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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커뮤니케이션 발달사는 크게 4단계로 진화돼 왔다. 활자미디어→전파미디어→영상미디어→뉴미디어로 진화되기까진 실로 엄청난 시간이 소요됐다. 컴퓨터 혁명 또는 커뮤니케이션 혁명으로 일컬어지는 뉴미디어 시대에 이르기까지 미디어 진화 과정엔 많은 노력과 희생도 수반됐다.

그래서 뉴미디어는 오늘날 정치, 경제, 문화 등 사회구조 전반에 걸쳐 정보와 지식의 가치를 높인 근간이자 기반으로 손색없다. 종합화, 상호작용성, 비동시화를 특징으로 한 뉴미디어는 그러나 지금도 계속 진화중이다. 이러한 초정보시대에 과거 오랜 세월동안 권력체제를 수호하고 권력을 옹호, 유지하는 수단으로 활용돼 왔던 올드미디어가 정치선전 수단으로 등장하고 있으니 역설도 이런 역설이 없다.

다름 아닌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서, 그것도 인터넷 시대에 역사를 거스르고 민주주의를 부인하는 아이러니한 일들이 발생하고 있다. 올드미디어를 못 잊어 그리워하는 향수와 연민을 넘어 퇴행적 프로파간다와 카타르시스를 추구하는 행태가 참으로 가관이다. 지금 우리 정치와 민주주의가 어느 시대로 향하는지 말이 아닌 눈으로 보여주고 있다. 과거를 복기해보면 얼마나 진부하고 퇴행적인 행태인지를 알 수 있다.   

[# 장면 하나] "라디오와 대중을 지배하는 자가 권력을 장악한다?"

독일 나치당 선전장관 괴밸스는 히틀러와 함께 라디오 연설을 주요 선전술 무기로 활용했다.
▲ 괴벨스와 라디오 독일 나치당 선전장관 괴밸스는 히틀러와 함께 라디오 연설을 주요 선전술 무기로 활용했다.
ⓒ E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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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초 독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매스커뮤니케이션 연구들이 라디오에 집중되기 시작할 무렵이다. 당시 라디오의 등장과 대중화는 많은 사람들의 태도나 의견을 쉽게 변화시킬 정도로 그 힘이 막강하다고 많은 연구자들은 주장했다. 매스미디어의 위력은 매우 강력하다는 '마법의 탄환이론'이 바로 이 시기에 등장했다.   

이러한 주장과 이론의 근거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는 동안 라디오를 이용한 선전활동이 많은 사람들에게 효과를 발휘했기 때문이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에서 개발되었던 라디오를 이용한 '프로파간다'(propaganda, 선전술)는 1940년대까지 독일 국민들에게 전쟁의 정당성을 설득하거나 전쟁수행에 필요한 인력을 동원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 중심에 선 인물이 바로 괴벨스와 히틀러다. 최고의 예술가가 되고 싶었던 괴벨스를 세상은 알아주지 않았다. 유일하게 그를 알아주는 이가 있었으니 전쟁광, 히틀러였다. 히틀러와 만남 이후 그의 인생은 180도로 바뀐다. 그의 예술관도 바뀐다. 인간의 감정과 본능을 예리하게 꿰뚫어 보는 그의 예술가적 통찰력은 대중을 지배하기 위한 작전에 활용된다. 나치당 선전장관으로 그가 가장 먼저 대중 지배기법을 택한 것은 라디오였다.

라디오를 전 국민들에게 보급하여 선전활동을 했다. 웅변에 능한 히틀러의 라디오 연설을 늘 접하도록 한 것이다. 사상을 자연스럽게 침투시켜 국민들이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게 한 그의 전략은 초기엔 적중하는 듯 했다. 대중은 거짓말을 처음에는 부정하고 그 다음엔 의심하지만 되풀이하면 결국 믿게 된다는 나름대로의 신념을 실천하고 확인한 계기가 바로 라디오였다.

"적에 맞서려면 무엇보다 한없는 대중들의 증오를 활용해야 한다", "대중을 지배하는 자가 권력을 지배한다"는 등의 내용은 그 후 그 유명한 나치스 정권의 선전기법으로 전 세계에 소개됐다. 그러나 이러한 선전기법이 그리 오래가진 못한다.

라디오 등장과 같은 시기에 태어나 대중화가 될 무렵 생을 마감한 히틀러(1889~1945)는 유태인과 독일민족에게 씻을 수 없는 전쟁을 일으키고  패전을 거듭하다 1945년 4월 29일 베를린의 지하 방공호에서 에바 브라운과 결혼식을 올리고 다음날 베를린이 함락되기 직전에 자살하고 만다.

