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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천벽력같은 일을 당하지 않으려면 콘돔을 끼세요!
 청천벽력같은 일을 당하지 않으려면 콘돔을 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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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임약 어떤 걸 사야 하나?"
"학교에서 콘돔 공짜로 얻을 수 있다는데 뭘 사?"
"어머머, 그러니?"

올 가을에 대학에 들어가는 큰딸 앞에서 나는 '쿨'한 엄마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을 마치고 온 딸에게 넌지시 물었다. "어떤 피임약을 사야 하냐"고.

꽉 막힌 엄마가 아니고 웬만큼 트인 엄마라면 그런 정도의 센스 있는 질문은 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니, 사실은 '쿨'한 엄마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현실적으로 당장 코앞에 닥친 현안이기 때문이었다.

아직 스물이 안 된 꽃다운 나이. 절제가 최선이라지만 이성이 때로 '무기력하게' 본능 앞에 무릎을 꿇는 현실. 선보다 악이 승하는 모순된 세상에서 피임약과 같은 사전 준비는 '지혜'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딸에게 진지하게 물었던 것이다.

더구나 지금까지는 한 집에서 '동거'를 하고 있지만 8월 하순이 되면 '별거'를 해야 하는 실제상황인 만큼 내 질문은 농담처럼 가볍지 않았다. 무거운 진담이었다.

"콘돔 공짜로 얻을 수 있어." 딸은 1박2일 동안 벌어진 대학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 다녀왔다.
 "콘돔 공짜로 얻을 수 있어." 딸은 1박2일 동안 벌어진 대학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 다녀왔다.
ⓒ 한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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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핫 이슈' 피임약 얘기에도 의연한 딸

그런데 이것뿐 만이 아니었다. 며칠 전 보게 된 한 대학의 공개된 '익명 게시판'도 내게 자극을 주었다. 거기 붙은 학생들의 고민스러운 비밀이다.

- 내 인생에 있어 가장 끔찍한 한 주였다. 만약 임신을 했으면 학교를 그만 두어야 하나, 입양을 해야 하나, 낙태를 해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느라고. 그런데 천만다행으로 생리가 찾아왔다.
- 임신 5주인데 아무도 이 사실을 모른다. 내 몸에 아기가 있다.
- 지금 임신 13주인데 아무도 모른다. 너무나 겁이 나서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가 없다.
 (와, 대단해. 넌 훌륭한 엄마가 될 거야.)
 (산전 건강 체크, 꼭 하세요. 만약 돈이 없다면 산모를 돕는 프로그램도 있어요. 철분제도 당장 복용하세요. 행운이 있기를.)
- 남자친구 생일날 내 팬티를 잃어버렸다.
- 헤어진 남자친구에게 더 이상 섹스를 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나는 섹스만 생각하면 기분이 나쁘다. 그는 진짜 솜씨가 없다.

 “남자친구 생일날, 팬티를 잃어버렸어요.”
 “남자친구 생일날, 팬티를 잃어버렸어요.”
ⓒ 한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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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 5주인데 아무도 몰라요. 내 몸에 아기가 있어요."
 "임신 5주인데 아무도 몰라요. 내 몸에 아기가 있어요."
ⓒ 한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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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실제 상황을 목격하면서 나는 모녀간에 다소 거북한 대화 주제일 수 있는 '피임약' 얘기를 꺼낸 것이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딸의 반응이었다. 내가 예상했던 반응은 이런 것이었다.

"(눈을 사납게 치켜뜨고 얼굴을 붉히며) 엄마, 미쳤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렇게 과격하게 나올 것이라는 내 예상과는 달리 딸의 반응은 너무나 순하고 착하기만 했다. 내가 너무 순진했나?

오호라. 그러니 넌 이미 피임약에 대한 정보도 알고 있고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지도 알고 있단 말이지. 그래, 정말 다행이다. 내가 굳이 입을 열지 않아도 넌 벌써 그런 정도는 숙지하고 있다고 하니 말이다.

피임약과 같은 '핫 이슈'에 대해 그저 아무 일 아니라는 듯 태연하고 의젓하게(?) 대답하는 딸을 보고 오히려 내가 놀랐다. '괜한 걱정 하고 있었잖아.'

미국서 딸 키우기... 조바심 나는 엄마

내가 살고 있는 미국 버지니아 주 해리슨버그 시는 할리우드 영화에서 보듯 밤이 되면 불야성을 이루는 화려한 도시가 아니다. 무법천지 같이 총질이 난무하는 살벌한 도시도 아니고.

