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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몽이 처음 성을 쌓은 오녀산성으로!

7월의 첫날이 밝았다! 2009년 7월 1일 우리는 고구려 조상들의 피와 땀이 서린 환인으로 향한다. 환인은 고구려가 첫 도읍을 정한 졸본성이있던 장소이다. 환인에 도착하니 고구려 조상들의 웅혼한 기상이 벌써부터 느껴져서인지 대원들은 다들 들떠 있는 모습이다. 흥분을 가라앉힌 우리는 주몽이 졸본성에 세운 첫 산성인 오녀산성에 도착하였다.

오녀산성은 천해의 자연환경을 이용하여 쌓은 성곽이다. 마치 칼데라호를 연상시키는 듯 돌로 만들어진 산의 안쪽에는 호수대신 평평한 평지가 자리잡고 있다. 산의 정상까지는 950여 개의 계단을 올라야만 도착할 수 있다. 사실상 오늘이 본격적인 여정의 시작이라
크게 지쳐 보이는 대원들은 없었다. 우리는 가파른 돌계단 위로 우거진 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에 수백년전의 고구려 조상님들이 그랬던 것처럼 땀을 식혔다. 그렇게 쉴새없이 올라가기 30여 분, 우리들의 눈 앞에 들어온 건 고구려 건국설화에서 익히 들었던 비류수(沸流水)였다.

오녀산성 정상에 올라 바라본 비류수는 고구려인들의 기상을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 주몽이 건넜다던 비류수(혼강)의 모습 오녀산성 정상에 올라 바라본 비류수는 고구려인들의 기상을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 원동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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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녀산성은 천해의 요새인 
돌로만들어진 산에 만들어졌다.
▲ 오녀산성의 모습 오녀산성은 천해의 요새인 돌로만들어진 산에 만들어졌다.
ⓒ 원동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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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몽의 재주를 시기한 맏아들 대소(帶素)의 모함으로 동부여를 도망친 주몽이 건넜던 강.
그러나 주몽이 건너기엔 강의 물살과 깊이가 너무 거셌다. 이에 주몽은 강에 대고 말한다.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물의 신 하백의 외손이다. 오늘 화를 피해 도망하는 길에 뒤따르는 자가 쫓아 닥치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는가?"

주몽이 말이 끝나자마자 강 속에서 올라온 자라와 물고기가 다리를 만들어준다. 결국 주몽은 다리를 건너 이곳에 고구려를 세웠다.

우리들은 바로 이 역사적인 현장에 직접 서 있었다. 주몽이 건넜다던 비류수(沸流水)와 오녀산성의 웅장함은 고구려의 이미지를 머리보다 가슴 속에 각인시켜주었다. 우리는 화사한 수식어로 꾸미기엔 부족할 만큼 우렁차고 씩씩한 고구려인들이 되어 "청산리역사대장정 청년횃불8기(대원들이 속한 팀이름) 화이팅!"을 외쳤다.

오녀산성 정상에 올라 조금 걸어가다보면 
옛 궁궐이 있던 터를 발견할 수 있다. 
돌로된 부분이 기둥을 세웠던 장소라고 한다.
▲ 오녀산성안에 있는 성터 오녀산성 정상에 올라 조금 걸어가다보면 옛 궁궐이 있던 터를 발견할 수 있다. 돌로된 부분이 기둥을 세웠던 장소라고 한다.
ⓒ 원동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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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관광객의 한국인이지만 한자와 영어 안내문을
제외하고는 어디에서도 한글을 찾아볼 수 없다.
▲ 오녀산성입구에 있는 안내판 대부분의 관광객의 한국인이지만 한자와 영어 안내문을 제외하고는 어디에서도 한글을 찾아볼 수 없다.
ⓒ 원동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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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광개토대왕비 촬영작전

오녀산성을 내려오자 우리들의 가슴 속에 고구려 조상님들을 한 분씩 모신 기분이었다. 조상님들을 한 분씩 모신 대원들의 눈망울은 분명 아까보다 훨씬 깊고 강인해져 보였다. 하지만 우리가 다음으로 갈 곳이 광개토대왕비라는 사실에 대원들에게서 강인함, 기대감과
함께 긴장감을 느낄 수 있었다. 공안들의 경계가 심하고, 무턱대고 촬영을 했다가는 공안들에게 저지, 심지어는 압수까지 당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원들의 긴장감은 고조된 것이다.