[# 장면 둘] "선전영화, 마법의 탄환처럼 영향력을 발휘할까?"

텔레비전이 등장하기 전인 1940년대 초 미국으로 다시 가보자. 영화는 당시 미국에서 가장 각광 받는 대중 매체로 부상하기 시작한다. 영화가 대중들의 오락추구를 가장 잘 충족시켜 주는 매체로 인정받게 되자 정부는 선전매체로 활용하기 시작한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 군당국은 참전을 위해 모집한 많은 신병들이 전쟁의 역사적 배경이나 의미 그리고 미국이 전쟁에 개입하는 이유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있다는 판단아래, 이들을 효과적으로 교육하고 선전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영화를 채택했다.

'마법의 탄환'처럼 즉각적이고 획일적이며 또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여 모든 군인들이 전쟁에 대한 인식이나 태도를 새롭게 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던 것이다. 군당국은 군인들의 전쟁에 대한 인식을 제대로 확립시키고 애국심을 고취시킴으로써 군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당시 명성을 날렸던 영화감독 프랭크 캐프라(Frank Capra)에게 의뢰하여 '우리는 왜 싸우는가?'(Why We Fight?)란 영화 시리즈를 제작해 홍보와 선전을 대대적으로 펼쳤다.

이 영화시리즈의 관람이 과연 얼마나 큰 효과를 발휘하였는가 하는 물음에 답하기 위해 당시 많은 사회과학 연구자들은 군인들을 대상으로 실험연구를 실시했다. 선전영화를 보고 난 후 군인들이 전쟁에 관해 얼마나 잘 알게 되었으며, 전쟁에 대한 의견이나 태도가 얼마나 바뀌었는가를 과학적 방법으로 측정했던 것이다. 이것이 매스미디어 효과 이론 중 그 유명한 호블랜드(Carl Hovland) 실험연구의 토대가 됐다.

결과는 의외였다. 선전영화가 젊은이들에게 획일적이며 막강하게 작용하리라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선별적이고 제한적으로 나타났음이 실험연구 결과 나타난 것이다. 개인의 태도나 가치관에 따라 메시지에 대해 각기 다르게 반응을 나타낸 것. 결국 많은 혈세를 들여 제작한 선전영화 시리즈 효과는 기대 밖의 저조한 결과를 가져왔음이 증명된 유명한 사례다.

[# 장면 셋] <대한 늬우스>, 독재권력 세워내고 연장시킨 첨병 역할

1950년대 초 대한민국. 국가 지도자의 역량을 부각시키고 조국 근대화의 이데올로기를 전파할 만한 수단이 필요했다. 다양한 의식계몽 캠페인을 주도한 선전매체가 필요했던 것이다. 곧 정부가 직접 제작한 <대한 늬우스>가 영화관에서 상영되기 시작했다.

<대한 늬우스>는 1945년 해방과 더불어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1948년 정부 수립으로 공보처에 공보국 영화과가 발족되면서 부정기적인 흑백뉴스 영화인 <대한전진보>가 월 1회 정도 제작, 배포됐다. 6·25 전쟁 이후 제작이 중단된 <대한전진보>는 1953년 <대한 늬우스>로 바뀌어 제1호를 제작했다. 월 1회씩 제작된 <대한 늬우스>는 뉴스라는 말에는 어울리지 않게 정부의 시각에서 뉴스를 재구성한 홍보물 또는 선전물에 지나지 않았다.

1960년대 이후부터 1980년대까지 <대한 늬우스>는 유신독재와 군사정권을 찬양 옹호하며 국민의 눈과 귀와 입을 막고 왜곡하며 독재권력을 세워내고 연장하는 첨병 역할을 수행해 왔다. 그러나 1980년대 들어서면서 5~10분씩 집권층 동향이나 정부정책 홍보에 열을 올리는 바람에 TV의 '땡전 뉴스'만큼이나 국민들의 조롱거리 대상이었다. 이런 역기능으로 1990년대 문민정부 출범이후 쇠락의 길을 걷는다.

1990년대 들어 권위주의적 이미지 개선을 위해 외형적으로 태극기가 배경이던 타이틀을 없애고 컴퓨터 그래픽을 이용한 새로운 시도를 하였으나, 1994년 12월 2040호를 끝으로 발족 49년 만에 극장 상영이 막을 내렸다.