인구 5만이 채 안 되는 얌전한 대학도시인 이곳은 평화롭고 한적하다. 그래서 안전에 관한 한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같이 보인다. 하지만 신문을 보거나 대학에서 보낸 이메일을 보면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총과 관련된 범죄 소식이 들리기도 하고 심야 캠퍼스에서 여학생이 성폭력이나 성폭행을 당했다는 소식도 들려오기 때문이다.

그런 소식을 듣고 있자면 딸만 둘 키우고 있는 나는 겁이 난다. 그래서 늦은 저녁에는 외출을 못하게 하는데 때로 학교 프로젝트 때문에 늦게 오는 경우가 있어 걱정이 된다.

지금이야 두 딸 모두 운전을 하니까 남의 차를 얻어 탈 일이 없지만 내가 태우러 가야 할 때는 종종 남학생 운전자의 차를 타고 오기도 했다. 조바심이 나는 나로서는 남학생의 밤중 운전이 겁난다고 말했지만 아이들은 잘 아는 학교 친구니까 괜찮다고 했다. 

하지만 어디 딸 가진 엄마 마음이 그렇던가. 조심, 또 조심해야 할 게 바로 '남자'인데 말이다.

JMU에서 열린 서머 밴드캠프의 발시티 드럼라인. 퍼커션 팀에는 남자들이 늘 북적댄다. 홍일점인 딸아, 남자를 조심해라! ^^
 JMU에서 열린 서머 밴드캠프의 발시티 드럼라인. 퍼커션 팀에는 남자들이 늘 북적댄다. 홍일점인 딸아, 남자를 조심해라! ^^
ⓒ 한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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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키우기도 겁나는 세상

이런 걱정은 딸 가진 엄마만의 문제가 아니다. 아들을 가진 엄마도 이런 고민을 토로한다.

"미국에서는 딸 키우기만 겁나는 게 아니야. 아들 가진 엄마도 걱정이 많아. 남학생을 성추행하려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지. 나는 아들이 고속도로 휴게소 화장실을 갈 때면 남자 화장실 밖에서 지키곤 해. 혹 무슨 일이 있을까 해서 말이야."

성이 개방된 사회에서 이런 청소년 아들딸의 성 문제, 성 교육은 모든 부모의 고민이자 걱정거리일 것이다. 이런 풍조를 반영하듯 며칠 전 신문에는 '애비에게(Dear Abby)' 칼럼(독자의 질문에 답하는 신문의 인생 상담란)에 청소년 성과 관련된 부모의 고민이 실렸다.

"애비에게

15살인 제 딸이 최근에 성병 진단을 받았습니다. 딸은 그 소식을 듣고 아주 망연자실해 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미 딸에게 성관계를 가져도 좋을 나이가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경고를 했습니다. 왜냐하면 성급하게 내린 결정이 평생 꼬리표를 남길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이죠. 딸과 이런 얘기를 나눴었지만 딸은 제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야 딸은 무슨 말인지 아는 것 같습니다. 10대들이 아무런 보호 장치 없이 성관계를 가질 때 얼마나 위험한지 제발 그 위험성을 경고해 주세요."

성병에 감염된 15살 소녀의 엄마에게 애비는 뭐라고 충고했을까?

"성관계를 가져도 될 만한 나이가 될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한 답이 되지 못합니다. 어떻게 하면 계획에 없는 임신을 피할 수 있는지, 성병의 위험성과 예방, 증상, 신속한 처치법 등을 알도록 해야 합니다.

10대들의 성병 감염률은 대단히 높습니다. 14살에서 19살에 이르는 미국 소녀들 가운데 네 명 중 한 명이 헤르페스, 인체유두종바이러스(HPV), 트리코모나스 질염 등에 걸리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성병은 심각한 상태로 발전하기 전에는 증상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치료를 안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치료를 안 하고 그대로 내버려두면 나중에 임신이 어려울 수 있으므로 성관계를 갖는 10대들은 적어도 1년에 한 번은 정기 검진을 받아야 합니다."

