장을 떴다.

 

"민방위 교육은 '땡땡이'라도 치지"... 국가 주도 '근무지 이탈'

 

"4대강 하면 경제도 좋아지고, 환경도 좋아지고, 문화도 좋아진다네요. 뭐 무조건 다 좋다네요. 그렇게 좋은 걸 나만 모르고 있었나 봐요. 허허허."

 

이날 정종환 국토해양부 장관은 인사말을 통해 "4대강 살리기 사업이 워낙 큰 국가적 이슈라서 함께 고민해보고자 이렇게 불렀다"며 "고유 업무 보시는데 이렇게 불러 죄송하다"고 말했다.

 

즉, 정부가 고유 업무와 상관없는 일에 기관장들을 무리하게 불러 모은 걸 인정한 셈이다. 이 때문에 기관장들은 본의 아니게 '근무지 이탈'을 하게 됐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최근 한국예술종합학교 감사 후 황지우 전 총장이 "근무 시간에 근무지를 이탈했다"고 지적한 바 있다.

 


태그:#4대강정비사업, #공공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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