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100일학교 2기생 맞을 준비로 바쁘다. 집 이구석 저구석이 모두 손 볼 곳이다. 한참 일을 하다 돌아오니 어머니가 전을 부치시면서 하나 먹고 하라고 손짓하신다.
이 더운날. 겨울이라며 뚜꺼운 윗도리를 입으시고 불가에 앉은 어머니 표정이 아주 흡족하시다. 어머니 좋아하시는 호박전이다.
요양보호사 선생께서 이 더운날 부침을 차려 주신 것이다. 부엌에서 하면 훨 쉬운 것을. 안 해도 누가 뭐라지 않는 것을. 부러 마루에 차려놓고 어머니가 하실 수 있도록 하나하나 뒷 감당을 해 주신다.
어머니 솜씨가 활짝 피어나셨다. 어머니 솜씨는 예나 지금이나 뛰어나시다. 전을 발라당 뒤집는 것도 그러려니와 오줌이 좀 묻었을(?) 혐의가 짙은 손을 씻지도 않고 덥썩덥썩 손바닥으로 전을 뒤집는 것도 남들이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어머니만의 솜씨다.
이렇게 부침 굽는 일이 끝나고 손까지 씻어주시니 흐뭇한 울 엄니. 요양보호사 선생님은 내가 어머니 모시고 산 세월과 거의 맞먹는다. 우리 집안 어떤 가족보다도 우리 어머니를 가까이에서 많은 시간을 함께 하고 계시다.
<똥꽃> 출판기념찬치 때 모셨었다. 특별히 요양보호사 선생님을 모시고 큰 꽃 다발을 드렸는데 꽃 다발 하나로 답례하기에 은혜가 너무 크다.
요양보호사 선생님이 가시고 어머니는 입가를 슥 문지르고 나를 빤히 쳐다 보셨다.
'더 뭐 먹을 거 없나?'가 아님은 안다. '더 뭐 할 일 없냐?'는 물음임을 나는 안다. 마당에 정구지(부추)를 나란히 잘라다 드렸다. 어머니는 또 신이 나셨다. 으험. 이걸 나 말고 누가 한단 말고. 있음 나와봐라 그래!~
어머니 입에서 박물관 학예사나 할 수 있는 말이 쏟아져 나온 것은 이때부터다.
"아이고~(이건 감탄사다. '아허아롱다리' 같은 말이다. 어디 간다는 미(米)국말이 아니다.) 정구지 꽃 핑거 봉게 나락 두벌 논 맬 때 됐네?"어머니 말씀을 듣고 유심히 봤더니 진짜로 부추에 꽃망울이 맺혀 있었다.
나는 이때다 싶어 끼어 들었다.
"정구지 꽃 피면 나락 두벌 논 매요?""두벌논을 잘 매야 돼야. 초벌논은 매 봤자 땅 속에 있는 풀씨가 도로 나능기라.""두벌논은 땅 속 풀씨가 안 올라와요?""찌랄하고로 그것도 모르능기 서당 간다고. 느그 서당 선상은 그렁거또 안 갈차주나? 책 보고 농사 짓는 놈 두지(곳간) 안 비는 놈 없다카더라."짐작컨대 두벌논을 매면 나락이 많이 자란 때라 더 이상 풀씨가 싹을 틔우지 못하리라. 나락의 울창한 그늘 밑에는 햇볕이 들어가지 못하니까 말이다. 근데 지금 우리 논을 제외하고 다른 논들은 나락이 패고 있다. 두벌논은커녕 논에 들어가지도 못할 상태다. 나락 꽃 다 떨어지니깐.
그노무 종자개량이 계속되면서 철이 다 어긋나기 시작한 것이다. 다른 식생들과 수 천년을 피고 지고 열매 맺기를 짝을 이뤄가며 해 왔는데 요즘은 다 어긋나고 있다. 길가에 핀 코스모스가 안타까울 지경이다.
부추를 다 가리신 우리 어머니. 탄력을 받으신 우리 어머니. 좀 쉬셔도 좋으련만 주문은 계속된다.
"또 뭐 할 거 없어? 이리 각꼬와아~"나는 밭에 가서 좀 쇠어 버렸지만 그늘쪽 부드러운 머위대를 잘라다 드렸다. 솥에 살짝 삶아 드렸다. 껍질을 벗기시면서 들깨 갈아서 들깨국 끓이시란다. 역시 대단한 솜씨다. 겉껍질은 물론 속 심을 하나 안 남기고 다 볽아 냈다.
진짜 어머니 솜씨는 그 다음 단계에서 드러났다. 앙그레 킴인지 뭐가 봐도 혀를 내 두를 것이다. 보라! 10년도 더 됐을 내 모시 반 바지를 가져다 무르팍이 헤진것을 보라 색 한 조각 갖다 붙이고 말끔히 꿰매셨다.
보라색의 마술이었다. 나희덕 시인은 자신의 저서 <보라빛은 어디에서 오는가 - 창비 ->에서 이렇게 말했다.
......주황은 어디에서 시작하고 노랑과 빨강은 어디에서 끝나는가. 빨강과 파랑을 엄밀하게 갈라놓는 보라색의 한계는? 보라 속에 들어 있는 수많은 경계를 보라.....울 엄니의 보라는 나희덕의 보라를 뛰어 넘는다. 멀쩡한 어머니 모시 적삼 호주머니를 하나 장례치르고 얻은 조각이기 때문이다. 빨강과 파랑의 경계가 아니라 거룩함과 풍요로움을 베푸시는 온전한 모정이다.
어머니의 전위적 발상은 바로 그 옆이다. 보라는 어쩌면 견인색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얇은 휴지조각을 대고 기워 놓으셨다. 영화제에서 상 받는 여배우의 의상에나 어울리는 저 환상적인 옷감을 보라. 바느질 역사에 길이 기록될 어머니의 신 소재 감각!
날아 오를 것 같은 가벼움과. 속박감이 없는 성긴 바느질. 솜보다 따스해 보이고 속살같은 부드러움. 종류를 불문하고 습기에 대한 거부! 짧디짧은 수명을 보란 듯이 내 걸고 있지 않은가.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부모를 모시는 사람들(cafe.naver.com/moboo)>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