나만의 비밀 게시판에는 성과 관련된 비밀이 많다. "난 이제 섹스가 싫어." "내 룸메이트는 게이야!"
 나만의 비밀 게시판에는 성과 관련된 비밀이 많다. "난 이제 섹스가 싫어." "내 룸메이트는 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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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교육의 산 현장, '10대 미혼모 지켜보기'

애비의 충고가 현실적이지만 아이들과 이런 성 관련 대화를 나누는 것은 쉽지 않다. 우선 아이들이 귀를 막고 이런 민망한 얘기를 엄마와 나누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엄마로부터 듣는 껄끄러운 성교육보다 아이들에게 더 와 닿는 것은 눈으로 직접 보는 학교 안 탁아실 풍경이다.

 
미혼모인 10대 여학생들이 날마다 아기와 함께 등교하는 모습, 수유를 위해 공부시간 중에 나가거나 엄마를 애타게 찾는 아기 때문에 불시에 호출되는 '학생 엄마'들. 준비 안 된 이들 10대 미혼모들이 다른 학생들에게는 살아 있는 성교육 현장이 되고 있다(관련기사 : 10대 미혼모, 최고로 대접합니다).

NBC-TV의 <투데이> 쇼에 출연한 사라 패일린의 딸 10대 미혼모 브리스톨 패일린.
 NBC-TV의 <투데이> 쇼에 출연한 사라 패일린의 딸 10대 미혼모 브리스톨 패일린.
ⓒ NBC-TV 화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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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밖에도 요즈음 미국 10대들에게 온 몸으로 성교육을 시키는 유명 인사가 있다. 바로 브리스톨 패일린(19)이다. 브리스톨은 사라 패일린의 큰딸로 지난 5월, '10대들의 임신을 방지하기 위한 국민의 날'에 NBC-TV의 <투데이> 쇼에 출연했다.

브리스톨은 4개월이 넘은 아들 트립, 아버지 토드와 함께 출연하여 "내 경험을 통해 단 한 명이라도 10대의 임신을 막을 수 있다면 나는 성취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에선 콘돔 사용법 등 실제적인 교육 이뤄지지만

"성교육이요? 고등학교 체육시간에 1년 동안 받았어요. 누구나 다 받긴 하지만 학교에서 성교육을 받으려면 반드시 부모님의 동의가 있어야 해요. 왜냐고요? 어떤 부모는 자신의 자녀가 너무나 적나라한 학교의 성교육을 받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죠. 예를 들면, 콘돔 사용법이나 피임약 사용법 등을 자세히 배우거든요."

제임스매디슨 대학의 스포츠센터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그레이스(19)의 말이다. 그레이스는 학교 성교육 외에 부모로부터도 성교육을 받았다. 처음 성교육을 받은 건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엄마로부터 자신의 몸, 생리 등에 대해 기본적인 것을 배웠다. 하지만 엄마와 그런 대화를 나누는 것은 아무래도 어색하다고 했다. 성에 대해 개방적인 미국이라고 하지만 우리와 마찬가지로 부모와 이런 얘기를 나누는 것은 썩 달갑지 않은 모양이다. 대신 또래 친구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운다고 했다. 

이런 거 가까이 하면 섹스하게 돼. 그러니 책임있게 행동하고 결혼할 때 까지 기다려!
 이런 거 가까이 하면 섹스하게 돼. 그러니 책임있게 행동하고 결혼할 때 까지 기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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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성교육 대상은 점점 낮아지고 있는 추세다. 현재 초등학교 4, 5학년 정도 부터 성교육이 이뤄지고 있는데 이는 아이들의 발육이 좋아지면서 현실적인 도움을 주고자 함이다.

한편, 대학 기숙사 등에서는 학생들의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 실제 크기의 마네킹을 등장시켜 콘돔 사용 등의 구체적인 피임 방법을 설명하기도 하고 콘돔을 무료로 배부하기도 한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최근 들어 피임약이나 콘돔 등의 기구 사용 대신 동양적인 '절제(abstinence)'를 요구하는 성교육이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즉, 결혼 전까지 남녀가 성관계를 갖지 않고 절제하는 'Abstinence-Until-Marriage' 운동이 일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절제야 말로 가장 확실한 피임법이라고 주장하면서 말이다.

10대들의 임신이 연 75만 명으로 선진국 가운데 최고인 미국. 열 가운데 여덟은 결혼도 하지 않은 10대들이고 임신도 계획에 없던 것이라고 한다. 미국의 이런 통계를 보는 10대 청소년 아들딸을 둔 부모의 고민은 깊다. 


태그:#성교육, #성, #콘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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