<대한 늬우스>가 선전과 홍보 역할을 톡톡히 수행했음에도 끝내 외면당한 이유는 뭘까. 많은 커뮤니케이션 연구자들의 연구결과를 종합해보면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집단적 행동에 소실된 사적인 개인을 위한 '프로파간다' 수단으로 활용됐다는 점이다. 즉 대통령 개인과 측근, 고위 공무원, 군인 등을 주로 등장시킨 <대한 늬우스>는 권력유지 수단으로 또는 최고 권력자의 의도를 전달하기 위한 장치로 주로 활용됐다는 점에서 식상함을 안겨 줬다.

둘째는 반대급부의 실종을 들 수 있다. 국가 정책을 추진하는 데 있어 자연스럽게 부가되는 반대의견이나 부작용 등에 대한 조명이 최소화되고 정부 측의 정보가 일방적으로 관객들에게 전해졌다는 점에서 외면을 받았다. 쌍방향 소통이 아닌 일방향 커뮤니케이션이 빚은 결과다.

[# 장면 넷] 그 시대 그 독재자들의 프로파간다 악령이 왜 필요한 걸까?

15년 전 사라졌던 <대한 늬우스>가 다시 부활했다.
▲ 대한 늬우스 부활 15년 전 사라졌던 <대한 늬우스>가 다시 부활했다.
ⓒ 대한민국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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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 오늘의 대한민국 사회를 되돌아보자. OECD 국가 중 초고속 인터넷 보급률 1위로 IT 선진국임을 자랑하는 나라에서 대통령의 주례 라디오 연설이 등장했다. 국민과 소통하겠다며 2008년 10월 13일 시작한 라디오 연설. 하지만 1920년대 강력했던 전파 미디어의 초기 위력을 발휘하진 못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대한 늬우스>까지 부활했다. 15년 전 사라졌던 정부 홍보영상물 <대한 늬우스>가 2009년 6월 25일 극장가에 등장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정부정책을 국민들이 쉽고 편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대한 늬우스 4대강 살리기'를 제작해 한 달간 전국 52개 극장 190개 상영관을 통해 선보이기 시작했다.

텔레비전 개그 프로그램의 '대화가 필요해'라는 꼭지의 형식을 빌려 4대강 개발사업을 홍보하는 영상이 전국 여러 영화관에서 본 영화에 앞서 상영됐다. 형식이 바뀌었다지만 관객을 꼼짝 못하게 앉혀놓고 정부 논리만 일방적으로 주입한다는 점에선 과거 권위주의 정권 때의 <대한 늬우스>와 다를 바 없다. 코미디가 따로 없다. 이런 식의 '국민 계도'가 지금도 가능하다고 본 시대착오적 발상이 한심하다.

반발과 조롱이 확산되고 있다. 저급한 사투리와 여성 비하 논란이 당장 일고 있다. 자발적인 관람거부 캠페인도 벌어지고 있다. "돈 내고 보는 영화라도 맘 편하게 보게 해달라"는 주장이 시작 단계부터 나오고 있다. 선택권을 무시당한 국민으로선 당연한 행동이다. 지금 이명박 정부는 정책과 정권의 일방적 선전보다는 대화와 타협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직도 모르고 있는 걸까?

그렇다면 더 큰일이다. 국민 대다수가 반대하는 4대강 사업을 그럴듯하게 포장해 일방적 선전으로 세뇌하려 드는 대신 국민의 말을 듣는 게 먼저다. 그러자면 <대한 늬우스>의 퇴행적 부활부터 거둬야 한다. 명칭 자체부터 거부감을 갖게 하는 정책 선전물을 혈세 들여 만들어 꼭 영화관에서 세뇌시키려는 의도가 너무도 아날로그적이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인터넷 초강대 국가'라는 표현이 무색하기 짝이 없다.  

수많은 희생을 담보로 허울 좋은 근대화와 산업화, 민주화를 내세우며 혁명과 쿠데타, 종신독재기도 등을 서슴지 않았던 잔혹했던 그 시대 그 독재자들의 프로파간다 악령을 왜 이 정부는 필요로 하고 있는 걸까? 이미 많은 국민들은 냉철히 자각하고 있다. 거부감은 행동으로 나타나고 있다.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 인터넷 유비쿼터스 시대에 라디오와 영화의 향수에 젖어 있는 그들만 단지 모르고 있는 것 같다.          


태그:#프로파간다, #대한늬우스, #라디오연설, #4대강 살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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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가 패배하고, 거짓이 이겼다고 해서 정의가 불의가 되고, 거짓이 진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성의 빛과 공기가 존재하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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