우리는 오녀산성을 출발하여 광개토대왕비를 보기 위하여 고구려의 2번째 도읍지였던 국내성(집안)에 도착했다. 고구려 최대의 영토를 확장한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아들 장수왕이 세웠다는 광개토대왕비. 그 역사적인 광개토대왕비가 대원들의 눈앞에 서 있었다. 중국측에서 광개토대왕비의 침식을 막기 위해 유리창으로 만들어놓은 보호건물은 광개토대왕비를 보호하기보다는 가둬두기 위해 만들어 놓은 느낌이었다.

우리의 사진촬영은 유리관 밖에서는 가능하나 유리관 안으로 들어와서는 절대불가였다.
사진기를 만지작거리는 대원들의 뒤에는 어김없이 공안이 다가왔다. 카메라를 공안에게 건네줄만큼 간이 큰 사람은 없어 공안이 다가오면 카메라를 주머니 속에 넣었다. 그 와중에 촬영팀으로 따라온 KBS PD님은 대원들의 미리 짜놓은 듯한 각본의 도움으로 '광개토대왕비 몰래카메라'를 찍을 수 있었다. 공안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뒤에 따라붙을 때면
대원들은 PD님에게 "PD님 뒤! 뒤!"라고 속삭였고, 공안이 사라졌다 싶으면 "PD님 갔어요 촬영 촬영!"이라고 속삭였다. 이렇게 대원들과 중국공안(?)들의 협조까지 이루어져 '광개토대왕비의 몰래카메라 촬영작전'이라는 각본없는 드라마가 완성될 수 있었다.

광개토대왕비를 촬영했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이동근 단장님은 1882년경 만주를 여행하던 일본군 참모본부의 중위 사카와 가게노부의 밀정에 의해 비문의 글자가 위조된 부분을 설명해주셨다. 내용인 즉슨 <백제와 신라는 옛 속민으로 조공을 바쳐 왔는데, 신묘년에 왜가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와 신라 등을 공파하여 신민으로 삼았다>라는 것이다. 일본군 측은 자신들의 역사왜곡을 합리화 하기 위하여 비문에 석회칠을 가하여 비면을 마멸하고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문자를 새긴 것이다.

광개토대왕비가 우리 민족의 아픔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 같아서 더 마음이 아팠다. 중국땅에 있어서 동북공정이라는 족쇄에서 자유롭지 못한 고구려유적들과 함께 일제시대 일본군들이 자행한 광개토대왕비 비문 변조.

이 모든 가슴아픈 역사가 대원들의 발길을 쉽사리 떨어뜨리지 않게 했다.

오른쪽밑에 흰옷을 입은 공안이 손가락질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 광개토대왕비를 가둬둔 유리 구조물 오른쪽밑에 흰옷을 입은 공안이 손가락질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 원동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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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에 대한 대원들의 열정과 사랑!

오녀산성부터 광개토대왕비까지 우리는 반나절만에 도읍지를 2번이나 옮기는 강행군을 하고 있었다. 사실 몸이 피곤하여서라기보다는 시간에 쫓기어 시간과 싸우는 강행군이 되고 있었다. 덕분에, 우리의 일정대로라면 광개토대왕비에 이어 바로 장수왕릉을 관람하고 곧바로 백두산에 가는 열차를 타기 위해 통화역으로 향해야 하는데 차질이 생기게 되었다. 계획대로 장수왕릉까지 관람하고 통화역으로 가면 시간이 너무 늦어져 저녁식사를 할 수 없게 된다고 하였다. 이에 배우이자 대장정팀의 팀장을 맡은 송일국 팀장님은 우리의 의견을 물었다.

