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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7일 저녁, 우리 일행은 백두산 여행을 마치고 다음날 광주로 출발하기 위하여 연길의 대주 여관에 짐을 풀었다.

 

저녁에 룸메이트인 강씨가 바람이나 쏘이러 나가자고 했다. 연길의 날씨는 초가을 날씨처럼 서늘했다. 광주와 위도가 4도 차이라는 데 춥기까지 하다. 광주는 지금쯤 열대야 일 텐데 말이다.

 

밤의 연길 역 앞 시내는 고즈녁했다. 연길역 앞에 낮에는 사람들이 나와서 노래도 하고 춤도 춘다는데 역 앞 광장에 몇 사람만이 서성이고 대합실은 텅 비었다. 역 바깥의 목단강, 하르빈, 훈춘이라고 써진 네온사인만이 저 추운 북만주의 지명을 표시하고 있어 이 곳이 저 북쪽의 연변임을 실감했다.

 

 

여행을 가면 여행지의 야시장을 가 봐야 그 곳에 사는 사람들 삶의 모습을 볼 수가 있다. 시장에는 일반 소시민들이 다 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야시장을 찾았다. 그런데 길에 다니는 사람들이 전부 중국 사람들이라 우리 말을 알아듣지를 못한다. 이럴 때 우리 동포라도 있었으면 하면서 걷는 데 우리가  찾는 것을 보았는지 어떤 40대 남자 한 분이 무었을 찾느냐고 우리 말로 물었다.

 

이 곳에서 우리 말하는 분을 만나니 그리 반가울 수가 없다. 그 분말이 야시장은 택시를 타고 멀리 나가야 한단다. 그러면서 자기 가게가 멀지 않으니 가서 맥주나 한 잔 하자는 것이다. 자기도 한국동포를 만나니 반갑다는 것이다.

 

그는 정창일이라는 조선족이었는데 형과 사촌동생 셋이서 송이버섯 사업을 하고 있었다. 우리 둘까지 다섯 명이서 맥주에 송이버섯을 깎아 안주로 먹으며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했다.

 

정씨는 슬픈 그의 가족사부터 이야기를 했다. 자신의 할아버지 고향은 경북 영일이라는 것이다. 그는 지금도 말끝에 '교'가 들어가는 경상도 사투리를 쓰고 있었다. 해방이 되자 할아버지는 가족을 연변에 남겨두고 고향에 돌아가 6.25가 터지자 국군에 징집되었고 아버지는 1.4후퇴시 참전한 중공군에 입대하여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한국전쟁에서 총부리를 겨누고 싸웠다는 것이다. 동족상잔의 6.25가 국내에 사는 우리 동포뿐 아니라 중국에 사는 동포들 가족에까지 슬픈 역사를 안겨주었다. 슬픈 우리 민족의 역사이다.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는 전에는 한국인 대 중국인의 비율이 6:4 정도로 우리 조선족이 많았는데 지금은 조선족이 갈수록 줄고 있어 오히려 중국인의 비율이 6:4 정도로 더 많아 졌다 한다. 우리 조선족 젊은이들이 돈을 벌기 위하여 중국의 대도시나 우리 한국으로 많이 떠나서 연변에 조선족 젊은이들이 줄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은 거의 자본주의화 되어가고 있었다. 중국은 토지만 국가소유로서 거래가 되지 않지 모든 사유재산이 인정이 되고 아무 데나 갈 수 있고 이전할 수 있는 거주 이전의 자유가 인정된다는 것이다. 연변의 조선족인 그 네들 말로는 중국은 기회의 땅이라는 것이다.

 

이야기를 하다보니 중국시간 새벽 2시가 넘었다. 우리는 같은 핏줄을 나눈 조선족들의 따뜻한 동포애를 느꼈다. 그들은 누구인가. 일제시대에 일제의 공출과 수탈에 못 이겨 고향을 떠나 만주의 황무지를 개척했던  우리 이웃들의 후손들이다. 그런데 나는 어떠한가. 우리 한국에 들어와 있는 동포인 조선족에게 너무 무관심했었다. 이제는 그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자. 조그만 친절이라도 배풀고 타향에서의 그들의 어려움을 도와주자. 그들은 같은 핏줄을 나눈 한 겨레가 아닌가.


태그:#연길, #조선족, #동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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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여행에 관한 글쓰기를 좋아합니다. 여행싸이트에 글을 올리고 싶어 기자회원이 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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