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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처럼 보이는 이란의 인터넷카페.
 독서실처럼 보이는 이란의 인터넷카페.
ⓒ 김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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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이스파한의 마지막 날이니만큼 한 번 더 자얀데 강을 걷고 싶었습니다. 지난 밤 많이 앓았던 하나도 활기를 되찾으면서 여행본능이 되살아났는지 빨리 나가자고 재촉했습니다. 숙소에서 지체하는 시간이 아깝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큰 애 선희가 브레이크를 걸었습니다. 자기는 자얀데 강 가기 싫다는 것입니다. 인터넷카페에 가겠다고 떼를 썼습니다.

큰 애의 의견에 절대로 찬성할 수 없었습니다. 인터넷은 한국에서도 언제든 할 수 있는 것인데 이스파한에서 자판기나 두드리면서 시간을 흘러 보내는 건 정말 어리석은 행동 같았거든요.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는 짓이라는 생각 때문에 완강하게  거부했습니다.

선희도 만만찮았습니다. 이제 어엿한 사춘기 소녀인지라 자기 의견이 분명했고, 윽박지른다고 고분고분 따라올 시기는 지났습니다. 자기는 기어이 인터넷 카페에 가야겠다고 고집을 피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리 한복판에서 못 볼꼴을 보이고야 말았습니다. 그곳은 이스파한의 번화가로 식당과 옷가게들이 즐비하고 늘 젊은 애들이 서성이는 곳인데 그곳에서 선희가 동생에게 욕을 하면서 행패를 부렸습니다. 사실은 자기 의견을 들어주지 않는 나에게 그렇게 하고 싶었겠지만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고 어젯밤 지독하게 앓아서 하룻밤 사이 몰라보게 수척해진 동생을 괴롭혔던 것입니다.

안 그래도 선희가 계속 고집을 피워서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았는데 거기다 아픈 동생에게 행패 부리는 모습을 보니까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소리를 있는 대로 크게 질렀습니다. 소리 지를 때 난 잠시 이곳이 이란이고 그리고 내가 서있는 이곳이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지나다니는 곳이라는 사실을 깜빡 잊어버렸던 것 같습니다.

조용히 걸어가도 눈에 띄기에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데 대로에서 고래고래 소리까지 질렀으니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리는 게 등이 따갑게 느껴졌습니다.

소리를 지르고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자 갑자기 제 정신이 들면서 부끄러워져서 고개를 숙인 채 급하게 자얀데 강으로 걸었습니다. 협상은 없다, 그냥 밀어붙인다는 식으로 걸었는데 선희 역시 만만찮았습니다. 자기는 절대로 자얀데 강으로 가지 않겠다고 버텼습니다. 그러면서 도로 한가운데 딱 버티고 서서 따라오지 않았습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더니 내가 고집을 꺾기로 했습니다. 더 이상 도로에서 실랑이를 벌이는 것도 지치고 저렇게까지 떼를 쓰는 것을 보면 그만큼 인터넷카페에 가고 싶다는 뜻, 의지의 진정성이 느껴졌기에 난 한 발 물러서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선희와 다시 협상을 시작했습니다. 인터넷은 한 시간만 하고 꼭 자얀데 강으로 가자고.

이스파한 번화가의 가판대 앞에서. 잡지류를 파는 곳인데 잡지 표지인물이 아이 아니면 남자 얼굴 뿐이라는 게 인상적이었다.
 이스파한 번화가의 가판대 앞에서. 잡지류를 파는 곳인데 잡지 표지인물이 아이 아니면 남자 얼굴 뿐이라는 게 인상적이었다.
ⓒ 김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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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우린 인터넷카페로 갔습니다. 카페는 2층에 있는데 두 개의 방으로 이뤄져 있었습니다. 작은 방에는 컴퓨터 3대와 책상이 있는데 직원용 방이었지요. 직원은 여직원 두 명과 남자 직원 한 명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좀 더 큰 방이 손님들이 이용하는 방인데 컴퓨터가 꽤 많았습니다. 그리고 한쪽에는 도자기류가 전시된 장식장도 보였는데 예쁜 장식품들이 많았습니다.

우리나라 피시방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습니다. 이곳의 피시방은 사무를 보는 사람들이 드나드는 것 같았습니다. 말끔하게 양복을 차려입은 남자들이 서류가방을 들고 와서 잠시 앉았다 가거나 보기에도 캐리어우먼임이 분명한 아가씨들이 컴퓨터를 차지하고 앉았습니다.

그들 틈에 선희가 끼어 앉아서 인터넷을 즐기는 동안 하나와 난 소파에 앉아서 두리번거리면서 기다렸습니다. 선희가 열심히 인터넷바다를 헤매고 있을 때 마그넷을 두른 귀엽게 생긴 아가씨가 선희에게 다가가  물을 마시고 싶으냐, 주스를 마시고 싶으냐를 물었고, 화장실 위치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아가씨는 참 친절했습니다. 친절한 아가씨를 보니까 마음이 놓여 선희만 이곳에 두고 우리는 밖으로 나가 가까운 곳을 구경하다가 나중에 데리러 와도 될 뻔 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선희는 컴퓨터를 한 시간 하고 나더니 방금 천국을 다녀온 아이처럼 행복해졌습니다. 종알종알 말도 많아졌고 고분고분 말도 잘 들었습니다.

"비로소 문명과 사회와 연결된 사람이 된 것 같아."

이런 거창한 소리를 하기에 컴퓨터에서 뭘 했는지 물어봤습니다.

"아빠한테 메일 한 통 보내고, 드라마 검색했어."

인터넷으로 자기가 관심 있던 드라마를 검색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여행을 떠나올 무렵 "꽃보다 남자"라는 드라마가 시작은 하지 않았지만 <우리 결혼했어요>에서 한창 인기를 얻고 있던 김형중이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애들은 이 드라마에 대해 많은 기대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선희는 이 드라마를 검색해서 돌아가는 상황을 체크하고, 또 자기가 즐겨보던 드라마인 '바람의 나라'도 찾아본 모양입니다.

자신은 문명과 사회와 연결된 사람이 되고 싶다고 큰소리치더니 세상과의 소통이 연예인의 근황을 알아보는 것이고, 드라마 내용을 꿰차는 것이냐고 놀렸습니다. 내가 놀리자 동생도 덩달아 놀렸지만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선희는 행복해 했습니다. 누가 뭐라 해도 자기가 좋아하는 세계와의 접속에서 심리적 안정감을 찾은 것 같았습니다. 이제야 우리 세 사람 모두의 뜻이 모아져 애초 약속대로 자얀데강을 향해 걸을 수 있었습니다.


태그:#이란, #이스파한, #인터넷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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