"여러분들! 지금 시간이 생각보다 많이 지체돼서 장수왕릉을 가게 되면 여러분들 저녁식사를 못하게 될 수도 있어요. 그래도 장수왕릉 보시고 가셔도 괜찮겠어요?"

대원들의 대답은 만장일치였다. "장수왕릉 가요! 저녁 안 먹어도 괜찮아요!" 대원들의 목소리에서는 하루의 피로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대원들의 고구려에 대한 열정과 사랑은 한끼 저녁식사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큰 것이었다. 대원들의 열정에 현 수원박물관자문위원이신 이동근 청산리역사대장정 단장님께서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아휴~ 나는 장수왕릉 안 보고 밥먹는다고 할까봐 얼마나 걱정했는데! 우리 청산리역사대장정 대원들 자랑스럽구나!(웃음)"

너른 품을 내준 장수왕릉

버스를 타고 가던 와중에 벌판너머로 피라미드와 비슷한 모양을 한 장수왕릉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꽤 멀리 떨어져 있어 보였는데도 형태가 고스란히 보이는 것은 과거 장수왕의 업적과 기상이 릉의 규모만큼 실로 엄청났음을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장수왕릉 입구에 도착한 우리들은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건만 장수왕릉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장수왕릉을 빨리 보고 싶다는 열정과 함께 저녁밥을 먹고 싶은 욕망(?)이 가미된 것이다. 그렇게 대원들이 뛰고 뛰어 도착한 장수왕릉은 반신상의 부처가 마치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손을 벌리고 자신의 품을 내주는 모양이었다.

장수왕릉은 그 크기도 엄청났지만 자세히 보면 돌을 쌓아둔 모양이 무척이나 정교해 보였다. 이동근 단장님의 설명에 의하면, 돌을 쌓아놓는 모양이 위쪽으로 올라가면서 큰돌에서 작은돌로 점점 작아지는데 그 모양이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탑쌓기 방식인 들여쌓기 방식이라고 한다. 이 전통은 조선시대의 탑쌓기 양식에까지 영향을 미친 전통적인 방식이다. 고구려 조상님들의 전통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좋은 예가 될 수 있다고 한다.

413-490년 사이에 축조된 고구려 20대왕인 장수왕의 무덤인 장수왕릉. 장수왕릉은 소리 없이 1000년 이상의 긴 시간 동안 같은 위치에 앉아서 과거 고구려인들을 환대했던 것처럼 고구려인들의 후예 청산리역사대장정 대원들에게도 활짝 웃으며 자신의 품을 내주었다. 남의 나라 땅에 서 있어서 더 외로워 보이는 장수왕릉을 뒤로 하고 민족의 영산 백두산을 오르기 위해 다음 장소인 통화역으로 향했다.

통화역으로 향하면서 대원들은 말이 없었다. 각자 오래 전 국내성의 터전이었던 집안시내를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나는 분단이라는 현실이 갈라놓은 동포들이 하루빨리 다시 만나 우리의 역사, 고구려에 대한 연구를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동포들이 합심한다면 지금보다 더 크고 규모 있게, 분명 중국이 우리의 고구려사를 연구하는 것보다 깊이 있는 연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와중에 대원들 뒤로 말없이 서있는 장수왕릉이 멀어져갔다.

한눈에 봐도 웅장해 보이는 장수왕릉의 모습.  돌들을 우리나라의 전통 쌓기 방식인 들여쌓기하여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큰돌에서 작은돌로 변한다.
▲ 장수왕릉의 모습 한눈에 봐도 웅장해 보이는 장수왕릉의 모습. 돌들을 우리나라의 전통 쌓기 방식인 들여쌓기하여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큰돌에서 작은돌로 변한다.
ⓒ 원동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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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고구려, #주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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